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 *
에밀리아의 눈이 당황으로 커다래졌다.
“아, 그야 나는 기억을 잃었으니까……. 뭐라도 다 공부하다 보면 다른 것도 기억나지 않겠어? 이제 정말 정식으로 기부 활동을 하러 다녀야 하는데 만에 하나 마주칠지도 모르잖아. 뭐든 미리 준비를 해둬야지.”
“마주치다뇨……? 아가씨께서는 절대 그들과 마주칠 수 없을 거예요.”
“응? 왜?”
“그들은 더럽고 위험하니까요! 감히 고결한 아가씨께 닿을 리가 없잖아요.”
“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안 돼요! 저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듣기를 그들은 마수와도 같다고 했어요. 절대, 절대 위험한 일이에요!”
생각보다 단호한 에밀리아의 모습에 리티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알았어. 그냥 노파심에. 그저 알아두려는 거야. 혹시 정보를 찾는 것도 안 되니? 금지되었다거나?”
그러자 에밀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럼 알려줘, 에밀리아. 내가 도움을 청할 사람이 너밖에 없잖니. 네가 아는 것도 좀 알려주고.”
그 말에 에밀리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저, 정보만이라면 아가씨 말씀대로 신전에 가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황궁에도 있겠지만… 아가씨께서는 신전이 좀 더 편하신 거죠?”
역시 정답이다.
리티아는 자신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던 대신관을 떠올렸다.
“응, 아무래도 그렇지. 그리고 앞으로 자주 갈 곳이기도 하고. 가서 좀 알아봐야겠다.”
그러자 에밀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는 게 거의 없어 신전을 이용하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말했다.
에밀리아 말대로 그곳에선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리티아가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조금 집중한 것뿐인데 희미하게 빛무리가 보였다.
어쩐지 처음보다도 더 운용력이 늘어난 것 같았다.
“어머, 전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지신 것 같아요! 성력을 쓰시는 게요!”
리티아만의 착각이 아니었는지 에밀리아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깜짝 놀랐다.
“그래?”
“밤마다 연습이라도 하셨어요?”
리티아는 대답 대신 다시금 힘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끊고 다시 흘려보내기를 반복했다.
확실했다.
기분 좋은 성력의 청량감마저 리티아에게는 생소한 느낌이어서 솔직히 조금 버거운 감도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냥 숨 쉬듯 성력이 가볍게 흘러나왔다.
기분 탓이겠지. 어쩌면 그동안 억눌러 와서 초조했던 마음에 간절히 기다렸다 보니 실력이 늘었는지도. 아니면 이게 본 실력인데 리티아가 이제야 깨우친 걸지도 몰랐다.
* * *
그날 밤.
리티아는 홀로 정원에 나왔다. 이제 집 안에서는 시간 제약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정원도 저택에서 좀 떨어진 호수 주변만 아니라면 언제든 나가서 쉴 수 있게 됐다.
외출을 한 번 하려면 아직 온갖 이유를 달고 목적지를 명확하게 알리고 호위들을 대거 대동해야 가능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었다. 그마저도 목적지가 거의 연회장이나 신전 그리고 초대받은 귀족 영애의 사교 모임 정도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 달 내내 방 안에 갇혀 있던 것보다는 나았다.
리티아는 방 안에 가득 넘쳤던 약 냄새가 아직도 생각나 몸서리를 쳤다.
한쪽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는데 어디선가 “먀-.” 하고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
리티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등불이 여기저기 밝히고는 있었지만 리티아가 있는 벤치 주변은 저택과 조금 떨어진 곳이라 다소 어두웠다.
“먀아.”
다시금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이내 새카만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이며 느긋하게 리티아에게 걸어왔다.
“너구나. 방금 운 거.”
그러자 고양이가 다시금 울며 반응했다.
리티아가 손을 뻗었다.
“이리 와.”
고양이를 꼬시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앞까지 온 고양이가 리티아의 손에 머리를 부딪히며 문질렀다.
리티아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여기도 고양이라는 게 있구나. 하긴.”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긴 했다. 스스로도 우스웠다. 그렇다고 뿔이 달리거나 귀가 네 개인 고양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면서.
다만 눈동자가 기묘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검은색도 보라색도 아닌 오묘한 색. 하지만 분명히 또렷하게 보일 정도의 빛이 있었다.
보통 검은 고양이는 연두색이나 노란색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의아하긴 했지만 어디서든 보던 그 고양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리티아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고양이가 머리를 다시 부딪혀 왔다.
“너 원래 이렇게 낯가림이 없어?”
리티아는 그런 모습을 보고 웃으며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어디서 왔니? 여기서 살아? 하인 중에 누가 널 돌봐주니?”
길고양이라고 하기에는 털이 무척 매끄러웠다.
“…….”
그러자 잘도 대답하던 고양이는 리티아의 손을 두고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힘껏 머리를 부딪혀 오기를 몇 번. 리티아의 손가락을 까끌까끌한 혀로 핥았다. 누가 봐도 손 탄 게 분명했다.
리티아가 오른쪽으로 손을 두면 오른쪽으로 와서 얼굴을 부비고 왼쪽으로 옮기면 또 살랑거리며 왼쪽으로 다가왔다. 꼭 그 행동이 아까의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거기다 하필 검은 고양이…….”
먀아.
고양이가 마치 묻는 것처럼 울음소리를 냈다. 리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이제 들어갈 건데. 혹시 밥은 먹었니? 에밀리아한테 우유나 육포라도 가져오라고 해야 하나?”
리티아가 머리와 허리를 쓰다듬으며 배 근처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고양이가 펄쩍 뛰며 멀어졌다.
리티아가 다시 손을 내밀었지만 멀리서 어슬렁거리며 다시 다가오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고양이들은 배와 꼬리 그리고 발을 만지면 안 된다고 했었던 것 같다. 키워봤어야 알지. 리티아는 훌쩍 멀어진 고양이를 아쉬운 듯이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이제 안 만질게. 늦었으니까 너도 얼른 집에 가, 알았지?”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고 일어나자 고양이가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리티아가 가는 대로 쫄랑쫄랑 따라오기 시작했다.
리티아는 그게 내심 반가웠다.
“안 갈 거야?”
일부러 그렇게 묻자 고양이는 리티아의 다리 주변을 맴돌며 머리를 부딪히고 몸을 부대껴 왔다.
리티아는 살짝 몸을 숙여 고양이의 몸을 쓸었다.
“그럼 내 방에 놀러올래?”
먀-
기다렸다는 듯 고양이가 대답했다. 정말 리티아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들렸다.
“잠깐만.”
리티아는 조금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창문을 열고 고양이를 찾았다.
“고양아, 야옹아, 나비야. 갔어?”
하얀 팔까지 바깥으로 뻗어 휘휘 저었다.
하지만 창틀에 팔을 댄 채 턱을 괴고 기다려도 고양이가 오지 않았다. 분명 이 근처인데 그사이 가버렸나.
고양이는 제멋대로라고 했으니 그 짧은 사이 마음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도 순전히 리티아의 생각이니 애초에 올 생각이 없었는지도.
리티아가 아쉬움에 허리를 세웠다. 순간 풀숲에서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고양이가 폴짝 뛰어 단숨에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리티아는 넘어 들어오는 고양이를 받아주느라 뒤로 몸이 무너졌다. 침대에 엉덩이와 등이 닿으며 그대로 고양이를 보호하듯 껴안았다.
“깜짝 놀랐잖아.”
“먀아.”
갇혀 있는 동안 침대에 누워 정원을 보고 싶다고 한 덕분에 침대가 창문 가까이 둬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을 것이 분명했다.
“안 다쳤지?”
리티아는 고양이의 상태부터 살폈다. 워낙 유연하다지만 제가 너무 꽉 껴안은 탓이다.
고양이가 괜찮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머리를 리티아의 손에 부딪혔다. 리티아는 웃으며 고양이의 머리와 몸을 쓰다듬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고양이가 리티아의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방 안을 둘러보듯 꼬리를 치켜들고 발소리도 나지 않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리티아는 그 귀여운 행동을 보며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마음에 들어? 여기서 나랑 같이 지낼래? 매일 맛있는 걸 챙겨줄게.”
리티아는 사실 외로웠다. 에밀리아는 친절하고 몬트 공작은 조금씩 리티아에게 신뢰를 느껴 자유를 주지만 언제고 본모습을 감춘 채 벌벌 떨어야 했다.
작고 귀여운 고양이라도 제 옆에 있어준다면 큰 위로가 될 것 같은데. 고양이도 바깥에서 작은 몸으로 비나 다른 동물 같은 위험한 것과 맞서느니 자신과 편히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리티아는 고양이를 보며 조용히 설렁줄을 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밀리아가 들어왔다.
“아, 아가씨!”
기겁하는 에밀리아에게 리티아가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쉿. 저 고양이가 먹을 것 좀 줄 수 있을까? 조금만 있게 할게.”
“바깥에서 있던 고양이 아니에요? 병이라도 옮으면 어떡해요.”
“괜찮아, 고양이들은 다 깨끗해. 배고픈 것 같으니까 조금만 가져다 줄래?”
그러자 마지못해 에밀리아가 걱정하는 눈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아가 가져온 건 잘게 쪼갠 육포와 물이었다. 리티아는 에밀리아의 걱정스러운 눈을 모르쇠하고 보낸 뒤 다리를 굽혀 육포로 고양이를 꼬드겼다.
“이거 먹어봐, 야옹아. 맛있으면 여기서 지낼래?”
“…….”
그러나 방까지 집요하게 찾아온 고양이는 육포를 입에 대지도 않고 리티아의 부탁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거 먹어봐, 응? 배 안 고파?”
리티아는 한참 고양이를 따라다니며 꼬셨지만 방금까지 말끝마다 대답하던 고양이는 어디 가고 아무런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너 좀 쉽지 않다?”
리티아가 서운함을 팍팍 드러내나 그제야 다시 다가와 리티아의 손을 핥아댔다. 정말 요물이 따로 없었다.
“그래, 싫으면 가끔 놀러 와, 알았지?”
먀아.
그제야 고양이가 대답을 해주었다. 리티아는 처음 본 고양이에게 다시금 야속함을 느꼈다.
리티아는 그날 창문을 타고 자신의 방까지 따라온 고양이와 한참을 놀다 잠이 들었다. 새카만 고양이를 보고 에밀리아가 기겁을 하긴 했지만 리티아의 부탁을 꺾진 못했다.
자고 일어났을 땐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나가 버렸는지 없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뭔가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에밀리아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것들을.
그래봤자 고양이고 리티아가 한 이야기들 모두 여기서도 일어날 법한 시시콜콜한 것들 뿐이었지만 고양이는 얌전하게 쓰다듬을 받으며 리티아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 * *
다음 날 아침.
리티아는 아침부터 외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옆에서는 리티아의 보좌관으로 움직여 줄 사람도 있었다.
“세리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앞으로 아가씨의 일정을 관리하며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하신 부분이나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세리는 여려 보이는 에밀리아와 다르게 키도 크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칼단발에 가까운 금발의 머리 스타일과 새카만 정장 그리고 아마도 날카로운 눈매 때문인 것 같았다.
리티아는 에밀리아가 따로 귀띔해 주지 않아도 전 보좌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에밀리아를 제외한 호위와 보좌 그리고 시종까지 모두. 그래서 모른 척하며 거울에 비치는 모습에 집중하며 말했다.
“그래, 세리. 잘 부탁할게. 오늘부터는 기부 활동에도 참여하려고 하는데. 이제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아, 안 그래도 아침에 각하께서 아가씨께 이걸 전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