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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37화 (37/70)

37화

* * *

리티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밖으로 나가 제 짐 가방을 받았다.

정말 필요한 것만 딱딱 챙겼고 그 외에는 신전에서 모든 지원을 받다 보니 가져온 건 커다란 가방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신관들이 가져다줘 하녀가 없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시련을 겪는 게 맞나.’

다행히 제 방으로 도망친 로아와 지밀은 점심 식사가 시작될 때까지 다시 리티아의 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행여 책상에다가 뭘 놓고 갔나 의심스러웠지만 그녀의 말대로 정말 다른가 보기만 한 건지 깨끗했다. 하지만 이렇게 멋대로 들어오는 걸 보니 다른 건 몰라도 방을 비울 때마다 잠금장치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여기서부터는 항시 테메스와 함께하셔야 합니다.”

“네, 유념할게요.”

신전에서 제공해 준 점심 식사를 한 이후에는 지체하지 않고 외부로 향했다. 여기서 해가 떨어지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파비 마을 구역이 워낙 넓은 상태라 여기서도 다섯 명이 구역을 모두 나누어 흩어졌다. 사흘 안에 문제없이 더는 균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화를 끝내야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파비 마을을 기점으로 로아 캐번디시는 파비 마을 안으로, 자밀은 동쪽을, 유디트는 서쪽을, 미젤라가 남쪽 그리고 리티아가 북쪽 방향을 맡았다.

‘그런데 분명 여기서 합류한다고 들었는데.’

리티아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아직 오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더 늦으려나.

그러다 스스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아차 하고 들었다.

오히려 칼리프가 나타나지 않아야 마음이 편한 건데 대체 왜?

리티아는 서둘러 생각을 떨쳐 버렸다.

“환경이 좀 열악하지요.”

리티아의 옆으로 점심 식사 때 자신을 제이드 신관이라고 소개했던 사제가 다가왔다. 밀빛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기지 않고 가지런히 뒤로 넘긴 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마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상처가 있었다.

“저 구덩이들은 마수들이 해놓은 건가요?”

리티아가 처참하게 여기저기 파헤쳐진 농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정화를 위해 파놓은 것으로 정화가 모두 끝나고 나면 다시 덮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큰 균열을 없앤 이후 현재 농장과 숲 위주로 작은 균열들이 시시때때로 나타나고 있어 농작물을 전혀 관리할 수 없는 상탭니다. 생각보다 오염도가 깊어 일시적인 정화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서요. 모두가 신전을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파비 신전의 제이드 신관은 여기저기 망가진 농작물에 엉망으로 구덩이를 파놓은 것 같은 농장을 보며 울적하게 설명했다. 실제로 온갖 고생을 한 모양인지 유난히 볼이 홀쭉하고 눈 밑이 퀭했다.

이 근처에서 신전은 이곳 하나라 다른 지역 신전의 도움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덩이를 파놓은 것은 들짐승이나 마수가 벌인 일이 아니라 신관과 성기사들이 스스로 해놓은 것이라고 했다. 겉으로 오염된 부분을 정화하고 나서도 균열이 생기면 그보다 더 깊은 곳까지 마수의 기운이 스며들어 그 안까지 정화를 해야 한다. 그러러면 아주 강한 성력으로 바닥까지 정화하거나 아니면 땅을 파 오염된 부분만을 따로 또 정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이드 신관이 홀쭉한 것은 성력을 다 썼다기보다 땅을 파는 데 온 체력을 소모했을 가능성이 컸다.

“마수 외에도 해가 떨어지면 들짐승도 자주 나타나니 그 전에는 꼭 일정을 마무리하시고 다음 날 재개하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들짐승조차도 마수들을 피해 마을로 내려오거든요.”

“아…….”

“무엇보다 안전을 위해서요. 그래도 이전까지는 꽤 평화로웠는데.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도 정화를 하는 일에 있는 힘껏 힘쓰겠습니다. 생소한 것이 있으시면 제게 뭐든 물어보시면 됩니다. 지금 테니아이신 아그네스 님께서도 이곳을 거쳐 가셨지요.”

“아…… 네.”

리티아는 신관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다시금 살폈다.

마음에도 없는데 완벽히 성녀인 척 굴어야 하는 건 조금 답답하지만 성력을 써 정화만 하면 된다고 하니 오히려 몬트 공작의 비위를 맞추는 일보다 쉬워 보였다.

테니아의 축복을 받은 이후 바로 마차를 올라타서 온 것이라 연습도 못 했다. 대놓고 테니아 후보인데 테메스 앞에서 연습을 하는 게 우스워서. 조금 걱정이 됐지만 여차하면 아프다고 꾀병이라도 부리기로 했다.

“그럼 지금부터 해볼게요.”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오염된 땅을 확인하는 건 쉬웠다. 눈으로만 봐도 평범한 땅이 아닌 회색빛으로 물든 마른 땅이었다. 버석버석해 발로 차면 먼지가 일 것 같은데 또 막상 발을 가져다 대면 단단한 돌덩이 같은 땅이 되어 있었다.

‘균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고개를 드니 곤도르와 펠루가, 마르마티 그리고 다른 성기사 둘, 신관 둘은 벌써부터 오염된 땅 위에 서서 정화에 힘쓰기 시작했다.

안 되진 않겠지. 리티아가 침을 꿀꺽 삼킨 채 늘 연습하던 대로 힘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느껴지는 느낌에 리티아가 조금 더 자신을 붙여 성력을 끌어냈다.

쿠웅-! 쏴아-

순식간에 빠져나간 성력이 오염된 땅에 잔 지진을 일으키며 깊은 바닥까지 쑥 뚫고 들어갔다. 리티아의 사방으로 50m 가량 되는 범위가 그야말로 새하얗게 물들었다.

“어, 어?”

리티아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화들짝 바닥을 가리키고 있던 손을 걷어냈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닌데?

어정쩡하게 선 채 제 손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리티아가 천천히 고개를 드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리티아에게 향해 있었다. 동생과 있을 때가 아니라면 별로 놀라는 법도 없는 곤도르까지 평소보다 눈이 커진 상태였다.

리티아의 얼굴이 금방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이게.”

당황하는 사이 리티아의 성력이 맞닿은 땅은 정화가 되다 못해 금방이라도 싹이 틀 것처럼 회복되어 있었다. 꽤 넓은 범위라 다른 기사들이 서 있는 땅 위도 정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순간적으로 성력을 뽑아냈는데도 불구하고 어깨 각인조차도 뜨거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공녀님, 방금…….”

“공녀님 정화를 위해 땅을 깡그리 태울 작정이셨군요. 눈멀어버리는 줄.”

펠루가와 마르마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쌍둥이처럼 동시에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아, 어, 그러니까 이게 깊이 어디까지 오염이 됐나 구,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제가 이런 정화를 처음 해봐서요.”

“그렇게 안 봤는데, 조심스러운 언행과 다르게 행동에는 호방하신 면이 있으시네요. 제 걱정이 무색할 정도네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제이드는 아예 박수까지 치며 리티아의 성력에 감탄했다.

나오면서 간신히 인사만 나눈 다른 기사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대로면 두 번만 더 하면 다시 신전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는 둥, 공녀님만 믿겠다는 둥 처음으로 농담도 들려왔다.

리티아는 이마를 짚으며 부끄러운 얼굴을 가렸다.

“……적당히 할게요.”

“아닙니다. 다만 몸에 절대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만 부탁드립니다. 오염된 땅을 정화하자고 공녀님의 몸이 상해선 안 되니까요.”

“네, 조심하겠습니다…….”

리티아는 민망함에 뒤로 조금 더 물러났다.

그래도 테니아 후보라고 기사들의 세 배 정도 되는 가장 많은 할당량을 받았는데 다른 기사가 맡은 부분까지 다 해버리는 바람에 할 일이 없어졌다.

쭈뼛쭈뼛 뒤에 서서 제이드 신관이 하는 것을 보니 한 번에 바로 발밑의 사방 1m 정도 정화를 하는 것 같았다. 그마저도 한참 1분 정도 힘을 들여야 비로소 땅의 색이 돌아왔다.

리티아는 그 옆에서 제이드를 눈여겨보며 다시 정화를 시작했다.

* * *

리티아의 힘 조절 실패 덕분에 리티아의 일행은 두 시간 만에 하루 할당량을 모두 끝내고 돌아왔다.

“공녀님, 오늘 최고였습니다.”

“……하지 마세요.”

“내일도 또 광역 정화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럼 저희는 이틀 만에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결국 리티아가 팔꿈치로 펠루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리티아가 제게 장난을 치느라 양옆에 붙은 펠루가와 마르마티를 제치며 신전 안으로 들어오는데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어.”

단번에 한 사람이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칼리프와 다른 오브가 레페 신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멤버가 조금 바뀌었다. 흑갈색 머리의 남자가 빠지고 아테온 홀에서 봤던 녹색 머리의 여자가 합류한 모양이었다.

리티아의 숙소로 가려면 그들을 지나쳐야 하는 길이었다. 리티아는 아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표정을 관리한 채로 레페 신관에게만 짧게 목례를 하고 옆으로 지나갔다.

그렇게 칼리프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

칼리프의 손이 리티아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떨어졌다.

리티아가 서둘러 그 자리를 지나쳤다.

몇 걸음 더 떨어진 뒤에야 뒤를 슬쩍 보는데 칼리프는 이쪽을 보지도 않은 채였다. 고개를 다시 돌리는데 펠루가가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오브가 도착했나 봅니다.”

“그러게요.”

“솔직히 저희는 저들의 도움까지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균열 추적이 가능하다지만.”

Chapter5. 쉽지 않은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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