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 *
곤도르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러곤 꾸벅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어쨌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래도 선택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리티아의 말을 듣지도 않고 가버렸다. 정중했지만 거의 협박성에 가까웠다. 귀족을 너무 싫어해서 눈치도 안 본다더니 성격도 딱 맞아떨어졌다.
“…….”
리티아는 성큼 멀어지는 곤도르의 뒷모습을 보고 짧게 입을 삐죽였다.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네.
하지만 리티아는 그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도 한 번에 찾아서 다행이랄까.
이왕이면 서로 협력하는 방향으로 부탁하고 싶었는데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이제 한 명……. 또 나머지 한 명은 누구로 결정하지.”
교대하려면 총 셋은 필요하니까.
고민하고 다시 신관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신관이 먼저 리티아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 곤도르가 갔으니 보고 허둥지둥 뛰어온 듯했다.
“공녀님! 여기 계셨군요.”
“네, 신관님. 안 그래도 가려고 했는데.”
“곤도르 경이 무례하게 굴진 않았나 걱정이 되어서.”
“아뇨, 전혀요. 아주 정중하셨어요.”
그러자 레페 신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마치 그럴 리 없다는 듯이.
리티아는 레페의 표정으로 대충 짐작이 가능했다.
“정말이에요. 저, 신관님.”
“예, 공녀님.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십시오.”
“곤도르 경을 제 테메스로 부탁드리고 싶은데 신관님께서 설득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관의 얼굴이 금세 당황으로 물들었다.
“역시 곤도르 경이 또 사고를…….”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말씀은 이미 드렸는데 확실하게 해놓으려고요. 원하는 지원은 몬트가에서 뭐든 하겠다고 전해주시겠어요?”
“그리하겠습니다. 테메스를 더 고르셔야죠.”
“아, 네. 다른 분들 따라가려면 서둘러야겠네요.”
그제야 신관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잘 해내실 겁니다. 저는 리티아님이 몬트가를 또 한 번 빛내실 거라 믿습니다.”
신관의 응원에도 테메스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까 인사한 기사들을 모두 살폈는데도 리티아가 찾는 사람이 없었다.
외부에 나가 있는 기사도 있다고 하기에 리티아는 결국 펠루가라는 이름만 신관에게 전달해 테메스를 골랐다.
또 한 명은 결국 고르지 못해 신관에게 추천을 부탁했다.
* * *
“뭐 해?”
뒤에서 다정한 음색이 들려 리티아가 화들짝 놀랐다.
리티아는 신전에서 테메스를 고르고 돌아와 오브에 관한 정보를 모두 찾아보는 중이었다.
에밀리아가 찾아주고 구해다 준 것 외에도 더 필요한 것이 있을까 서가를 뒤적거리는데 엘라르가 찾아온 것이다.
“응? 아, 그냥 기억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그런데 이들을 왜?”
리티아가 모아놓은 책들은 대부분 역사나 신전 그리고 오브에 관한 것들이었다.
특히 가장 맨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을 보고 엘라르가 물었다.
“응? 아……. 혹시 모르잖아. 역사에 관련된 이야기기도 하니까. 다른 것도 다 보는 중이야.”
리티아가 괜히 마음이 걸려 변명을 길게 늘어뜨렸다.
잠시 리티아를 쳐다보던 엘라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으며 책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좀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음, 아직 모르겠어.”
리티아가 책 하나를 더 꺼내 서재에 마련된 소파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오브와는 전혀 관련된 책이 아니었지만. 그냥 엘라르가 의심이라도 할까 봐 집히는 책을 아무거나 고른 것이다.
엘라르는 리티아가 골라놓았던 남은 책을 대신 들고 와 리티아의 곁에 앉았다.
“리티아.”
“응?”
“그렇게 부담 가질 것 없어. 아버지는 늘 그러시잖아.”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너는 그냥 이대로 좀 더 있어도 된다고 엘라르가 다독였다.
“하지만 순례에 오르는 날이 얼마 안 남았는걸.”
그 말에 엘라르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아무리 동생을 아끼는 오빠라도 아버지의 뜻을 꺾으면서 테니아의 길을 막진 못할 것이다.
그보다 문제는.
‘하나도 안 나와 있네.’
그들의 관한 이야기라면서 막상 소문에 가까운 이야기들만 있고 정확한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겨우겨우 두 권이나 구했는데 리티아가 원래 가지고 있는 원작 지식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더 내용이 없었다.
이래서야 그 남자가 오브인지 확인도 불가할뿐더러 어깨에 새겨진 문양과 힘을 억누르는 능력 거기다 고통까지 해결할 수가 없어진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렇다고 테니아의 후보가 여기저기 묻고 다닐 수야 없지 않은가. 방법은 결국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또 이상한 조건이라도 걸어가며 자신을 놀릴 것 같았다.
분명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내가 원한다고 오는 건 사실이 맞나. 아니면 어쩌지.
리티아의 고운 미간이 패였다. 그러다 슬며시 책을 궁금해하며 뒤적이고 있는 엘라르에게 물었다.
“오빠.”
“음?”
“혹시 그들을 본 적이 있어? 직접 마주했다거나 아니면 멀리서 봤다거나.”
“음…….”
엘라르가 기억을 곱씹듯 침음했다. 한참 후에야 고개를 모로 저었다.
“글쎄, 본 적 없는 것 같아. 너도 없을걸.”
“응, 당연히 그렇겠지?”
“우리가 그들을 볼 일이 뭐가 있겠어. 필요할 때 외에는 아예 넘어오질 않거든. 우리 또한 마찬가지고.”
제국이 워낙 크다지만 분명 같은 땅덩어리, 같은 제국에 존재하는데 마치 갈라놓은 것처럼 마주칠 일이 없는 게 신기하긴 했다.
“그렇게 궁금해?”
다시 책으로 시선이 향한 리티아에게 이번에는 엘라르가 물었다.
“어? 아, 궁금하다기보다는 음, 음, 그냥 다 알고 싶어서. 말했잖아, 순전히 기억을 찾기 위함이라고. 다, 다 봤다.”
아무래도 옆에서 엘라르가 가지 않고 주시하고 있어서인지 신경이 쓰였다.
결국 리티아는 다 읽지도 못한 채 서재를 나왔다.
뒤에서 계속 엘라르가 리티아를 시선으로 좇았다.
* * *
이틀이 지났다.
“조심해서 내리세요.”
“아, 고마워.”
마차 문을 열자마자 악취에 가까운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리티아는 아침부터 수도 서쪽 외곽에 있는 빈민가에 도착해 발을 내렸다.
“…….”
하지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 순간 리티아는 할 말을 잃었다.
빈민가라고는 했지만, 눈으로는 처음 보는지라 다소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어제도 간 신전은 바닥까지 반듯한 돌로 되어 있어 구두에 흙 하나 묻지 않고, 꽃향기 같은 좋은 향기가 났었다.
거기에 온통 하얀 벽은 늘 관리가 되어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여긴 제대로 된 집을 찾기 어렵고, 쓰레기가 바닥에 널려 있었으며 바닥도 흙바닥이었다. 며칠째 비가 오지 않았는데 질척하고, 그늘이 진 곳은 웅덩이도 보였다.
신전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빈민가의 아이들은 리티아의 걱정과 달리 떠들썩하게 떠들며 뛰어놀고 있었다. 대부분이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어도 신기하리만큼 건강해 보였다.
그 밝은 웃음에 리티아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힘드세요? 5분 정도만 참으시면 됩니다.”
“5분? 뭘 참아?”
봉사하러 왔는데 5분이라니?
일부러 옷도 활동하기 좋은 옷으로 챙겨입고 미리 몸도 풀고 왔다.
늘 병상에서만 있었으니 오히려 연회 같은 자리보다 체력이 약해 버겁더라도 몸으로 움직이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기뻤기 때문이다.
늘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늘 꿈꾸던 일이었으니까.
하다못해 설거지라도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소원이었다면 누구든 믿기나 할까.
무슨 일을 하든 오늘 하루 온몸을 불사를 기세로 왔는데 5분이라니?
“5분 정도면 이곳에 머무셔도 문제없을 거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성력을 쓰시는 걸 보여주시는 게 가장 좋지만……. 괜찮으시다면 가장 깨끗한 아이라도 잡아 올까요?”
리티아는 세리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도통 세리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럼 뭐 하러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기껏 아침부터 온갖 다짐을 다 하고 온 터라 세리의 말은 기운을 빠지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 아이를 잡아 온다니. 그러지 마.”
리티아는 세리가 당장이라도 근처에서 뛰어노는 아이 중 한 명을 데려올 것 같아서 우선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면 될 것 같아요.”
세리는 아예 시간을 정확하게 재기라도 할 요량으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봉사하러 왔는데 무슨 소리야. 그건 됐고 우선 여길 관리하거나 하는 사람을 찾고 싶은데. 내가 무얼 도울 수 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어디로 가면 될까?”
그러자 오히려 세리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직접 봉사를 하시겠다고요……?”
“그럼?”
“테니아 후보이신 아가씨께서 머무는 것만으로도 이곳은 축복입니다.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따로 후원을 조금 하도록 할까요?”
그러면서 지금껏 누구든 실제로 몸을 움직여 봉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대충 5분 정도 머물다가 금화 몇 개를 빈민가에 지원하고 가는 게 대부분이라고 했다.
지금 후보 중에 가장 많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로아 또한 매일 오다시피 하고 있지만 지금 세리가 설명한 걸 그대로 하는 것뿐이었다.
기억이 없어서 설명을 해줄 모양인가 본데, 그럴수록 리티아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분명 신이 내려다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다들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는데 과연 신이 축복을 내린다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아가 시간에 맞출 수나 있겠냐고, 열심히 해보라고 그렇게 코웃음을 치더니 고작 이곳에 5분씩 머무는 일로 그렇게 콧대를 높였나 보다.
‘정말 황당해서.’
리티아도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다들 하는데 자기라도 똑같은 인간이니 못 할 게 뭐 있나 싶어서.
그런데 약간 오기가 들었다. 이 몸을 죽게 만든 로아와 하는 짓이 똑같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건 됐고, 관리자 좀 불러줘. 나는 정말 해야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