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5 회: 일반인 속에 혈마. -- >
“본파에서 나온 사람은?”
“쉬고 있습니다.”
“여자를 끼고?”
차가운 노인의 모습에 청년이 쓰게 웃었다. 서릿발 같은 기세가 노인의 몸에서 줄기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움찔 몸이 떨렸지만, 청년은 여전히 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았지.’
한국 무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에 청년은 누군가를 원망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괜스레 서글퍼졌다.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노인…아니, 장문인을 보면서 쓴 미소가 조소로 바뀌는 것을 간신히 억눌려야 했다.
‘지금 와서 분노해 보았자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말은 조소와 함께 꾹 눌렀다.
“…네.”
청년의 간결한 대답에 노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이들 중…누가 있지?”
“혜화가 있습니다.”
츠츠츠!
매끄러운 빛깔과 고풍스러운 무늬를 자랑하던 갈색 탁자는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서늘한 기운은 작은 방 안을 가득 뒤덮고 곧 폭발할 것처럼 광포하게 몰아쳤다. 나무로 되어 있는 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고, 노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대한 기운은 장문인실 밖에 있는 올곧은 나무들까지 흔들고 있었다.
“장문인.”
“…누가 보냈더냐?”
청년의 대답은 마찬가지로 짧았다.
“둘 째 사숙께서 보내셨습니다.”
“…사제가…점점 미쳐 가는 군.”
태극문파!
그 이름만으로도 한국 무인들에게는 꿈에 대상이다. 많은 방파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그 위명이 대단했다.
“도사라는 것들이 향락에 빠져서 앞뒤를 가리지 않는군! 자부심조차 팔아먹었단 말인가?”
흰 수염이 다시금 펄럭이고 있었지만, 청년은 관심이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사질은 이만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질.”
억눌렀던 조소를 청년은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장문인. 우린 여전히 그들의 지부에 불과하고, 여전히 그들의 종에 불과하죠.”
“….”
“절정에 이른 고수가 있다 한들 그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본래 우리의 것은 다 버리고 그저 지부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고작인데요.”
“사질!”
청년의 몸에서도 노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던 기세 못지않은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기운이 강포했다면 청년의 기운은 부드럽게 방 안을 감싸고 있었지만, 결코 자리를 내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인의 수염이 잘게 떨렸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우린 결코 변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끝이나지 않겠죠. 개처럼 살아가는 것은.”
“….”
청년은 장문인실을 나서며 차가운 말을 뿌렸다.
“주인을 향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배를 까뒤집는 개새끼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이…그렇게 영원히 살겠죠. 언제나처럼.”
“….”
노인은 청년에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기운조차 부드럽게 밀어 내었던 그의 기운을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청년의 모습이 사라지자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너로 인해 달라질 수 있겠구나!”
노인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전현 생각지도 않고 있는 청년은 산문을 내려가고 있었다. 길게 뻗은 길 양옆으로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는 태극문파이지만 여기까지 일반인들도 종종 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생각보다 넓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태까지 그들이 이곳을 모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청년은 건물들 사이로 세워진 작은 석탑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설사 폭풍우가 몰아친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석탑들이었다.
결계를 작동 시키는 석탑들 덕분에 이곳은 무인들이 아닌 이상 침범하지 못했다. 설령, 무인이라 할지라도 태극문파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오기 힘들었다. 삼류정도는 가볍게 막아 낼 수 있는 결계였다.
“사형!”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에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
“장문인 뵙고 오는 길 아니에요?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 것도 아니다.”
청년은 밝게 웃고 있는 혜화의 모습에 한숨을 억눌렀다. 다행히…다른 여자들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본파에서 나온 분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느냐?”
“움! 아니요!”
댕기머리를 곱게 땋고 있는 혜화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척이나 어려 보였는데 청년을 사형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무인이 분명했다. 그러나 무인치고는 피부도 하얗고 무척이나 고왔다.
오히려 여느 대가댁 고명딸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어울렸다.
“가르침은 무슨! 자꾸 이상한 것만 물으셔서 지루했어요.”
“….”
청년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진무구한 사제가 알아챌까 재빨리 뒷짐을 지었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그녀가 곱게 땋아 늘어뜨려 놓은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게…화가 났다.
“다른 제자들은 굉장히 능숙했는데 저는 너무 초짜라면서…재미가 없으시다고!”
“…그렇구나….”
어려서부터 산문에서 자린 아이. 더럽고 추악한 사형제들과 사숙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녀만은 지키고 싶었던 청년이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이대 제자들 중에서도 일대제자들 보다 먼저 일류에 입성했고, 요즘 들어 단전이 근질근질 한 것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근데 오늘은 어쩐 일로 무뚝뚝한 사형이 나한테 이렇게 친절할까?”
청년은 마음이 아팠다. 강해져야 했기에 그 시간에는 순진하게 웃고 있는 눈앞에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
순지하고, 참하지만 올곧게 자랐다. 그리고 보이는 것처럼 심성이 여리지도 않고 굳건했다.
10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끊임없이 끌리는 이유였다.
“아니다. 본파에서 나오신 분이 고수라기에 나 역시 가르침을 한 줄 얻을까 해서!”
“우와! 사형이 농담도 다하고! 내일 막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건 아니죠?”
청년은 옅게 웃었다.
“그래 본파에서 나오신 분이 무엇을 물으시든?”
“음…무공을 하면서 어려웠던 부분이나….”
생각보다 건전했다.
“남자랑 동침을 한 적은 있냐는 등….”
소녀, 아니 혜화는 얼굴을 붉게 붉혔다. 아직도 무척이나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청년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피고 있었다.
“아직 남자 손도 잡아 본 적이 없다고 하니까 무척 기뻐하셨어요. 요즘 어린 도사들이 향락에 많이 빠져 있는 줄 알았는데 저 같은 제자는 처음이라고…맑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 만큼 곧 경지가 한 단계 더 높아질 것이라고 칭찬도 해 주시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하셨어요.”
“!!!”
청년은 몸을 크게 떨었다.
‘이 미친 짱개 새끼가!’
벌써 문파의 여자 제자들 중 두 명이나 녀석의 더러운 욕망에 희생이 되었다. 그의 딸보다 더 어린 제자들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청년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혜화라는 여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었다.
“사형, 왜, 왜그래요?”
“아니다!”
청년은 간신히 뿜어져 나오려는 기운을 수습했다. 그의 경지는…절정! 화경이라 일컬어지는 절대고수의 경지였다. 자신과 같은 이제 일류의 끝을 바라보는 사람이 열 명이 덤벼도 이길 수 없는 강자의 경지!
백회혈이 뚫리고 지금 껏 평범했던 인간사와 모든 만물까지 달리보인다는 그 꿈의 경지!
간질간질한 단전의 느낌은 여전했다. 청년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 가지 중대한 결심을 해야했다.
태극문파의 최고 고수는 자신이었다. 장문인 역시 자신과 비슷한 경지였고, 장로들이라는 사람들 역시 일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만큼 절정의 경지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원시천존은 어째서 그런 놈에게 그런 경지를 허락하셨단 말인가!’
끊임없이 신에 대한 원망이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신에 대한 원망은 뒷전이었고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혜화를 지키는 것이 청년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그녀는 사제이기도 했지만…장문인의 숨겨진 딸이기도 했다.
‘다를 것이 없지.’
빌어먹을 현실에 대한 더러움이 역겨움으로 다가오면서 속이 쓰리며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토해버리고 싶었지만 청년은 다시 신물을 삼켰다.
“혜화야 사형 심부름 하나 해줘야겠다.”
“네?”
일단 문파 밖으로 내보내야했다.
청년은 차기 장문인!
그리고 혜화는 장문인의 숨겨진 딸. 그럴듯한 명분으로 재빨리 내보내기만 한다면 아무리 본파에서 나온 고수라 할지라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 할 것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정부에서조차 절정고수의 방문으로 민감하게 태극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국의 관계가 여러모로 껄끄러운 지금 그 고수의 태도는 겉만 번지르르한 정치인들에게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스스로도 그 것을 알면서도 향락에 취해 있지만…그 정도야 늘 있던 일이었다.
“마침 계셨군요!”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대 제자의 모습에 혜화는 물론 청년까지 잠시 시선을 돌려 그를 궁금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청년의 짙은 눈썹은 그 와중에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무슨 일이냐?”
사대 제자는 일단 허리를 깊게 숙인 후 말을 재빨리 이었다.
“한국 무인협회에 있는 본파의 제자 중 한 명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무인협회?”
사대 제자는 정보를 취급하는 부서에 있었다.
“비주께서 직접 보고하려 하셨지만 급하게 산문을 나가셨습니다.”
얼마나 시급을 다투는 일이기에? 청년은 눈빛으로 제자의 대답을 채근했다.
“…초절정에 근접한 고수가 나타났습니다. 정부 기관 소속도 아니고, 다른 문파의 제자도 아닌 것으로 파악 되었습니다. 이수연이 직접 섭외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고…”
“!!!”
“!!!”
ㅤㅊㅕㅇ년과 혜화가 동시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영력의 경지조차 3단계 초입이라고 합니다. 그 것도….”
사대 제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최소랍니다.”
청년이 혜화에게 재빨리 말했다.
“당장 준비해라. 경험도 시킬 겸 너만 보내려했건만 일의 사안이 생각보다 크니 나 역시 함께 가야겠다.”
청년, 아니 종욱은 한국에 단 한 명 밖에 없는 현경의 경지에 근접한 고수의 존재가 거짓말처럼 지금 나타나 주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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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더위
요새는 회사에서도 에어컨 잘 안틀어준다면서요?
정말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