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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 현대 재림기-125화 (125/170)

< -- 125 회: 세력 -- >

한반도를 그대로 갈라서 날아가는 것도 관계가 없었지만, 창현은 오랜만에 짙푸른 바다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용신에게 동해 쪽을 통해서 일본으로 날아갈 것을 명령했고, 그래서 지난번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편이었다. 주인의 마음을 느끼는지 용신의 비행은 무척 느렸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비행기들이 놀라지 않기 하기 위해 오히려 저속 비행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망망대해이기에 지상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다.

“좋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창현은 짙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색의 물결과 멀리서 보이는 수평선의 위대함은 인간사조차 초월했던 자신마저도 한 없이 작게 만드는 것 같았다.

기분이 오묘했다.

혈마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창현은 잔인한 폭군이었다. 말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숲을 벗 삼아 삶을 무료하게 보냈지만, 그 전에는 정파의 수많은 무인들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가 휩쓸고 간 자리는 풀 한포기 남아 있지 않았고, 그가 방문한 문파는 멸문보다 더한 치욕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민이 있으십니까.”

윤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창현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그저…… 옛 생각이 났을 뿐.”

언제나처럼 검은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찬란한 햇살 아래에서 빛나고 있다 하더라도 무심한 그 눈빛에 차가움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심한 속에서 폭발하는 염기와 색기는 남자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자유로운 것은 경지의 지고지순함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본질 그 자체를 꿰뚫어 보는 눈빛!

윤미가 창현을 처음 만나고 그에게 몸을 그냥 허락한 것은 그런 면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는 요괴였고, 그 전에는 인간이었다. 인간이었을 시절 스스로 남자가 없이 살 수 없는 몸이라 말을 했지만, 사실은 남자들이 윤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했다.

“……주인님.”

살짝 붉어지고 있는 윤미의 얼굴에서 창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최근 들어 둘만 나서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이동 과정에서는 언제나 그녀를 안았기 때문이다.

짓궂게 미소가 번지자 윤미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난 각주에게 들었습니다. 이 번 삶은 오욕칠정에 충실한 삶을 사시겠다고요…그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창현은 윤미를 찰랑이는 단발을 가볍게 쓸어 내렸다.

그녀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건 갑자기 왜 묻지?”

“……저 역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남은 것은…… 강함에 대한 욕구와 요괴로써의 승천의 욕구일 뿐, 많은 감정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목을 꿰뚫을 때에도 더 이상 예전처럼…… 죄책감이라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론 그 것이……두렵다는 생소한 감정이 듭니다. 사실 두렵다는 것은 생소한 감정이 아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창현이나 윤미나 오랜 세월을 살아 온 것은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살아 온 것은 창현보다 오히려 윤미가 훨씬 더 길었다. 창현은 지난 삶에 백여 년에 가까운 삶을 살았지만 중간에 한참이나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윤미는 오백여년이라는 시간을 잠들지 않은 채 한국에서 살아왔다.

어쩌면 인간사를 진정 초월하고 있는 것은 윤미일 수 있었다.

“일종의 부작용이지, 감정의 부재라는 것은 말이야. 그 옛날 절대자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야. 그 어느 순간에도 냉철해야 하고,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니까. 인간사를 초월하는 것은 어쩌면…인간을 포기한 것이라는 생각을 말년에 했었지. 실제로 난 거의 혼자 지냈고.”

창현의 말에 윤미는 어떤 것인지 미루어 짐작하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가 흐르고 있는 비행기보다 훨씬 안락한 용신의 은비늘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창현이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수평선 끝에 닿아 있었다.

“그래서 다시금 삶을 산다면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윤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저와 함께…… 계시는 것은 행복 하지……않으십니까.”

“넌 행복한가?”

어려운 물음에 곧바로 되묻는 창현의 목소리에 윤미는 몸을 움찔 떨었다.

“네가 알고 있는 남자들과 달라서 네가 날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나?”

윤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그 어떤 남자도 당신처럼 날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언제나 욕망과 욕정 그리고 지배욕만이 가득……!”

평소와는 다르게 급격하게 흥분하는 윤미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창현을 만나고 그의 수하가 되면서 그녀는 완전히 변했다. 창현에게 정착하고 싶었고, 일종의 치유를 받고 싶었다.

그녀는 여자다.

아무리 차가운 표정과 무심한 눈빛, 딱딱한 말투와 각이 있는 정장만 고집한다하더라도 그녀는 본질적으로 여자였다.

그 것도 일찍 남편을 여의고 거친 삶을 살아가던 아주 외로웠던 여자였다.

수하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당신, 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흥분을 하고 있는 윤미를 창현이 가볍게 끌어안았다.

“난 행복이 뭔지 모른다.”

그의 품에서 윤미가 몸을 떨었다.

“사랑을 해주는 방법도 알지 못하고 받는 방법도 알지 못하지. 하지만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옆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것이 내가 오욕칠정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이니까.”

“…….”

창현이 윤미를 다시 살짝 떼어 놓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윤미에게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번뇌하지마라. 네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나를 선택했다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 당시 분명 나는 너보다 약했고, 너의 선택에 따라 죽음을 맞이 할 수 있었겠지. 그 때는 경지를 회복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시기이니까. 하지만 말이다 윤미.”

창현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윤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창현은 그녀의 턱을 살며시 받치고 가볍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색 바다만큼이나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 날, 네가 날 죽였다 하더라도 난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에도 난 내가 선택하는 삶을 살았으니까. 그리고…… 네가 그 날 날 죽이지 않고, 나에게 안겨 준 것을 정말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 것이 어쩌면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지.”

“…… 주인님.”

윤미가 창현을 서둘러 끌어안았다.

창현에게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면서 윤미는 눈에 살짝 이슬을 맺었다. 어쩌면 그 동안 육체적 관계만을 추구했던 자신과 창현이 이제는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은연중에 창현 역시 다른 남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던 윤미의 그 작은 번뇌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 무례를 범했습니다.”

윤미가 황급히 창현에게서 멀어졌다.

창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몰래 작은 이슬을 눈가에서 훔치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끌어 당겼다. 어깨에 작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번뇌가 덜어졌기 때문일까?

수평선을 바라보는 윤미의 얼굴에는 무심했던 눈빛도, 차가운 표정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눈부신 빛처럼 환한 미소가 번졌다.

“…… 영원히 당신 곁에 있고 싶습니다.”

작은 고백.

여자로써의 진정한 고백을 해오고 있는 윤미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널 영원히 곁에 두고 싶다. 오욕칠정을 추구하는 그 목표 때문이 아니라 네가 곁에 있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윤미는 대답 대신 따뜻하게 느껴지는 창현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주 오래 전, 그녀가 아직 사람이었을 당시 많은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웠던 수줍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동해를 가르는 용신은 다 듣고 있다는 것처럼 살짝 몸을 떨었다. 크릉, 하는 그 울음소리에 불만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이내 용신은 자신의 등 위에서 살기를 느껴야만했다.

분명 윤미는 자신보다 약한 것이 틀림이 없지만 어쩐지 그 살기는 분위기를 깼다는 그녀의 분노 때문에 용신마저 위축되게 하는 것 같았다.

용신은 그 이후 일본에 도착 할 때까지 조용히 하늘을 날았다.

쓰나미 경보와 태풍 경보가 내려진 지역에 창현이 도착하자 이제는 한혈문 제 1 지부인이 되어버린 일본인들은 열렬히 환영을 하고 있었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인원들이었다.

아보 총리는 그 지역 주민들을 모두 대피 시키고 있었지만, 순차적으로 대피 시키고 있었기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역대급 자연 재해가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전 세계 기상청들도 상당히 일본 해안을 주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보 총리는 문주님이 다시 한 번 해결 방안을 가져 왔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기에 이미 지옥에서 한 번 건져 준 창현을 일본인들이 다시 열렬히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셨습니까.”

창현은 고개만 까딱이며 아보 총리의 인사를 받았다.

역시 그의 처세술은 대단했다.

경보 지역에 직접 방문하여 창현을 맞는다는 것은 아보 총리에게는 일종의 이미지 전략이 될 수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없었다.

완벽하게 세뇌를 당했기에 당연한 행동이라는 인식이었다.

“오소리도 왔군.”

“그렇습니다, 주인이시여.”

창현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오소리가 자신의 방문이라고 해서 특별한 명령도 없었는데 이곳까지 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제가 대충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먼저 짚어내는 것은 동해 바다 위에선 수줍게 웃던 윤미가 아니라 평소처럼 냉기와 염기를 동시에 풍기고 있는 윤미였다.

“멍청한 요괴들이 피와 영력에 취해 일탈을 벌이기 시작한 모양인 것 같습니다.”

“…….”

오소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창현은 그런 오소리를 보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내 창현은 드물게 몸을 살짝 떨었다.

냉기와 염기는 풀풀 날리고, 오소리의 잘못을 곧바로 차갑게 지적했던 윤미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잡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자신의 시선에 곧바로 손을 떼는 윤미의 행동에 창현은 피식 웃으며 아보 총리가 마련 해 놓은 마을 회관으로 가면서 다시 윤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경공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뒤 따라 오고 있는 아보 총리나 일반인들은 볼 수 없었다. 오소리도 뒤에 있었기에 볼 수 없었다.

창현과 관계까지 수십 번은 넘게 가졌던 윤미가 손을 잡고 달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웃고 있는 장면을 말이다.

곧 아보 총리가 말을 한 회관이 보였다.

윤미는 무척이나 아쉬운지 자신의 손을 살짝 쓰다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무한도전에 나왔던 정총무가 간다 전집은

공덕역 5번 출구에서 100M 정도 직진하면 바로 보입니다.

내일이 휴일 탓인지, 방송에 나왔던 맛집인 탓인지

사람 진짜 많더군요.

그래도 금방 앉아서 맛있게 먹고 왔습니다.

아직도 배불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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