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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29화 (29/70)

29화

* * *

‘이건 너무 당황스러운데.’

“전하 탓이 아닙니다. 화도 전혀 안 났어요. 이제 몸도 정말 괜찮습니다.”

친밀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격식을 갖추어 거리를 좀 둘 줄 알았는데 그건 리티아의 오산이었다.

절친이다 못해 까딱하면 연인 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정도의 친절이다. 오면서 머릿속에서 미리 해두었던 예법 연습을 쉼 없이 했는데도 당황스러웠다.

가까스로 몸을 뗀 황태자가 픽 웃었다.

“격식 차리는 건 정말 여전하네. 정말 몸 괜찮은 거 맞아? 봉사를 다닌다는 소식도 들었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이제 많이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금방 나았어요. 그간 잘 지내셨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알고 있다. 그가 황태자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리티아는 딱 금을 그어두고 대하고 있었다는 걸.

그녀의 마음까지는 모르더라도 차기 황제가 될 사람에게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 같기도 했다.

“잘 지냈을 리가. 둘이 있을 땐 그렇게 말 편하게 하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보는 눈이 많은걸요.”

그러자 황태자는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못 말린다는 얼굴을 했다.

이시안 비아에르티모 아고스.

원작에서 묘사하길 역대 황족 중 황족의 상징인 금발과 금안을 모두 타고난 유일한 황족이라고 일컬었다.

거기다 빼어난 외모로 손에 꼽히는 미남이라 그러더니 정말 그 말이 딱 맞았다. 온통 밝은색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도드라진 콧대가 눈에 띄었다. 왼쪽 눈매 아래 살짝 보이는 눈물점도.

냉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인상에 어지간해서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친절까지 겸했다고 하니 인기가 좋을 수밖에.

그가 화를 어떤 식으로 화를 냈는지는 모르지만 로아 캐번디시를 포함한 영애들이 왜 그렇게도 견제를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얼굴이었다.

얼굴만 보고 있자면 칼리프와는 전혀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왜 그 남자가 떠오른담.’

리티아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칼리프의 얼굴을 얼른 떨쳐내려 노력했다.

“고집은. 그래도 괜찮다니 다행이다. 몇 번이고 공작저에 갔었는데 너를 볼 수가 없었어. 가자, 네가 좋아하는 것들을 준비해 두었어.”

“고마워요.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고 찾아뵀어야 했는데.”

“또. 또 그런다.”

웃으며 이시안이 안내하는 대로 드레스를 쥐고 걸으려는데 순간 드레스 사이로 손가락이 쑥 들어갔다.

응? 리티아가 멈칫했다.

분명히 고양이가 찢어놓은 드레스 대신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었는데.

마지막에 뛰어올라 치장을 방해하길래 그대로 안고 침실로 갔었는데 그사이 드레스에 구멍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아니 대체 언제? 하지만 생각해 보니 딱 그 부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야무지게도 구멍을 내놓았다.

“하…….”

이 망할 고양이. 얼굴만 귀엽고 하는 짓은 완전 난봉꾼이었다. 다른 드레스를 준비하겠다는 하녀의 말에 괜찮다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더 늦을까 봐 그냥 입었더니만.

“왜? 몸이 안 좋은 것 같아?”

이시안이 걸음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티아에게 물었다.

리티아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이제와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제 주변에 새카만 것들은 다 저를 괴롭히는 것 같지. 새카만 털이 꼭 칼리프를 떠올리게 하더니 하는 짓마저 비슷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손가락 하나, 두 개 들어갈 정도의 크기라 리티아는 구멍 난 부분을 그러쥐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 *

“요즘 정말 바쁘게 다니더라.”

“저요? 한 건 별로 없는데…….”

“그럴 리가. 테니아 그 자체라고 소문이 났던걸.”

쌉싸래한 홍차 향이 감돌았다. 괜히 이시안의 말이 과장처럼 느껴져 리티아가 빙긋 웃었다.

“설마요. 사실 바쁘실 것 같아 만남을 못 할 줄 알았어요.”

“요즘 주변이 좀 어수선하긴 하지? 그래도 너와 만나는 시간은 언제라도 낼 수 있어. 또 그렇게 말하면 부담스럽다고 잔소리하겠지?”

“제가 어찌.”

“아니야. 그냥 잔소리가 낫겠어.”

이시안이 말을 막는 바람에 리티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좀 씁쓸했다. 홍차를 마셔서 그런가 싶다가도 이시안이 이렇게 따뜻하고 친밀하게 대하니 괜히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이시안은 체리 하나가 올라간 가토 쇼콜라를 리티아 쪽으로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분위기는 어색하고, 정적이 싫어 리티아는 일부러라도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온전히 즐기지는 못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시안의 시선에 케이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결국 리티아가 마지못해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이시안이 화들짝 놀랐다.

“응? 아니. 그냥…… 뭐랄까. 너무 오랜만에 본 것 같아서.”

“아…… 그렇죠.”

다시 리티아가 시선을 내리는데 여전히 이시안의 시선이 꽂혀 있었다. 누가 봐도 할 말이 있는 모양새여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편히 하셔도 돼요.”

“그냥……. 내가 이런 말을 네게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

“네가 정말 원해서 마음을 바꾼 것 맞지?”

“테니아가 되는 것이요?”

“……그래. 늘 부담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어. 말해주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거든.”

리티아가 잠시 머뭇거렸다.

부담, 이시안이 정확하게 봤다. 그 부담 때문에, 또 괴롭힘 때문에 이 사달이 났으니.

“제가 원해서 마음을 바꾼 게 맞아요. 숨는다고 능사가 아닌 것 같아서. 막상 마음을 단단히 먹으니 또 어렵지 않더라고요. 음 그러니까…….”

“…….”

“제가 원해서 하는 게 맞아요, 전하.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살짝 선을 긋듯 리티아가 말하자 이시안이 잠시 침묵했다.

이내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안심이지.”

“그런데 일정이 모두 멈춰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전하께서도 그 때문에 바쁘시죠?”

“아, 그거. 아마 곧 해결이 될 거야. 균열도 거의 없앴으니 조만간 다시 재개될 거고.”

“다행이네요.”

“테니아를 뽑으라고 신탁이 내려온 이상 더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찾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네게도 곧 연락이 가도록 할 테지만. 그래도 기념제가 중단되어서 솔직히 너는 좋아할 줄 알았는데.”

“네?”

“연회……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이시안이 씩 웃었다.

“뭐, 그건…… 그렇지만.”

리티아도 부정은 못 했다.

앞뒤로 한달 동안 축제를 열 듯 연회를 여는 게 이해조차 안 갔기 때문에.

이시안의 말로는 적어도 일주일 내로 대신전에서 말이 나올 것 같다고 넌지시 소식을 전해주었다.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누구보다 믿음직하겠지.

일주일. 말이 일주일이지 정말 곧처럼 느껴졌다.

* * *

황태자와의 만남 이후, 그에게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이제 외출에는 조금도 제재도 없고 번거로움이 없어 문제는 없었지만 어쨌든 중요한 일정이 막혀 버린 리티아는 황실과 신전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은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리티아는 신전으로 가 신전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정화와 축복을 내려주며 성력을 쓰는 법을 연습했다.

시도 때도 없이 고통과 열을 주던 각인 문양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는지 더 이상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평소에는 흔적도 없이 말끔하다가도 성력을 많이 쓰고 오는 날이면 희미하게 열이 달아오르며 빛이 올라오곤 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멋대로 문양이 드러나는 일은 없어서 성력을 많이 쓴다 싶을 땐 무조건 어깨부터 사수했다.

그 후로 며칠이 더 지나고 그사이 균열이 두 곳이나 더 나타났지만, 다행히 튀어나온 마물들은 빠르게 처리되어 이동에 문제가 없을 정도라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지역 외에 다른 지역에도 균열이 열리는 일이 갑자기 잦아지면서 안전을 위한 정비를 하고 있었다.

에밀리아 말대로 예전에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했지만 알아보니 이는 꽤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약 5, 6년에 한 번쯤 일어나고 있었다. 그저 땅 위에 쌓이고 쌓인 마력이 만연하게 퍼져 대대적인 정화가 필요한 시점이 온 것뿐이었다.

그때마다 오브와 손을 잡고 해결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견이 갈리는 듯했다. 정말 필요에 의해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오브가 가진 어둠의 힘 때문에 일어났다고 판단해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일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다 이시안이 말한 것처럼 정확히 일주일이 되던 날.

대신전에서 호출이 왔다.

* * *

성하의 부름에 리티아는 아침부터 대신전으로 향했다.

“이틀 전까지도 주인님께서 공녀님께 아무 말씀도 안 하셨잖아요. 정말 황태자 전하 말씀이 맞았나 봐요.”

“그러게. 그사이에 뭐라도 결정이 났나 봐.”

더 늦출 수도 없을 거라고 하더니. 이시안의 말이 맞았다.

신전 대회의실.

아직 대신관이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테니아 후보 다섯이 모두 모였다.

로아 캐번디시, 지밀 로베르, 유디트 사보이아, 미젤라 플란트 그리고 리티아 에울루니에 벨루스 몬트.

여기서 리티아만 철저하게 격리된 것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다.

이윽고 대신관과 함께 사제들이 뒤를 따라 우르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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