< -- 41 회: 일반인 속에 혈마. -- >
창현이 내공을 갈무리 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실력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깨달음의 경지는 신선조차 넘어선지 오래였다. 환골탈태를 하고 백회혈까지 뚫은 내공과 더불어 충만한 선천지기, 즉 영력까지 더해지자 완연한 화경 경지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을 한다면, 창현이 굳이 갈무리를 하지 않았어도 대길은 창현의 진정한 경지를 알아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아봤자 딱 우물 크기 밖에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문파가 있다라!”
창현은 자신의 기억과 현 시대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난날의 자신은 일반인에 불과했다. 천재적인 머리까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앞뒤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 때와는 다르게 국가라는 단체가 직접적으로 무림 방파를 관리하는 것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대길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현의 질문을 통해서 창현이 지금 상황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실력을 숨기고 계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존댓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스무 살도 더 어린 청년이었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그 어린 시절 보았던 장문인이나 태극문파의 고수들보다 월등했고, 옅게 번지는 미소에서 우러나오는 여유는 대길에게 창현을 태산처럼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설명하자면 복잡하지.”
창현은 씨익 웃었다. 눈알을 굴리는 것을 보아 대길은 이 조직폭력배라는 단체의 두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 많은 눈치를 보면서 살아 온 것 같았다.
가볍게 탁자를 움켜 쥐었다.
스스스스스!
“!!!”
대길의 눈이 크게 찢어지고 있었다.
탁자는 말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탁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야 대길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천천히 그리고 스멀스멀 완전하게 가루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전히 창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범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 것이 훨씬 중요한 점이었다! 일류고수가 눈앞에 있는데 그 일류고수조차 기운을 느끼지 못하게 내공을 운용한다니!
“…절정이십니까?”
대길은 궁금증을 숨기지 않았다.
“여전히 비슷하게 분류를 하고 있나보군? 뭐 알아서 판단해라. 직접 눈으로 한 번은 보여줘야 확실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손을 탁탁 털고는 등을 소파에 깊숙이 기대는 창현의 모습에 대길은 신음성을 삼켰다.
“원하시는 바가…!”
“아, 딱히 원하는 바는 없어. 아까 여기 앉아 있었던 자식 좀 몇 대 패야 할 것 같거든. 내가 그 자식 때문에 사경을 헤매서.”
잔인하게 웃는 창현의 모습에 대길은 크음, 하고 신음을 터뜨렸다. 정말 아끼고, 경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감싸주기에는 상대가 너무나 강력했다.
짐작 했던 것보다 훨씬!
“…아끼는 동생입니다. 한 번만 용서를….”
대길은 망설였지만, 지금까지 경수와 나눴던 우정을 생각해서 끝내 입 밖에 그 말을 토해내었다. 물밑듯이 두려움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미 스무명의 부하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괜스레 사타구니가 시려운 느낌이었다.
창현은 호오, 라는 탄성을 다시 한 번 내뱉었다. 기억 속의 경수는 잔인했고, 무자비한 것은 물론 부하들에게도 그리 썩 신망이 두터운 편은 아니었다. 배교 교주 시절 교에 극도로 무관심하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신경을 썼던 편이었다.
나름 전대교주와 사부라는 명목의 노인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때 느낀 것은 어느 조직이든 그 꼭짓점은 늘 힘들다는 것이었다. 무력만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두머리 자리가 아니었다. 그 이외의 사람을 다루는 법이나 끌어당기는 힘이라 표현되는 카리스마는 물론 여러 가지 필요조건들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부하를 위해 절대적으로 강한 자신 앞에서 그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용기 있게 말을 하는 대길의 모습은 창현에게 꽤 호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사실 창현의 사상에서 경수가 누구를 죽인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살인이 빈번한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물론 각종 내란, 무림방파끼리의 전쟁까지.
피의 향연 속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도 아니었고, 또 지금의 자신 역시 그 때의 자신과는 많이 달랐다.
“그 자식이 날 죽이려 했던 이유는 그 자식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왜 그랬지?”
대길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창현은 여전히 미소를 가득 베어 물고 있었지만 지금하는 대답 여하에 따라 경수는 물론 자신에 대한 처분까지 정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지현이랑만 싸운다고 해보았자 그 승패를 결코 장담할 수 없다.
대길은 창현이…장문인과 동수가 아니면 반수 정도 위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극문파 장문인의 경지는 완숙한 화경의 경지라 알려져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단 네 명 밖에 없는, 중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1%에 속하는 경지였다.
그런 1%가 눈앞에서 변명이 아니라 설명 그리고 그 설명에 의한 납득을 바라고 있다.
“국가는 무인들을 직접 관리 하고 있고, 태극문파를 비롯해서 한국에 있는 방파들 역시 정부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졌다 하더라도 현대무기와 군대 앞에서는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지만, 고수의 존재는 국가의 국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상당한 혜택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방파도 있는 반면 태극문파처럼 그 뿌리가 깊은 곳도 있습니다.”
창현은 조용히 대길의 말을 들었다. 그가 자신이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초적인 것부터 설명을 하려 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제법 쓸만한 놈이군.’
옅은 미소가 번졌다. 침을 꿀꺽 삼키곤 대길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컵을 들었다. 살짝 목을 축이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무공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근골이 뛰어난 아이에게 전수를 해야 고수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국가와 방파들은 그런 아이들을 늘 주시하고 있고, 대부분 방파나 국가에게 소속되어 고수로 길러집니다. 그 것이 곧 국력이니까요. 저 역시 늦은 나이였지만 혈맥이 막혀 있다하더라도 근골이 뛰어났기에 외공정도를 충분히 가르칠만하다고 태극문파에서 판단했고, 그렇게 태극문파로 들어갔습니다.”
어느새 대길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태극문파조차 그 안에서의 차별은 막대했습니다. 저는 그 것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파문을 당했죠.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전 국가에서 무인으로 분류해 놓은 사람이었고, 일반인들에게 무공을 결코 써서는 안 되는 상태였습니다. 사실 갓 삼류 초입에 들은 터라 써도 상관은 없었죠.”
지현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말들이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창현의 능력을 몸소 겪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비밀 단체의 강자라도 된 것 같아!’
배시시 미소를 짓는 지현을 보면서 창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대길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파문을 당하고 떠돌던 도중 동생을 만났습니다. 시비가 붙어서 싸우게 되었는데 동생이 제법 잘 친다하더라도 그래도 저는 무인이었기에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문파에 있을 때야 적어도 먹고 살 걱정은 없지만 내려오니 그 것이 가장 문제더군요. 국가는 삼류초입의 무인을 무인 취급도 해주지 않았고, 당연히 혜택도 없었습니다. 태극문파의 문하들 중 사숙이라는 인간들은 여전히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그들의 눈도 피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도중 반짝이는 것을 하나 삼켰는데 그 때 막혔던 혈맥이 뚫리면서 일류로 무공이 급상승 할 수 있었습니다.”
창현은 일류로 급상승했다는 그 사실보다 이제부터 시작 될 말이 짐작이 되어 진정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호?”
“일류라 하더라도 국가와 태극문파에게 걸리면 끝이라는 생각에 이 곳 조직에 몸을 담고 어느 정도의 실력만을 발휘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지역이 재개발 사업이 한창이고 노른자위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조직들도 군침을 삼키고 있는 상황이었죠. 제가 나서는 것보다 동생이 나서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나서면 그 때는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저는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창현은 가볍게 되물었다.
“그래서 참았다?”
“그렇습니다.”
대길은 이를 갈고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이 쪽 세계에서 발을 넓히고 은밀히 알아 본 결과 아직도 그 개 같은 사숙들은 원한을 잊지 않았습니다. 원한이라 할 수도 없죠. 그저 10살이나 많은 사질을 괴롭히는 쾌감이 울부짖음에 사라진 것은 물론 면벽이라는 벌 같지도 않은 벌을 받았으니까요. 그 것을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더군요. 은밀히 저를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저는 더더욱 꽁꽁 숨어서 지냈습니다. 일반인들 중 무력은 없지만 권력이 있는 이들과 가까이 한 이유도 그 것입니다. 동생이 고생하면서 이뤄놓은 것들이 그들로 인해 단 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다 대길의 인생을 짧게 정리해서 들었지만 창현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짙은 눈썹 덕분에 굳건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대길에게 조금 더 크게 호감이 갔다.
“그 문파는 외공을 주로 가르치나?”
“중원에 있는 무당파의 아류이기에 대부분 무당파 무공을 가르칩니다. 한국 지부라고 보시는 것이 정확합니다.”
창현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중원은 고향이다. 하지만 괜스레 굴욕적인 느낌이었다. 대길의 말에 의하면 태극문파는 무당파의 지부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지부가 한국에서 대문파로 손꼽힌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무당파 무공을 배우지 못했나?”
“제가 배운 것은 철갑외면피라는 볼품없는 삼류 외공이었습니다.”
“늦게 들어가서? 재질이 모자라서? 무공을 보는 눈은 없었나?”
거의 바로 짐작하는 창현의 말에 대길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아 출신이기에 저는 다른 부잣집 자제들처럼 막대한 돈을 문파에 쏟아 붓지 못했고, 그들은 정부와의 연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고아인 저를 받아들였을 뿐 애초에 가르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종놈 하나 들였다고 생각했었죠.”
여전하다는 생각에 창현은 조소를 물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대문파라는 것들이 하는 짓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불쾌감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었다.
‘호, 요놈 봐라? 애국심이라 이건 가?’
그리고 더불어 창현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 지식까지 하나 하나 스치고 있었다. 처음으로 창현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생각 할 수 있었다.
‘장백산 밑에 있는 동이족 나라라…우습군.’
그리고 잊고 있었던 아주 오래전 기억도 하나 떠올랐다.
‘아버지는 백두산을 지키고 계신단다. 그 곳에….’
어머니라는 여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신혼 여행을 떠나서 돌아가신 분 한 명이었다. 영혼은 아직 두 개라 할 수 있지만 이미 그 영혼과 동화 되고 있었고, 그 영혼을 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종의 타협이었다.
‘놈과 한 번 대화를 해야겠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창현을 보면서 대길은 침묵을 지켰다.
“무당파의 지부라…중원에는 어떤 방파가 남아 있지?”
“구파일방이 여전히 남아 있고 수많은 방파가 있습니다. 저기 혹시…사술…이 아니라 술법을 쓰신다고 들었는데 본래 창….”
창현은 도중에 대길의 말을 끊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난 강창현이다.”
단호함이 깃든…그리고 지현과 대길의 몸이 저절로 떨리게 만드는 위엄있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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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름 친절하게 말 해주는 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