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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16화 (16/70)

16화

* * *

“흐응, 하긴 오늘이라면 공녀와 딱 어울리는 테메스를 만날 수 있겠네요. 나중에 누굴 골랐는지 꼭 알려주기로 해요? 선물로 손수건이나 미리 준비해 두게요. 아, 너무 늦어서 순례를 출발할 수나 있으려나……. 괜히 남한테 폐 끼치지 말고요. 어디 한번 잘해봐요.”

그러고는 풋, 하고 로아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리티아를 만날 때마다 눈물을 쏙 빼게 한 과거에 빗댄 질 나쁜 농담이었다.

원래의 리티아가 호수에 빠져든 건 자신 탓이 가장 크다는 걸 알 텐데 죄책감은커녕 또 어떻게 리티아를 깎아내리고 놀림거리가 되게 할까 그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어디 한번 계속 그렇게 해보라지.

“걱정도 고마워요. 그렇지만 영애가 걱정하는 일은 안 일어날 거예요. 난 내가 가진 힘을 아주 잘 이용할 생각이거든요.”

로아가 눈을 부릅떴다.

“…….”

“그리고 어느 분이 되시든 모든 건 아테스님의 뜻이죠. 누가 더 테니아의 자리에 어울리는지도 아실 테고요. 빠르고 늦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자 로아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며 다소 얼굴이 붉어졌다.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입에 오르내리는 그 혈통. 원한다면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심경의 변화가 있긴 했었나 본데……. 뭐 두고 보면 알겠죠. 나는 오늘 테니아분들을 직접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고 나온 거라서요. 그럼 부디 좋은 테메스가 배정되길 바랄게요.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영애께서 기대하신다니 더욱더 힘내야겠네요. 그럼.”

그러고는 다시금 부채를 팔랑이는 로아에게 리티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만 까딱한 뒤 그녀를 지나쳤다.

원래 리티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집요하게 따라오지도 않고 부채로 가슴을 꾹꾹 누르던 것도 잊은 듯해 보였다.

리티아는 더 늦을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보여준다고? 누가 더 테니아 자리에 어울리는지 아냐고? 하!”

마차로 향하던 로아는 신전으로 들어가는 리티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죽었다 살아났다더니 눈이 뵈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자신 앞에서 성력을 운운하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하긴 스스로 물에 빠졌다더니 미치지 않은 게 이상하지.”

고작 몇 번 장난쳤기로서니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다소 놀라긴 했지만 그건 리티아가 심약하기 때문이지 로아의 탓이 아니었다. 누가 직접 떠민 것도 아닌데.

죄책감을 덧씌울 속셈인가 본데. 그래봤자 이미 좋은 성기사들은 자신을 포함한 다른 영애들이 모두 골라 데려갔다.

고작 남은 건 실력은 좋으나 평민 출신이거나 뭐 그래도 테메스가 되기 위해 차출된 자들이니 기본은 하겠지만.

문제는 중심이 되어야 할 리티아 몬트가 천치에 가까울 정도로 멍청하다는 점이었다. 그보다 어울리는 조합이 어디 있으랴.

방금 자신에게 처음으로 맞받아치던 모습에 조금 놀라긴 했으나 상대는 ‘그’ 리티아다. 골방에 박혀 연습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지.

자신은 최고의 테메스를 거머쥐었다. 몬트가의 배경으로 늘 좋은 걸 꿰찼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어디 한번 해보라지.’

로아가 다시 부채질을 했다.

“어서 가죠. 할 일이 많으니.”

뒤따르던 성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꾸벅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로가 다시 걸음을 멈춰 힐끗 뒤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 끝에 리티아의 드레스 끝자락이 마지막으로 보이고 완전히 사라졌다.

‘저 여자가 몬트 공녀라고?’

몬트가의 하나뿐인 공녀는 몹시 아름답고, 타고난 성력의 양이 대단하지만, 성정이 무척 유약하여 사교는커녕 일상적인 대화도 어렵다더니.

‘전혀 아닌데?’

한눈에 빠져들 만큼 아름다운 외모라는 건 사실이었으나 들리는 소문의 성격은 아닌 듯했다. 심지어 모인 후보들 사이에서도 몬트 공녀의 이야기가 비웃음과 같이 쏟아져 나왔었는데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다들 놀랄 것 같았다.

그런 것 보면 딱히 소문이 와전된 것 같진 않은데…….

“…….”

후보 중에서 단연 빛의 이능을 한 몸에 받아 성력의 양이 방대하다던데. 저런 모습일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눈에 띄지 말 것을 그랬다.

‘뭐 더 보면 알겠지.’

“아로, 뭐 해?”

“아냐.”

콜로스가 늦어지는 아로를 불렀다. 이내 아로가 시선을 거두며 다시 로아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대신관과 만남 이후 리티아는 신관의 안내를 받아 테메스를 배정받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겠지만 앞으로 계속 공녀님과 함께할 기사들이니 경들과 대화를 많이 나눌수록 잘 맞는 기사를 선택할 수 있으실 겁니다. 조금 더 일찍 오셨다면 선택의 폭이 더 넓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 때문에 훈련에 차질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이쪽입니다.”

몇 번의 복도를 지나 신관이 말하는 방향으로 몸을 꺾자 기사단들이 훈련을 하며 머무는 공간이 나왔다. 아예 또 다른 건물 하나가 뚝 떨어져 거대한 훈련장과 함께 마련된 공간이었다.

저 멀리 푸른 빛을 내며 훈련을 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로아 앞에서도 긴장하지 않았던 리티아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에 일반 성기사분들도 같이 계시는 거죠?”

“예? 아, 그렇습니다. 하나 선발에서 제외된 기사들이라 굳이 인사를 나누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른쪽에 테메스 후보들의 휴게실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실까요?”

리티아는 대답 대신 걸음을 멈췄다.

‘딱 두 명이면 되는데.’

리티아는 이미 오기 전에 누구를 고를지 이미 정해둔 상태였다. 테메스로 정식 선발된 기사는 아니지만 위험에 대비해 따로 합류한 성기사들 중에서 원작에 이름까지 거론될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던 둘이다.

어차피 어떤 이들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르는 거라면 차라리 그 둘을 고르겠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묘사가 되어 있지 않아 이름밖에 모른다는 것. 이름과 후보 기사가 아닌 일반 성기사라는 두 가지를 가지고 그 둘을 찾아야 한다.

“신관님.”

“예?”

“만약 저기 계신 분들 중에 부탁을 드리면 어찌되는 건가요?”

“예? 하지만…….”

“절대 안 된다는 규정이 있을까요?”

“규정에는 없지만 앞으로 공녀님을 보좌할 이들인데 이미 그간의 쌓아온 업적과 결투를 통해 선발된 기사들을 두고 굳이 고르실 필요는 없지요.”

“그럼 저분들께 여쭤보아도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그렇지요.”

“두 분만 고르면 될 것 같은데…….”

“……두 명만 말입니까?”

“아, 교대도 해야 하시죠. 그럼 세 분……?”

신관이 땀을 삐질 흘렸다.

신관의 반응은 당연했다. 다른 후보들은 최고로 우수한 테메스를 골라도 부족해서 최대 인원수를 채워 데려간다. 더 데려갈 수 없냐고 의견을 낸 영애도 있었다.

심지어 가문을 통해 은밀하게 거래를 해오기도 한다.

어떠한 조건이라도 규율에 맞추어 거부하지만 반대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일반 성기사 중에서 고른다고 하질 않나 두 명만 필요하다고 하질 않나.

물론 다른 성기사들과 신관도 순례 일행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귀족들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시하므로 테메스가 배정되자마자 제복을 입히고 데리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신의 종을 데리고 신의 보호를 받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데 그 인원이 다 필요치 않다니?

성하께서 조카처럼 아끼시는 분이라 최대한 챙기려고 마음먹고 나섰는데 자신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어지는 행보에 땀이 삐질삐질 났다.

행여 챙김이 부족해 성하께서 노하시진 않을까 걱정도 들었다.

‘그래도 다 들어드리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나.’

신관은 어색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공녀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하셔도 됩니다.”

그러자 리티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신관님. 그럼 저쪽에 계신 성기사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신관이 어색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뭐 출발하기 전까지는 언제든 마음을 바꿀지도 모르니 그때 다시 조언해 줘도 될 일이었다.

“카디스 경. 잠시 기사들을 모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관은 가장 가까운 곳에 성기사를 불렀다.

갑옷을 입고 삭발에 가까울 정도로 머리를 짧게 친 기사가 성큼 다가왔다.

“레페님. 기사들 전부 말입니까?”

“아, 먼저 저기 계신 분들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공녀께서 이곳에서 공녀님의 테메스를 고르길 바라십니다.”

리티아의 말에 신관이 덧붙였다.

“예, 그렇습……예?”

흔쾌히 대답하며 몸을 돌려 기사를 소집하려던 기사가 다시 홱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반음 비틀어지듯 올라갔다.

“테메스를 이곳에서 고르시겠다고 하셨습니까?”

“네. 물론 기사님들의 의견은 물어볼 생각이에요.”

그러자 카디스라 불린 기사가 더욱 놀란 눈을 했다.

애초에 테메스는 쌍방 동의가 필요한 관계가 아니었다.

물론 고려는 해볼 수 있으나 우선 테니아 후보인 귀족에게만 선택권이 있다.

말 그대로의 고려일 뿐 거부권은 없다. 귀족의 긍지에 금이 가는 일이 있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테메스가 되기 위해 차출된 기사가 아닌, 일반 기사를 고르는 것도 파격적인데 그 내용도 파격적이었다.

카디스는 신관을 한 번 더 쳐다봤다. 신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카디스가 정신을 차렸다.

“아, 그렇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디스가 큰 소리로 기사들을 모으자 리티아는 금방 훈련을 나온 약 스무 명의 성기사들과 대면을 할 수 있었다.

기사들 모두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무슨 일인가 가늠하는 것 같았다.

“미래의 테니아를 뵙습니다.”

“아테스님의 빛이 깃드시길.”

성기사들은 리티아를 향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해왔다.

“아테스 님의 가호가 늘 함께하시길.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리티아도 마주 인사하며 성기사들을 바라봤다. 보자마자 이름으로 찾으면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최대한 먼저 묘사에 맞는 사람을 찾느라 리티아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다른 건 몰라도 한 명은 방패만큼이나 커다란 몸이라곤 했는데. 다 큰데……. 다른 한 명은 짧지만 익살스러운 말투를 썼으니 대화에 귀 기울여 유추할 수 있을 것 같고.’

다들 기본적으로 체격이 좋은 데다 갑옷을 입고 있어서 누구 하나 특출나지 않은 이상 키 차이가 날 뿐 거기서 거기처럼 보였다. 뒤에까지 보려니 잘 보이지 않아 까치발까지 들어 기웃거렸다. 뒤꿈치를 들어 폴짝 뛰는 순간 유난히 키가 큰 기사가 눈에 띄었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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