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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 현대 재림기-170화 (170/170)

< -- 170 회: 종장(終章) -- >

남궁세가 식솔들이 비무 준비로 한창 바쁠 무렵, 창현은 자신의 숙소로 정해진 전각 지붕 위에서 편안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높고 푸르른 하늘을 보면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에 창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배교의 장로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영혼을 봉인해 이곳으로 온 이후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낸 창현은 오랜만에 휴식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옆에 윤미가 살그머니 다가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냥 뭐.”

짧게 대답한 창현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자, 윤미는 지붕 위에서 남궁세가 식솔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지켜보았다.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은 의외의 재미를 주는 법이니까.

“바쁘게들 움직입니다. 겨우 비무일 뿐인데.”

창현이 윤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이지. 넌 랭커이자 손에 꼽히는 고수이니까. 손을 섞지 않고 너의 무공을 견식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 소가주라는 아이는 제법 괜찮은 재목이었어.”

“그가 정말 제왕검법을 익힐 수 있습니까?”

윤미는 내심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인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녀 역시 제왕검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편에 속했다. 인간이 만든 것 치고는 지나치게 뛰어난 검법이라 생각하던 참이고, 그것을 익힐 수 있는 인간은 창현 정도 밖에 없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창현이 소가주를 재목이라고 하자 윤미 역시 꽤 놀랐었다. 단지 그 때는 남궁세가 식솔들이 너무 많아 모르는 척 했지만.

“제왕검법이 난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1초식만 익힌다면 나머지 두 초식은 그리 어렵지 않아. 그리고 그 아이는 확실히 1초식 정도는 익힐 재목이고 그 이후에는 차후 노력에 달려겠지.”

윤미는 창현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내 창현은 옅은 미소와 함께 목소리를 이어갔다.

“무릇 무공의 고하 역시 중요하지만, 익히는 사람이 중요한 법이지. 그 옛날 혈마 시절 중원을 종횡할 때 삼재검법을 극성까지 익힌 무사를 보았다. 웬만한 장문인급이었지.”

윤미가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재검법이라면 현대인들도 알고 있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무공이기 때문이다.

그런 무공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장문인급 수준이라는 사실을 윤미는 체감하지 못했다.

“그 어떤 무공이든 그 끝은 결국 비슷한 법이고, 삼재검법 역시 마찬가지이지. 단지 그 검법을 지금까지 극성으로 익힌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사파 취급을 받으며 손가락질을 받았지. 그래서 내가 교로 데려와서 잘 키웠지만.”

창현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은 별로 없었기에 윤미의 기분은 색다로웠다. 그가 몇 백년 전 이곳 중원을 지배하던 배교의 교주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때문이다.

“준비가 된 것 같군. 내려가지.”

“네.”

“너무 봐주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몰아붙이지도 마라. 그 아이는 분명 너와의 대결에서 제 몰래 익히고 있었던 제왕검법의 오의를 어느 정도 느끼게 될 테니까. 그 깨달음을 이끌어 주도록 해. 그렇다면 남궁세가는 그 아이가 가주로 있는 이상 한혈문에 절대적으로 충성을 할테니까. 그리고 너에게도.”

“제게는…….”

창현이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하며 말했다.

“아직 어려 너의 아름다운 외모에 끌리지만 결코 그것으로 너에게 충성을 하지 않을 것이다. 보기 드물게 강직하면서 정파 녀석들 특유의 고집도 있거든. 아마 네게 은혜를 입었다 생각하고, 평생 갚지 못할 것이라 여길 테지. 그리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한혈문과 너에게 평생을 충성할 거야.”

“…….”

윤미는 움찔 몸을 떨었다. 무엇인가 느끼고 있는 것이 있었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가지.”

“네.”

그저 창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면서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곧 연무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는 거둬들여야 했다. 자신을 지켜보는 너무나 많은 시선들이 있었기에, 평소의 그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장로로 보이는 늙은 남궁세가 인물의 말에 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소가주가 다가와서 창현을 자리로 안내했고, 창현은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이내 비무 진행자로 보이는 남자가 소가주와 윤미를 불렀다.

“와아아아아!”

남궁세가 무사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비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윤미는 얇은 연검을 꺼내 가볍게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남궁협은 자신의 재왕검을 꺼내 들었다.

이미 남궁세가의 가주 역시 창현처럼 남궁협의 재목을 높게 샀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자 남궁세가 가주는 무척이나 기뻤고, 남궁협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했다.

“여인에게 선수를 양보해야 하나, 차이가 많이 남은 본인 역시 알기에 염치 불구하고 먼저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윤미는 남궁협의 말에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들고 있는 폼새가 매서웠고, 은은하게 퍼지는 내공의 흔적들 역시 확실히 나이에 비해 뛰어났다.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남궁협의 모습에도 윤미는 여전히 여유롭게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남궁협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윤미의 경지를 생각하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대로 검을 뿌렸다.

“타앗!”

그의 입에서 강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 주눅 드는 그 마음을 날려버리기 위해서였다.

챙-!

챙-!

챙-!

챙-!

너무나 빠른 움직임에 두 사람의 모습은 잘 보이지도 않고, 오로지 서로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기본기가 잘 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지와 나의 경지의 차이도 분명 인정하고 있다. 주인의 말씀대로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 대쪽 같은 성격도.’

윤미는 정신없이 날아드는 검을 막으면서도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충분했다.

남궁협의 검법을 모두 견식하면서 창현의 말이 한 치의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본래 어린 나이에 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면 오만함이 깃든다. 그리고 그 오만함은 자신보다 강자를 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그것은 큰 화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남궁협은 자신의 경지를 정확하게 알았고, 윤미보다 몇 수는 아래인 것도 정확하게 알고 또 인정했다.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남궁세가라는 좋은 배경, 그리고 스스로의 강한 무력은 자칫 그를 오만함으로 빠져들기 쉽게 만들었을 것이다.

남궁협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자세로 윤미와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모든 힘을 다해도 윤미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남궁협은 부담없이 전신 내공을 일으키며 윤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연무장에 굉음이 터지고 흙먼지가 피워올랐다.

그만큼 남궁협의 공격은 매서웠다.

챙-!

윤미가 다시금 들어오는 남궁협의 검을 사선으로 막아내며 조용히 속삭였다.

“가끔 검을 휘두르다 보면 검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검에게 길들여졌다는 뜻이다. 또 다른 말로는 내 무공에 취했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것은 종종 발전을 가로 막는다. 본디 인간은 편한 것을 추구하고, 무공은 그런 인간의 심성을 갈고 닦고 더 강함을 추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니까. 무공의 시초가 짐승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시초일 뿐이고 그 이후의 발전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 이후에 만들어진 무공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무공을 수련한다고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니까. 본능이 그 수련을 방해한다. 내가 인간보다 더 빨리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요괴인 나는 편함을 추구하는 본능이 인간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

남궁협은 윤미의 긴 말을 들으면서 퍼뜩 느껴지는게 있었다.

이내 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군. 주인의 말씀대로 넌 분명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익히고 있겠지? 제왕검법을. 네가 이해한 제왕검법을 펼쳐 보아도 좋다. 내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너의 무공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으니.”

윤미의 말에 남궁협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조용한 연무장을 울렸다.

“너무도 난해한 일초식에서 내가 느낀 것은 단지 무거움 뿐이었소.”

말과 함께 남궁협이 곧바로 윤미에게 달려들었다. 눈으로 쫓기 힘든 빠르기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 이상 무엇이 있었다.

‘무겁다라…….’

단순히 무겁다고 해서 강한 검법이 아니다. 피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윤미는 남궁협의 기세에서 무거운 것이 외에 또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창현이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일초식을 어느 정도 익혔군. 확실히 뛰어난 재목이야. 남궁세가는 이 정도면 됐고. 나의 비처를 한 번 들렸다가 중국 여행은 마무리 해야겠어. 그 이후에 말코 도사놈을 어느 정도 가르치고, 실비아 그 계집을 처리한 이후 그 계집 뒤에 있는 놈도 빠르게 처리하면 끝이군.’

검을 맞대며 치열하게 비무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창현의 미소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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