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2 회: 세력 -- >
언제나처럼 순풍이 불어왔다.
여기저기 패이고, 절경을 이루던 절벽들이 부서져 내린 파편의 바위가 흩어져 있었지만, 그것조차 푸르면서도 투명한 바닷물과 조화를 이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창현이 오연하게 서 있었다.
“으음…… 확실히 넌 굉장해! 나 이외에 이 정도까지 강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조차 못했거든.”
“끝을 이룬 무인은 언제나 한 세대에 한 명만 있는 법이지. 아직 넌 끝을 이뤄보지 못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차이는 크지.”
“응?”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 했다.
9서클.
아홉 번째 고리가 투명하게 생성되고 있었지만 실비아는 왠지 모를 위화감에 그 고리가 생기는 것을 억지로 막아냈다.
동양과 같이 신선이 된다거나 하는 결론은 없었지만 서양의 검사들과 마법사들도 알고는 있었다.
끝에 이르면 결국은 인간이 아닌 더 상위 개체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실비아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인 상태가 좋았다. 인간이기에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인간이기에 수많은 감정을 느낀다. 참 우습게도 마법사는 냉철해야 하지만 실비아는 감정의 변화가 무척 심한 편에 속했다.
어쩌면 마법사들 전부가 냉철해야 하기에 괴팍한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일 수 있었다.
마나의 흐름을 비틀고, 수식을 정립해서 사용하는 마법이 그리 간단할리 없었고, 당연히 일반인 범주의 머리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마법사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더욱더 마법에 관해선 냉철해야 했고, 그 결과로 다른 면에서 괴팍한 면을 보이게 된 것이다.
실비아는 그 것이 무척이나 안 좋은 쪽으로 번진 것에 속했다.
“넌 끝을 이뤄 본 거야?”
실비아는 실로 처음으로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
천재였기에 외로웠고, 너무나 강했기에 모든 것이 우스웠다.
지독한 고독은 혼자만의 세상에 갇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것을 창현은 이미 한 번 겪어 보았다. 실비아가 큰 죄를 저질렀고, 용서할 수 없지만 적어도 창현만큼은 그녀를 이해하고 있었다.
혈마 시절 등선을 거부하면서 그 여파로 정파와의 전쟁에서 대량 학살을 벌였던 것이 창현이었다.
학살을 벌였지만, 그 때에는 그것조차 그저 무료한 일상을 견디는 소일거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실비아 역시 인간으로 남고 싶기에 발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창현은 알고 있었다.
“육신의 껍질을 벗고 혼의 상태로 진정한 선천지기의 덩어리로 변하는 것이지. 물론 그 때에도 껍데기는 있지만 인간의 육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사에서 벗어나고 세계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다. 오욕칠정은 물론 그 어떠한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저 유려한 선천지기의 위대함을 느끼면서 인간사를 내려 보는 것. 그 것이 모든 무인들과 너희와 같은 마법사가 꿈꾸는 것이라 할 수 있지.”
“……굉장하네. 그런데 넌 왜 인간사에 남아 있어?”
“이 쪽이 훨씬 재미있거든. 인간의 수명은 짧지만 그 어떠한 생명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 이 시대로 온 이후 난 그 것이 상위 개체로 나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재밌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그저 묘한 거부감이었지만 지금은 일상 그 자체가 소중하니까.”
다시 한 번 백사장에 순풍이 불었다.
“너의 고독함과 괴팍함, 그리고 어떠한 상처들…… 모르는 것은 아니다. 시련 없이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은 없고, 네가 그토록 강한 힘을 얻은 것은 그만큼의 시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짐작이 가. 하지만 말이다.”
섬광이 번쩍였다.
창현의 손에는 어느새 도괴가 쥐어져 있었다.
도괴는 심각한 분위기를 느끼고 여느 때처럼 웃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창현의 몸에서 흐르고 있는 기운을 느끼며 웅,웅, 하고 도명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본좌에게 대든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창현이 말과 함께 그대로 사라졌다.
모래가 살짝 움직이는 것으로 그가 빠르게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섬광이 번쩍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실비아의 몸에 그대로 도괴를 찌르고 있었다.
모든 무공의 가장 기초적인 것.
찌르기와 베기!
차앙-!
실비아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가슴 부근에 조그마하게 실드를 만들어 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 실드 마법은 몸 전체를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 마법조차 변형 시켜 창현이 노리는 그 작은 부분을 막아낸 것이다.
창현의 움직임은 끊이지 않았다.
혈마지기가 붉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도괴 끝에 매달린 기가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점점 뒤로 물러나고 있는 실비아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차앙-! 창-! 창-!
“블링크!”
이례적으로 실비아가 캐스팅을 외가며 마법을 부렸다.
“!!!”
이내 실비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걱-!
“……!”
블링크를 한 그 자리에 혈마지기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베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부분이 넓은 망토가 아니었다면 팔이 잘렸으리라.
“……아깝군.”
“……너!”
실비아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보라색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실비아와 창현은 치열한 공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흐르는 마나를 재배열하고 비틀어서 부리는 것이 마법.
자연의 기운을 중단전과 상단전을 통해 흐르게 하고 뿜어내는 것이 창현의 무공.
초고수인 둘에게 공간의 지배력은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간다.”
창현은 오랜만에 정말 큰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이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이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검선이 생각나는군. 멍청하고 약한 녀석이었지만 제법 끈기는 있었으니까.’
그의 인자한 미소를 생각하면서 창현은 피식 미소를 터뜨렸다.
실비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고, 그녀보다 훨씬 약했지만, 그 시절에는 유일하게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각설하고,
창현의 혈마지기가 수 천 갈래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모두 통제라도 할 것처럼 엄청난 혈마지기의 줄기들이 실비아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실드보다 좀 더 윗단계인 배리어를 치면서 창현에게 쇄도했다.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마법사 특유의 고정관념과는 달랐다.
이미 온 몸을 보조마법으로 인간 이상의 육체를 만들어 놓았고, 스피드 역시 창현을 뛰어 넘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염 돌개 바람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을 느끼고 창현은 살짝 몸을 비틀었다.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도괴를 곧바로 휘둘렀다.
두두두-! 두둑-!
비처럼 쏟아지는 혈마지기는 여전히 실비아의 배리어에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창현이 휘두른 것조차 가볍게 손등으로 막아낸 실비아가 이번에는 전혀 반대 기운인 얼음 덩어리를 창현의 하체를 향해 날렸다.
피슛-!
그대로 점프로 피해낸 창현이 이내 몸을 공중에서 빙그르 돌렸다.
도괴에서 뿜어져 나간 혈마지기는 사뭇 그 기세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거대했다.
마치 노도와 같이 실비아를 향해 쏟아져 나가고 있었다. 실비아는 블링크를 펼치려 했지만 방금 전을 생각했다.
블링크 이후에는 찰나의 순간동안 무방비가 된다.
방금 전, 어깨 부근의 옷이 아니라 어깨에 정확하게 닿았다면 그대로 잘려 나갔을 것이다.
실비아는 이를 악물고 배리어를 더욱 강하게 펼쳤다.
콰아아앙-!
실비아가 두 걸음, 세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 창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실비아의 뒤를 노렸다.
8서클 대마도사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실비아는 배리어를 그 자리에 놔둔 채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몸 부근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방어막의 개념을 깬 것이다.
“차앗!”
그녀의 입에서도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바람의 창이 생성 되기 시작했다. 하나가 생기고, 두 개가 생기고 이내 수 백개가 생기는 것은 눈 깜짝 할 사이였다.
바람의 창은 허공을 가르며 창현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창현은 공중이 마치 지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렵하게 피하고 있었다. 심지어 날아오는 바람의 창들을 밟고 실비아에게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창현이 창을 밟고 접근을 하자 실비아는 뒤로 물러서며 새로운 바람의 창들에 화염 돌개 바람의 기운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끝 없는 마나량!
실로 엄청나다 할 수 있었다.
몇 개의 마법을 동시에 계속 해서 펼치는 그녀의 적수는 창현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창현은 이내 눈을 감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멈춘 시간 사이로 순풍이 불어왔다. 혈마지기가 꿈틀 거렸고, 이내 창현은 하나의 빛이 되었다.
공간을 찢어버린 빛은 눈깜짝 할 사이에 실비아의 배를 꿰뚫었다.
“꺄아아아!”
털썩-!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피분수에 실비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살려둬야 하지만…… 계집 생각보다 무척 강하군.”
“……하아, 이런 약한 모습을 보여 버렸네? 미래의 노예에게.”
“…….”
창현의 얼굴에 작은 의문이 번졌다.
방금의 한 수는 그 어떤 인간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빛과 도괴와 혈마지기 그리고 자신이 하나가 된 수였다.
실비아가 공간을 가르는 마법을 펼쳤다고 했지만 창현의 한 수는 공간은 물론 시간조차 갈라 버린 한 수였다.
그러니 실비아는 전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약간 숨을 몰아 쉰 창현이 물었다.
“……어디에 묻히고 싶지? 강자의 예우는 해주지.”
창현의 말에 실비아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피를 보며 깔깔 웃었다.
“이런, 이런, 난 마법사야. 그 것도 다시는 나 올 수 없는 신의 권능조차 넘보는 마법사야.”
“…….”
창현은 실비아가 그 상처를 재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에 다시 도괴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실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육체는 죽을 거야. 이 정도…… 분명 치료할 수 있는 상처이지만 역시 마나를 잔뜩 머금은 검의 한 수를 맞아서 그런지 회복 마법이 전혀 안 먹히네? 그래서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지.”
실비아가 천천히 백사장에 얼굴을 묻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고 있었다.
“정말, 정말 강해! 이 육체가 죽을 것이라고는 정말 단 한 순간도 생각 해 보지 않았는데…….”
“……강시술의 일종인가?”
“아니, 그런 저급한 것과는 달라. 난 정말로 육체를 나눈 것이거든. 천외천 고수 중 가장 강한 사람이라 불린 너였으니까. 무력문 가주조차 죽였잖아? 아마 난 한동안 틀여 박혀 있어야 할 거야. 이 육체는 고리를 두 개나 희생해야 하는 마법이니까.”
모래 속에 묻힌 실비아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6서클이 되겠지. 다시 회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 바보들에게 영약이나 마나석을 뜯어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넌 꼭 내가 가져야겠어. 그럼…….”
마지막 순간에는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던 실비아는 그대로 숨을 거두고 있었다. 정확히 말을 한다면 두 번째 육체! 여벌의 목숨이 끊어진 것이다.
‘역천의 힘이다. 아마 두 번 사용하기는 힘들 거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인데…….’
곧 그녀가 론즈 가문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린 창현은 피식 웃어버렸다.
방금 전 처음으로 모든 힘을 사용했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주군!”
이내 백사장을 달려오는 윤미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용신을 타고 먼 바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윤미가 창현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기시리라 믿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윤미에게 당장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그 가문은 전쟁을 추구한다고 했던가? 기둥까지 뽑아서라도 실비아를 찾아내 주지.’
창현은 전쟁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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