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27 회: 세력 -- >
창현은 시선을 바다 멀리 던지고 있었다. 한혈문 1지부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군함이라 할 수 있는 곳 갑판 위였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지만, 창현과 윤미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그 둘이 누구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었고, 무표정한 창현의 얼굴에 어느 정도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1지부의 복구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와 있었던 상당수의 외국인 기자들 역시 함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창현은 설난에게 태풍 경로가 바뀌는 시간과 그 지점을 정확하게 들었고, 아보 총리가 섭외한 전문가와 함께 그 시간에 맞춰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지근거리까지 접근을 한다면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떨어져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할 예정이었다.
물론 그 것은 마치 태풍의 경로를 창현이 바꾸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것이다.
“……떠난 그에 대한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글쎄.”
창현은 오소리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맞기는 했지만, 윤미의 말에 그렇다 대답은 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과연 걱정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맞지.”
“오소리는…… 좋은 동료였습니다.”
창현 이외에 누군가의 대한 말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윤미였지만, 오소리는 같은 요괴이기도 했고 또 남성체이기는 했지만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다지 큰 거부감은 없었던 것 같았다. 은색의 갈기를 떠올리는 것은 창현만이 아니라는 듯 윤미가 바다 바람을 맞으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부터 요괴들 역시 근본적인 목표라 할 수 있는 승천에 대한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욱더 강한 것을 추구 했고, 우리끼리의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인간들처럼…… 하지만 오소리는 그런 요괴가 아니었습니다.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요괴가 승천을 꿈꾼다는 것은 무척이나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저 역시 강함만을 추구하고 있었을 뿐, 승천에 대한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창현은 오소리에 대한 생각은 접고 몸을 반 쯤 돌려 윤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윤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은?”
창현은 다시 되물었다.
“……지금은 그저 주인님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부끄럽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며 창현에게서 시선을 바다로 돌리는 윤미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어디에서도 차가운 표정으로 염기를 휘날리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창현은 그런 윤미를 잡아 이끌었다.
“……아!”
두근, 뛰는 심장을 느끼며 창현은 그동안 느껴왔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윤미와 많은 관계를 가지면서 동해 위에서나, 방금 전과 같은 고백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고백은 수차례 들어왔었다. 하지만 그 것과는 다른 뿌듯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밀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 생각했던 삶에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식욕, 재욕, 색욕, 수면욕, 명예욕, 기쁘고, 화가 나고, 슬프고, 즐겁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망하는 것들을 충실히 느끼면서 살아간다 해 왔지만 경지를 조금씩 되찾을수록 그 전의 삶과 크게 달리진 것이 없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윤미의 고백을 들은 이후에는 분명 무엇인가 달라지고 있었다.
딱히 이 것이다 하고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그랬다.
“나 역시……너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하고 싶다.”
창현은 말과 함께 윤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작은 스킨십이었지만 부드러운 입술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몸을 움찔 떨던 윤미가 이내 창현의 허리를 꼭 붙들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둘을 갈라놓고 싶었는지 이제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윤미를 살짝 떼어 놓은 창현이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의 다 온 것 같군.”
파도는 심하게 높아지고 있었고, 바람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창현의 예측이 맞았던 모양인지 전문가가 달려와 설난이 말을 했던 지점에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곧 갑판 위로 몇 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군함이었고, 당연히 갑판도 꽤 컸기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장비를 체크하고 있었다.
각 언론사 소속 기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창현에게 한 마디 인터뷰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다, 창현의 표정이 그런 것을 허락 할 표정도 아니었기에 그들은 그저 창현의 행동을 주목만 하고 있었다.
-윤미.
이왕 하는 것 창현은 좀 더 멋지게 할 방법을 연구했다.
-네, 주인님.
-그냥 하늘에 올라가서 강기탄을 던지는 것보다 좀 더 멋진 방법이 없을까?
윤미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용신을 타고 하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둘의 말은 전음으로 이뤄지고 있었기에 당연히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사람들이 올라 온 순간부터 다시 평소와 같이 차가운 윤미로 돌아갔지만 전음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리고 눈썹을 살짝 올리는 것으로 보아 창현의 말이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겉멋을 따질 나이는 지났지만 이왕 창현은 영웅 놀이를 제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용신.”
창현이 나지막하게 용신을 부르자 곧 어두운 먹구름을 가르며 용신이 천천히 갑판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용신을 늘 TV나 인터넷 매체에서만 접하던 외국 기자들은 마치 정말로 용이 하늘로 내려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조금씩 넋이 나가고 있었다.
겉모습은 동양 속 신화에서 전해지는 용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 해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도 했다.
창현은 그런 외국 기자들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용신을 보면서 헛웃음을 삼켰다. 겉멋이 잔뜩 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용신인 것 같았다. 지금은 보는 눈이 있기에 가만히 있지만 돌아가는 길에 몇 대 쥐어(?) 패야겠다고 결심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올라간다.”
창현의 말을 들은 용신이 그 긴 몸뚱이를 갑판 위에 살짝 뜨게 만들었다. 외국 기자들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윤미의 전음이 들려왔다.
-녀석의 머리 위에 서시는 것도 제법 자태가 날 것 같습니다.
-호!
창현은 조금 얄미운 짓을 하고 있는 용신의 자존심도 약간 밟아 줄 겸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용신의 머리 위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용신은 처음에는 가만히 있었지만, 이내 창현의 의도를 알아채고 낮게 크릉, 소리를 내고 있었다.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퍼지자 윤미를 제외한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창현이 이번에는 용신에게 전음을 보냈다.
-까불면 피콜로 똥구멍에 박아버린다.
무시무시한 협박에 용신은 더 이상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배 위에서 10미터 정도 위로 떠올랐다.
가로로 몸을 늘어 뜨려 놓았고, 그 머리 위에 창현이 올라 서 있자 확실히 윤미의 말대로 마치 용의 주인인 것 같이 창현의 자태가 제법 폼이 나고 있었다.
창현은 태풍이 진로를 바꿀 순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어차피 영웅 놀이를 할 예정이었지만 시험은 해보고 싶었다.
‘이 정도 경지에서…… 자연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전력은 아니지만 창현은 혈마지기를 끌어 올렸다. 붉은 빛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치기 시작하면서 먹구름을 갈라 버렸다.
“와우!”
“오!”
“헛!”
동시에 여러 가지 감탄 소리가 터지고 있었다.
촬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창현은 다시 한 번 자태를 뽑낼 수 있는 것을 번뜩 생각해 냈다.
“도괴.”
도괴는 언제 어디서나 땅 속에 숨어 있다. 설사 그 것이 바다의 땅 속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도괴는 그 파도를 갈라 버리며 마치 길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조금씩 물보라를 일으키며 자신의 몸을 조금씩 드러냈다.
“와!!!”
다시 한 번 감탄사가 터졌고, 창현은 곧 도괴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는 용신의 머리를 살짝 긁으면서 그대로 앞으로 뻗었다.
곧 도괴의 날 앞부분으로 솟구쳐 올라가고 있는 혈마지기가 순식간에 흡수가 되면서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일직선으로 쭉 날아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주인님은…….”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윤미 뿐이었다. 만약 바다가 아니라 앞에 산이 있었다면 그 산은 통째로 무너졌을 것이 분명했다. 진정 천외천 고수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도괴가 나 올 때보다 훨씬 더 강한 파도를 일으키고 마치 모세의 기적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 물은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하늘 위 먹구름조차 그 붉은 혈마지기를 감싸기 시작하고 있었다.
앞으로 뻗어나가면서 먹구름을 마치 꽈배기처럼 꼬는 현상이었다.
영화가 아니라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수 십 킬로는 날아간 혈마지기는 곧 태풍과 정면충돌을 일으켰다. 물론 그 것을 창현 역시 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운은 확실히 느꼈다.
‘역시 자연 재해 앞에서는 소용이 없군.’
흔적도 없이 소멸 되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혈마지기가 태풍에게 미친 영향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인님.
-시작한다. 예정대로 하는 것이 좋겠군.
윤미가 창현의 명령에 시선을 통역관에게 돌렸다.
“이들에게 이제 태풍의 경로를 바꾼다고 알려라.”
곧 통역관이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자초지종을 외국 기자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창현은 어느 정도 숨을 골랐다. 외국 기자들 역시 숨을 깊게 들여 마시고 창현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강한 혈마지기가 붉은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혈마지기의 효과로 하늘을 가르고 있는 원기둥은…… 전 세계 어디서라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붉은 빛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아주 웃기는 짓을 하는군요. 동포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저 쓰레기 같은 자식에게 속아 넘어가겠어요.”
실비아는 그런 나미코의 말에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초조해 하지 말아요, 나미코…… 이미 경지도 많이 회복 되고 있는 중이고 저 바보가 시선을 끌어 주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부산에서 무사히 강원도로 넘어 올 수 있었잖아요.”
“미개한 조선인들의 공권력 따위는 이미 부패하고 썩은 지 오래에요 언니. 그들의 무능력으로 우리를 잡을 순 없죠. 중국의 속가에 불과한 무인들 역시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이 무인들도 감안 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저 바보 같은 자식이 아니었다면 진즉 이 반도는 술법문의 손에 넘어 왔을 거예요.”
자신의 피가 반이나 흐르고 있는 땅, 그리고…… 끝내 자신이 왜 가문에서 외톨이였는지 알지 못하는 진정한 바보의 모습에 실비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TV 화면에 빠져 있는 나미코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런데…… 저 바보의 목숨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나미코가 실험 재료를 잘 대주고 있는 덕분에 많은 성과가가 있었어요.”
“저, 정말요 언니?”
나미코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실비아의 얼굴에는 어느새 비릿한 미소는 지워지고 천진난만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제 아이의 피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요. 성인 여자의 피가 좀 많이 필요하네요. 물론 처녀면 더 좋고요.”
실비아의 말에 나미코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니의 실험이 성공하면 복수가 훨씬 더 가까워지는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요! 쓰레기 같은 조선인들은 전부 죽어도 상관없으니 제가 구해다 드리겠어요. 언니는 실험에 집중을 해 주세요.”
“고마워요. 이제 다음부터 아이들은 제물로만 사용하도록 하세요.”
“몇 명쯤 필요하나요?”
“일단 대략 다섯 명 정도요.”
나미코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몸 조심해요, 나미코.”
“걱정 마요 언니. 아직 언니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전 이제 일류 술법사니까요. 많은 제물 덕분에…… 제법 괜찮은 놈을 하나 길들일 수 있었거든요.”
실비아는 환하게 웃었다.
“꼭 S+급 이상의 괴물을 만들어서 실비아의 술법공과 접목 시켰으면 좋겠네요.”
그 날 이후 한국인들의 실종과 잔혹한 죽음이 고아에서 이제는 처녀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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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