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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4화 (4/70)

4화

* * *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났다.

기억을 잃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변명은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덕분에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매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내가 모르겠다는데 어쩌지 못하는 거지.’

하지만 답답했다.

방 안에는 약초 냄새가 진동하고, 환기마저도 창문을 전부 열지 못해 아주 최소한으로만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도망갈 여지를 조금이라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무엇보다 회복이 필요하다는 변명 하나로 방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답답했다.

손 하나 까딱하면 뭐든 쥐어지지만 나갈 수는 없다니. 그저 잘 꾸며진 감옥이나 진배없었다. 그래도 한 달은 너무했다.

아니, 혼란스러웠던 처음 일주일의 시간을 합치면 한 달 하고도 보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리티아는 답답함에 한껏 늘어져 있다가 사람들이 모두 나간 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일기장을 찾기 시작했다.

방이 워낙 넓었고 시종들이 수시로 찾아와 확인을 하는 데다 주치의가 주는 약을 먹고 나면 졸음이 몰려와서 제대로 방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틈틈이 책상 서랍 속, 협탁, 옷장 속 등 방 곳곳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더니 침대 프레임 사이에 작은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하…… 이 쉬운 걸.”

리티아는 엎드리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일기장을 열었다.

조금도 휘갈기지 않은 단정한 문체를 보니 본래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낸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읽다 보면 뭔가 정보라도 남겠지. 책을 빠르게 넘겨 가장 가까운 시일에 썼을 뒤쪽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이미 두 달 가까이 지난 상태였다.

293년 2월 7일.

오늘은 하얀 나비를 봤다.

팔랑팔랑, 자유로워 보여. 나도 그랬으면.

293년 2월 6일.

아버지께서 또 언짢아하셨다.

그 자리에서 또 도망치다니.

나는 왜 맨날 이 모양이지. 하지만 그 자리는 너무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웠어.

내가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냥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293년 2월 4일.

신은 왜 내게 이런 힘을 내려 주신 걸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지트 님은 뭘 하고 있을까. 연락하라고 하더니. 고백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예상대로 모두 우중충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앞으로 몇 장을 빠르게 넘겼다.

293년 1월 3일.

오늘 처음으로 오브의 존재를 보게 됐다. 멀리서긴 했지만 정말 나쁜 사람들일까? 그저 우리와 똑같아 보이는데.

그래도 오늘은 황태자 전하 덕분에 불편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매번 미안하고 고마워서 어쩌지.

그래도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292년 11월 29일.

지트 트레쉬 영식에게 고백을 받았다. 처음 받아보는 고백이라 너무 정신이 없었어.

하지만 나는 몇 번 본 것뿐이라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 어쩌지……?

내일 다시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야겠어.

292년 11월 18일.

오늘은 신전에 다녀왔다. 성하께 마음을 터놓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미약하게 어둠이 느껴졌던 건 무엇이었을까? 잠시 어디를 다녀오셨나? 잘못 느낀 거겠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서둘러 일기장을 원래 있던 곳에 넣고 일어서서 빠르게 머리를 정리했다.

“티아, 아비다.”

문을 열자 내려다보고 있는 다소 무심한 얼굴의 몬트 공작이 보였다.

리티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뀌었지만.

“아, 들어오세요.”

“그래, 편히 쉬고 있었느냐.”

몬드 공작이 소파에 앉았다.

리티아는 그를 따라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요.”

“몸은 괜찮고?”

“네, 편히 쉬었더니 괜찮아졌어요.”

“그래, 다행이다. 그간 답답했을 텐데 오늘 아비와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자꾸나.”

“바람이요?”

드디어 외출을 허락해 주는 건가?

아버지와 함께라는 소리에 조금 걸리긴 했지만 리티아는 그래도 나가는 게 어딘가 싶었다.

“그래. 함께 갈 곳이 있다. 마침 아테온 홀에서 오늘부터 한 달 동안 기념제가 열린다더구나. 곧 빛의 신탁 때문에 바빠질 테니 저녁 연회라도 가서 가볍게 바람을 쐬자꾸나.”

기념제라.

빛의 신탁이 열리는 해에는 축제가 어마어마하게 열린다고 하더니 그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처음에 글로 봤을 때도 기함했던 게 기억났다.

지금 열리는 연회는 준비에 불과했다.

전야제를 포함한 기념제 한 달, 빛의 신탁이 끝나고 후야제를 포함한 뒤풀이가 또 한 달 이어진다고 했는데 그야말로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놀고먹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0년에 한 번뿐이고 아테온에서 가장 큰 행사라고 해도 두 달은 너무한 거 아닌가.

더구나 몬트 공작은 정말로 답답한 딸을 위해 바람을 쐬러 나가는 게 아니라 혹시나 구설에 올랐을 딸이 멀쩡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끌고 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나갈 방법은 저것뿐인데.

저걸 거역하면 외출 금지가 언제 풀릴지 모른다. 그나마 지금은 그녀가 가진 게 하나도 없으니 이 집 최고 권력자인 몬트 공작의 비위를 맞춰야 뭐라도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리티아가 된 이상 자신의 살길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니까.

더구나 원래 리티아라면 저렇게 말해도 소심해서 알겠다며 아버지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저는 좋아요. 답답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아버지.”

리티아는 눈을 내리깔며 순종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몬트 공작의 입가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그녀는 그 얼굴을 보고 한편으로는 측은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제 딸이 바뀐 줄도 모를까. 그러면서도 그 모습을 보고 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몸을 빼앗았다는 죄책감, 바로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한결 옅어졌다.

“너도 좋다니 이 아비도 아주 기분이 좋다. 그럼 준비하고 이따 8시에 보자꾸나.”

“네, 아버지. 준비 마치고 나갈게요.”

볼일을 다 본 몬트 공작은 미련 없이 일어섰다.

리티아는 뒤돌아서 나가는 몬트 공작의 뒷모습에 살포시 손가락 욕을 살포시 날려주고 그녀의 치장을 도와줄 사람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 * *

“아가씨, 저 기억나세요……? 저 에밀리아예요.”

에밀리아라고 소개한 여자가 울멍울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리티아가 호수에 빠진 날부터 지금까지 벌을 받고 근신을 하고 있었다는 하녀, 에밀리아. 그리고 리티아를 지키고 수발을 들던 사용인과 보좌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기도 했다. 허리까지 오는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옴팡지게 묶었는데 우느라 얼굴에 머리카락이 붙고 난리가 났다.

“아, 그게 내가 기억을 잃어서. 미안.”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제가 그때 아가씨 부탁을 들어드렸다면……. 흐윽, 죄송해요. 아가씨.”

그녀를 다독이던 리타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을까 싶어 물었다.

“무슨 부탁? 내가 너한테 부탁했었니?”

“흑, 그게…….”

리티아는 천천히 그녀를 타일렀다.

“괜찮아, 말해봐. 내가 기억을 잃어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거든.”

에밀리아는 끅끅거리면서 숨을 몰아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흑, 아가씨께서……. 도망치고 싶으시다고 그러셨는데 저는 힘이 없어서. 흐흑, 죄송해요. 저는 영영 아가씨가 눈을 뜨지 못하시는 줄 알았어요. 호수에서 차가운 몸으로……. 흐어엉…….”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에밀리아는 주저앉듯 무릎을 꿇고 앉아 리티아의 드레스 자락을 쥐고 연신 죄송하다며 울었다.

“괜찮아. 이제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야.”

“……정말요? 정말이죠? 다시는 그렇게 무서운 일 하지 않으실 거죠?”

리티아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아는 정말 무서웠다며, 매일 리티아가 잘못되는 악몽을 꿨다며 눈물을 계속 쏟아냈다.

“그럼. 그러니 내 단장을 좀 도와줄래? 그리고 이렇게 옆에서 내 기억을 찾는 걸 도와주겠니?”

그러자 에밀리아가 얼굴을 훔치며 서둘러 일어났다. 순식간에 눈이 퉁퉁 붓고 얼굴이 젖어 있었다.

“네, 네! 그래야죠. 제가 얼른 드레스를 준비해 올게요!”

리티아는 서둘러 나가는 에밀리아를 물끄러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가장 큰 연회 홀인 아테온 홀을 밝힌 샹들리에는 쏟아지는 별빛만큼이나 화려하고 밝았다. 그 어떤 것도 아닌 단지 축제를 위한 공간으로 세상에 온갖 화려함을 다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크기는 커다란 방을 몇 개 합쳐놓은 것처럼 커서 한쪽 벽에서 맞은편 벽까지 가려면 꽤 수고를 들여 걸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중앙홀 크기만일 뿐, 초대된 손님이 머물 수 있는 방과 여흥을 즐길 수 있게 한 공간까지 합치면 그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었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아래.

그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들이 그 커다란 공간에서 공작새처럼 뽐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스스로 불청객을 자처하는 여자가 있었다.

바로 지금 아테온 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애이며 몬트가의 금지옥엽 막내딸 리티아.

리티아는 자신의 아버지인 몬트 공작과 엘라르와 함께 웅장하고 섬세한 하프 소리를 들으며 입장했다.

“몬트 공작과 바젠티 백작, 리티아 몬트 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동시에 화기애애했던 커다란 공간 입구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연회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다들 놀란 얼굴로 리티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멀쩡한데요?”

“역시 뜬소문이었나 봐요.”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말소리가 들려왔다.

리티아는 팔짱을 낀 몬트 공작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몬트 공작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

리티아는 그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그러자 몬트 공작의 낯에 여유로움이 서렸다.

“절대 기억을 잃은 티를 내지 말거라.”

“조심할게요.”

몬트 공작은 자신의 딸을 액세서리 삼아 그들의 시선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유독 그녀에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있었다. 부채로 가린 얼굴 사이로 눈만 드러낸 채 표독스럽게 보고 있는 사람들.

리티아는 그들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그들이 쳐다보는 이유는 하나였다.

‘호수에 빠져 자살을 시도했다더니 멀쩡하게 살아 있네!’

리티아는 주먹을 꽉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곳에서는 꼭 살아남아야 한다.

리티아가 보란 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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