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 *
다행히 에나의 의식은 돌아왔다. 가슴을 벅벅 긁을 정도로 괴로워했던 고통도 사그라든 듯했다.
곤도르가 뒤늦게 품에서 뭔가를 꺼내 에나에게 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성력이 통한 건가?’
성력의 쓰임새를 아직 완벽하게 깨우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일시적으로든 아니든 회복이 된 걸 보면 큰 병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곤도르가 방금 약으로 보이는 걸 먹이기도 했고.
아무리 그래도 리티아 자신보단 잘 알겠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빠?”
“집에서 나오지 말랬더니 또.”
“헤헤. 애들이 기다려서.”
에나는 기껏해야 10살 아니면 그보다 아래처럼 보였는데, 딱 봐도 나이 차가 상당해 보였다. 어린 동생이 있었나? 리티아는 거의 볼품없이 나동그라지다시피 한 상태라 옷을 털며 일어났다.
봉사를 할 생각으로 드레스를 입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지, 드레스를 입고 왔다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어쨌든 리티아는 졸지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솔직히 말해서 곤도르의 어깨를 잡아 돌려 그쪽 동생을 해하려고 한 게 아니라 도와주려고 했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제 동생의 얼굴이며 몸이며 정신없이 확인하는 걸 보니 됐다 싶었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으니 가자.”
“네, 아가씨.”
리티아는 다소 힘이 빠진 상태로 에밀리아에게 말하며 바지를 툭툭 털고 몸을 돌렸다.
“공녀님께서 왜 여기 계신지 여쭈어봐도 됩니까?”
곤도르였다.
한데 목소리가 날카롭다. 마치 의심이라도 하는 투였다.
내내 참았던 리티아는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한쪽 눈썹을 삐죽 올렸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테메스로 영입하려고 어지간하면 좋게, 좋게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적어도 나동그라지다시피 한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게 먼저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래도 물어보니 답은 줘야겠다.
리티아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봉사요. 해하려고 했던 건 전혀 아니에요. 아이를 도와주려고 했어요. 내 힘이 도움이 될까 해서……. 우선 동생이 통증은 가라앉은 것 같으니 늦기 전에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그럼.”
리티아가 다시 몸을 돌렸다.
“오빠, 저 언니가 나 도와주셨어…….”
에나의 목소리에 곤도르의 눈매가 움찔했다.
“바로 집에 가자.”
“네, 아가씨. 문 닫겠습니다.”
“몬트 공녀님!”
뒤늦게 곤도르가 뛰어와 닫히는 마차 문을 잡았다.
“공녀님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세리가 날카롭게 다그쳤다.
리티아는 세리에게 손을 들어 말린 뒤 곤도르에게 시선을 건넸다.
“……말씀하세요, 곤도르 경.”
동시에 곤도르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리티아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저기!”
“방금 무례하게 군 점 죄송합니다. 동생이 가끔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가 이성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딱 떨어지는 사과에 리티아가 괜히 목덜미를 문질렀다.
방금 마음이 상한 건 사실이었으나 사과를 받으니 화를 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거기다 동생이 아파서 눈이 돌아갔다는데 대놓고 그래도 너무했다고 말하기가 민망했다.
자신도 아파봤기에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아서.
“괜찮아요. 오해가 풀렸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사과는 받도록 할게요.”
“…….”
“정 마음이 쓰이면 제 테메스가 되시는 걸 한번 고려해 봐 주시고요.”
그 말에 허리를 편 곤도르의 시선이 리티아에게 향했다.
리티아는 싱긋 웃으며 세리에게 어서 가자 말했다. 이윽고 곤도르가 뒤로 비켜서자 마차 문이 닫혔다.
리티아는 마차가 출발을 하고 나서야 몸에 바짝 들어갔던 긴장을 풀었다.
“……멋있는 척하느라 혼났네.”
“정말 저 기사를 테메스로 데려가실 거예요?”
에밀리아가 옆에서 물었다.
세리의 시선도 리티아에게 향한 걸 보니 세리도 그게 궁금한가 보다.
“응, 그래야 해.”
“하지만 너무 무례하고, 경우도 없고, 다혈질인 것 같아요. 순례길에 오르시는 내내 아가씨를 곤란하게 하시면 어떻게 해요? 더 멋진 기사들도 많은데!”
에밀리아는 리티아보다 더 뿔이 난 듯했다. 아예 주먹으로 무릎을 팡팡 치며 리티아를 말렸다.
“나는 곤도르 경의 능력을 봤으니까.”
“언제요? 보신 적이 있으세요?”
“아아, 음, 그러니까 신관님께 따로 넌지시 들었었어. 그래서 그래.”
“아, 그렇군요……. 그래도 저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아가씨께서 결정하신 일이니까 지지는 하지만 또 아가씨께 무례하게 굴면 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에밀리아는 금방이라도 곤도르를 때려눕힐 기세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뒤늦게 리티아가 에밀리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제 두 손을 내려다봤다.
‘아직 완벽하게 컨트롤이 안 돼.’
그를 만나면 해결이 될 줄 알았는데 완벽하게 해결이 난 게 아니었다.
마치 여차하면 관계를 끊을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리티아가 테니아가 되려는 걸 꼭 막는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리티아가 넘겨짚은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후자는 아니기를 바랐다.
* * *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공녀님의 테메스가 될 펠루가라고 합니다.”
“마르마티라고 불러주십시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곤도르입니다.”
리티아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신전에서 연락이 와 서둘러 준비를 하고 왔는데 하나같이 한 덩치 하는 기사 셋이 리티아의 앞에 나타났다.
리티아의 앞에 기사들을 데려온 신관은 더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보곤 인사를 나누도록 뒤로 물러났다.
“아, 반가워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고맙습니다.”
리티아는 우선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그러고는 각자의 개성이 넘치다 못해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셋을 쳐다봤다.
흑갈색의 어두운 눈 거기에 어두운 피부색까지. 덩치도 크고 전체적으로 선이 두꺼워 그야말로 공격력과 방어력이 어마어마할 것 같은 기사 곤도르.
그에 반해 샤프하고 어쩌면 기사보다는 신관이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할 정도로 고운 선을 가진 펠루가는 리티아만큼이나 리티아가 신기한 듯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은발에 눈이 파란색이라 그런지 알게 모르게 차가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왜 저희를 고르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공녀님?”
아까부터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기사는 자신을 마르마티라고 소개했었다.
귀를 가리는 구불거리는 금발에 녹색 눈이 반짝반짝했다.
딱 봐도 셋 중 가장 나이가 어린 것 같았는데 리티아는 뒤늦게 이 기사의 이름도 원작에서 본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직접적인 묘사는 없으나 곤도르, 펠루가와 친한 사이라 몇 번 언급되었던 걸 떠올린 것이다.
“그냥…….”
“그냥?”
“세 분이 저와 잘 맞을 것 같아서요. 음, 신관님께 멋지신 분들이라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둘러대려나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리티아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나쁜 대답은 아니었는지 마르마티는 테메스 후보 중에서 고르지 않고 자신들을 고른 게 신기하다며 말을 덧붙였다.
사실 조금 더 시일이 걸릴 줄 알았다. 어제 빈민가에서의 일이 있긴 했지만 바로 마음을 달리 먹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불확실해 이름만 알려주고 갔던 펠루가 경에 처음 보는 마르마티 경까지.
순식간에 인원이 다 찬 것이다.
리티아가 억지로 더 권한 게 아닌데도.
물론 결정권은 여전히 리티아에게 있었지만 신관의 말로는 셋이 먼저 아침에 찾아와 리티아의 테메스가 되고 싶다며 부탁을 했다고 말했다.
겉은 차분했지만 속으로는 말로 표현 못 할 기쁨을 느꼈다.
그런데 아까부터 곤도르가 리티아를 빤히 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어제 일 때문에 억지로 하겠다 한 건지는 몰라도 기쁜 기색은 절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 말하려는데 곤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공녀님께서 베푸신 축복 덕분에 에나의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아,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데 동생은 어디가 많이 아픈 건가요?”
그러다 곤도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원인은 모르는 병입니다. 신전에서 내주는 약을 먹으면 발작이 줄어들긴 하지만. 어쨌든 어제의 무례함은 용서해 주십시오.”
“사과는 어제 받은 걸로도 괜찮아요. 원인을 알 수 없다니…… 마음이 무거웠을 텐데 이런 결정까지 해주어 고마워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세요. 곤도르 경뿐만 아니라 두 분도요.”
그러자 리티아를 앞에 두고 세 명의 기사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놀란 얼굴로 리티아를 빤히 보기도 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야…….”
마르마티가 입을 여는데 펠루가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야?”
“큼, 그야. 소문하고 많이 다르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테니아의 유력한 후보 되시는 분께서 테메스에게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도 처음일걸요.”
“그야 제 필요에 의해서 모이신 분들이니까요. 앞으로 저를 지켜주실 분들인데 서로가 필요하면 좋잖아요.”
그 말에 셋의 표정은 더욱 이상해졌다.
리티아는 어색해 하고 있는 셋에게 차례대로 악수를 청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리티아가 내민 하얀 손을 보던 기사 중 곤도르가 먼저 손을 뻗었다.
짧게 악수를 하고 펠루가, 마르마티까지 차례대로 악수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잘 부탁할게요, 몬트 공녀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남들이 먼저 지나간 시작선에 선 기분이 들었다.
할 수 있겠지, 잘할 수 있을 거다. 그러라고 기회가 주어진 거니까.
어쩐지 좋은 시작이 될 것 같았다.
Chapter3. 그를 맞닥뜨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