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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10화 (10/70)

10화

* * *

그날 저녁.

리티아는 몬트 공작과의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

“혈색이 많이 좋아진 것 같구나. 주치의도 괜찮다고 하던데.”

깨작깨작 포크질을 하던 리티아가 빙그레 미소 지어 보였다.

“네, 많이 괜찮아졌어요.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해요.”

“괜찮다. 과거는 묻어두자꾸나. 앞으로 잘하면 되지. 그럼 그간의 소문들도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거다.”

그냥 들으면 자식을 걱정하는 아비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평판을 몹시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신문 기사를 확인한 후에 리티아가 따로 알아보니 이미 일전에 잡아놓은 기부와 봉사 일정은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애초에 다른 영애들이 분주하게 움직일 때 같이 움직이긴커녕 자살 소동까지 벌였으니.

타고나길 강하게 태어난 테오스의 힘으로 예쁨을 받았다던 리티아는 이로 인해 몬트 공작뿐만 아니라 신전에도 밉보이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네, 그렇게 할게요.”

“티아, 말이 나와서 말이다.”

“네?”

리티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생각난 김에 내일은 신전에 한번 들러보는 것은 어떠냐. 성하께서도 네 안부를 궁금해하셨으니 바람도 쐴 겸 다녀오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몬트 공작은 태연하게 말했다. 애초에 이 저녁 식사의 목적이 그것인 것처럼.

“신전에요?”

리티아가 머뭇거리자 몬트 공작이 나이프를 내려놓고 포도주 잔을 들었다.

“그래. 가끔 바람을 쐬는 것도 회복하는 게 좋다고 하니 다녀오거라. 가서 성하께서 너를 아끼시니 가서 축복도 받고 오면 마음도 편해지지 않겠느냐.”

리티아는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럴게요. 안 그래도 준비해서 다시 천천히 기부 활동도 하고 봉사도 다니려고 했어요.”

그러자 몬트 공작의 표정이 믿을 수 없이 환해졌다.

“……정말이냐?”

“네, 언제까지고 어린애처럼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앞으로 더 노력해서 자랑스럽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도록 할게요.”

그 말에 몬트 공작은 거의 함박웃음을 지으려고 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너라면 이 아비의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다. 그래, 천천히. 그깟 시간이 무엇이 중요하겠느냐. 하는 게 중요하지. 뭐든 해보거라.”

“뭐든요……?”

“그럼. 네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니 이 아비도 할 수 있는 한 모든 지원을 해주마.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하거라.”

어……? 바로 이렇게?

꽁꽁 가둬놓고 휘두르려 하길래 비위를 맞추고 한 계단, 한 계단 조금씩 자유를 찾는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든 해준다니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리티아의 말에 몬트 공작의 입매가 더욱 흡족하게 늘어졌다.

* * *

리티아는 이튿날 바로 준비를 마치고 몬트 공작과의 약속대로 신전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는 기부금으로 사용할 금화와 보석이 상자 가득 들려 있었다. 몬트 공작이 아침부터 챙겨 밀어 넣은 것이다.

“아가씨, 몸 불편하시거나 어지러우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

에밀리아는 출발 전부터 손수건을 내밀며 연신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응, 괜찮아.”

에밀리아에겐 한없이 약해 보여도 병약했던 원래 몸과는 다르게 리티아는 오히려 무척 건강한 상태였기 때문에 실상 날아갈 것 같았다.

리티아는 의자에 기댄 채 왼쪽 어깨를 연신 주물렀다. 이제 열은 나지 않고 어깨의 통증도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파고드는 것처럼 아팠다가 또 어떨 땐 잠을 잘못 자 뻐근한 것처럼 아프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간지럽고 어떨 땐 언제 그랬냐는 듯 통증이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만 잘 버티면 일주일은 순식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티아 자신이 이길 것 같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그 짧은 시간에 애타게 찾을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 남자도 겉으로만 계속 이어가자고 말했지 속으로는 하룻밤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역시 괜한 걱정이었어.”

“네? 아가씨, 뭐라고 하셨어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오랜만에 나와서 좋다는 말이었어.”

“아, 저도요!”

배시시 웃는 에밀리아를 보며 리티아가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차가 바쁘게 신전으로 향했다.

“아테스 님의 축복이 깃들기를. 오랜만입니다, 몬트 공녀. 잘 오셨습니다.”

“빛의 축복을. 성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리티아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대신관이 아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리티아는 직접 마중을 나온 대신관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마주한 대신관은 리티아의 생각보다 더 젊은 사람이었다.

몬트 공작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단정하게 긴 머리를 모자로 정리한 대신관은 불혹의 나이 정도, 많아야 몬트 공작과 비슷한 나이 대로 보였다.

신전에는 대신관과 신관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위해 오가고 있었다. 대신관은 제게 인사하려 다가오는 귀족들의 시선을 리티아가 부담스러워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다 물음을 건넸다.

“얼굴이 좋아 보여 다행입니다. 공녀가 좋아하는 다과를 준비해 두었는데 정원에서 가볍게 이야기라도 나눌까요?”

눈매가 휘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는 대신관은 마치 애틋한 조카를 대하는 말투였다. 좀 더 딱딱하고 신성한 분위기일 줄 알았던 리티아는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탑승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성하.”

정원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놓아 마치 신관들의 작은 쉼터 같았다.

흰색 테이블보로 덧씌워진 테이블 위에는 대신관이 말한 다과인지, 알록달록한 컵케이크와 쿠키가 가득 올려져 있었다.

주변 건물과 분위기로 볼 땐 아주 조용히, 색이 맑은 차만 마실 것 같았는데 차려진 건 좀 더 어린 영애들의 작은 티파티 모임에서 볼 법한 것이었다.

“공녀가 좀 더 어릴 땐 이곳에서 가끔 뛰어놀곤 했었지요. 혹시 기억하십니까?”

대신관이 웃으며 앉기를 권했다.

“그게, 잘…….”

그러자 대신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때는 좀 더 말괄량이였었는데. 이제는 아테스 신께 더욱 가까워져 자랑스러우면서도, 그 모습은 볼 수 없어 시간이 야속하기도 합니다.”

그 말에 리티아는 빙그레 웃는 일밖에 못 했다.

신전과 이렇게 사이가 좋았다니. 리티아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후보들을 제치고 차기 테니아로 점찍히다시피 했다는 게 몸소 느껴졌다.

본래라면 이 방문도 하지 못해야 맞지만 그럼 정말 뒤늦게 나타난 카미야는 어떻게 되는 거지?

원작에서 보길 그녀는 마치 진흙에서 찾아낸 진주처럼 여겨지며 그간 귀족들 사이에서만 정해지던 테니아 후보의 룰을 부수고 연이어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당장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마차 안에서 바짝 긴장했던 것과 달리 대신관과의 대화는 소탈하고 편안했다. 그간 많이 힘들었을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언제든 힘이 들 땐 찾아오라며 위로를 했지만 그 이상의 민감한 이야기를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그녀는 가져온 금화와 보석을 기부하고 오늘 신전을 찾아온 테오리스들을 위해 성력도 기부하기로 했다.

테오스의 힘은 흩뿌리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도 하고, 가진 힘에 따라 아픈 사람을 고쳐주기도 또는 그 통증을 줄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신전에는 신관과 기부하러 온 테오스들의 힘을 받아가려고 기다리는 평민들이 많았다.

이 행위를 이들은 축복을 내리는 것이라고 불렀다.

대신관을 뒤따라가며 연습도 했고 분명히 사람들 앞에 서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몬트 공녀님.”

이미 와서 기부 활동을 하고 있는 영애들의 근처에서 리티아도 찾아온 이들에게 축복을 나누어주려는데 아무리 해도 연습했던 그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리티아는 당황했다.

“……공녀님?”

한참이 지나도 축복을 내어주지 않자 무릎을 굽히고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 잠시만요.”

왜 이러지?

리티아는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시 해보려고 했으나 어깨에 홧홧한 느낌과 통증이 동시에 느껴지며 도저히 힘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는데 주변에 모두가 리티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심지어 통증이 심해졌다. 당황한 리티아가 한쪽 어깨를 꾹 누르며 비틀거리자 곁에 있던 신관이 나섰다.

“공녀님, 제가 이분께 축복을 내려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깜짝 놀라 리티아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대신관과 인사를 나눌 때 곁에 있었던 신관 에모르였다.

“성하께서 공녀님이 너무 무리하지 마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게 말하며 그가 눈을 찡긋했다.

축복을 받기 위해 무릎을 굽힌 여자는 계속해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속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리티아가 한 번 더 해보려고 했으나 결국 나오지 않는 걸 알고 신관에게 축복을 부탁한 뒤 잠시 물러났다.

“잠, 잠깐만 쉬고 와도 될까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리티아는 다른 신관의 도움을 받아 신전에 마련된 간이 휴게실로 올 수 있었다.

“아니, 부, 분명히 됐는데.”

나름의 준비를 하고 온 것인데 갑자기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되니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몬트 공작에게도 이미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기부까지 하고 오겠다 한 것인데 이러면 안 된다.

리티아는 몇 번이고 휴게실 안에서 연습했으나 아까 힘이 뿜어져 나온 게 무색하게 아무런 빛도 나오지 않았다.

청량함이 차오르던, 에밀리아가 가르쳐 주었던 그 느낌조차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 통증만 가중될 뿐. 불현듯 뭔가 깨달은 리티아가 휴게실을 둘러보며 거울을 찾았다.

다행히 한쪽 벽에 고풍스러운 전신 거울이 보였다.

리티아는 뜨겁게 데인 것처럼 느껴지는 통증에 어깨를 가렸던 옷을 살짝 뒤집었다.

“아…….”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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