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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40화 (40/70)

40화

* * *

리티아가 기함하며 그를 밀어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새 작은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들키면 안 된다며.”

“방법 알고 있는 거 알아요. 늘 써먹었으면서.”

“……안 통하네.”

어지간한 마법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아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몬트 공작저를 그렇게 멋대로 쉽게 드나들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방에 경비가 몇인데.

“조금만 더 있다 갈게. 그건 괜찮지?”

“……조용히 한다면요.”

칼리프가 알았다며 순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티아는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칼리프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탓에 평소보다 시선이 거의 동등하다시피 했다.

홀린 듯이 손을 들어 그의 눈매 끝을 만지작거리는데 칼리프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조금의 요철도 없는 맑은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정돈된 것 같은 눈썹, 선이 또렷한 입술.

눈을 감고 있으니 그가 가진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져 순하게 보일 정도였다.

‘어째서 이 남자가 그 큰 전쟁을 일으키는 걸까.’

여전히 그 의문은 풀리지 않은 상태다.

지금으로 봐선 솔직히 말해 여기 있는 성기사나 테니아 후보들이 오브를 불쾌하게 여기는 데 비해 이 남자는 딱히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것 같은데. 친밀감도, 불쾌감도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도저히 왜 그토록 위험한 남자가 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그들의 수장이긴 하지만.

아닌가? 그저 자신의 기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칼리프.”

“음?”

칼리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새카만 눈동자가 오롯하게 리티아를 담았다.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칼리프는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해요?”

“너를?”

“아, 음 그러니까 테오스요.”

“글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리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게 생각까진 할 거 없고 그냥 궁금했어요.”

“그냥 별생각 없어. 또 궁금한 건?”

“더 없어요.”

“그럼 나도 물어봐도 되나?”

“뭐가 궁금해요?”

바로 질문을 할 줄 알았던 칼리프는 리티아를 한참 보기만 했다. 리티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제야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왜…….”

“응?”

칼리프가 말을 하다 말고 리티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왜 뭐?”

“아니야. 키스해도 되나?”

“……그거 물어보려고 뜸 들인 거예요?”

칼리프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리티아가 황당해서 그를 밀어냈다. 방금 무척이나 주저한 눈치여서 중요한 물음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속았다는 기분이 안 들 수 없었다.

“응?”

칼리프가 재차 묻는다.

“…….”

리티아가 마지못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리티아도 칼리프와의 입맞춤이 싫지 않았으니까.

입술이 닿은 건 바로 그다음이었다.

리티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의 입술이 이렇게 뜨거울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칼리프와의 입맞춤은 늘 감전을 당하는 느낌이다. 부드러운 입술이 문을 두드리듯 조심스럽게 맞닿고 아찔한 혀가 그 사이를 파고든다.

리티아가 짧게 휘청이며 칼리프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아슬아슬했다.

바깥에서 소음이 들릴 때마다 멈칫, 멈칫 입술을 뗐지만 한번 시작한 키스는 쉽사리 끝을 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새벽에 가겠다던 칼리프는 정말 사람들이 조용해질 시간에 돌아갔다.

* * *

파비 신전에 머문 지 3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가고 어제는 각자 배정받은 곳만 정화를 끝내고 난 뒤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 비교적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오늘.

일행 전부가 커다란 균열이 예정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제 다섯 명의 후보가 움직이는 사이 따로 파견을 나갔던 기사들이 상황을 수시로 확인하는 중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도착한 성기사들과 오브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마수를 해치웠다.

리티아가 도착했을 땐 검은 마수는 흔적도 없고 검은 피만 바닥에 흔적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 시작되고 있군요.”

“예상보다 균열이 훨씬 큰 것 같습니다.”

신관들과 기사들이 주변을 살피며 대화를 나눴다.

“너무 위험한 것 같아요.”

리티아의 뒤에서 미젤라가 중얼거렸다.

균열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면 균열이 열림과 동시에 빠져나오는 마수를 처리하고 벌어진 틈에 성력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그 타이밍을 위해 근처에 대기를 하는 중이었다.

거기다 테메스가 마수 사냥에 힘쓸 수 있도록 그들의 성력을 강화시켜 주는 일 또한 이들이 할 일이었다.

“마지막 관문이고, 이것만 버티면 앞으로 편해진다잖아요.”

“……하지만 이 중 하나만 그렇게 되는 거고요.”

“그렇다고 포기해요?”

“그럼 가문에서 쫓겨나고 말겠죠. 곧장 결혼하거나. 짜증 나……. 테니아가 되면 남편부터 바뀌는데.”

“균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기사 하나가 다 들리도록 크게 외쳤다.

리티아를 포함한 다섯 명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의 테메스에게 성력을 불어 넣었다.

빛의 힘을 가진 테오스 중에서도 차출된 도드라진 성력을 가진 다섯 명이라 순식간에 밝은 빛무리가 성기사들의 주변을 감쌌다.

새하얀 빛, 약간의 연두빛이 나는 빛, 흐릿한 흰색 빛 등 오묘한 빛깔의 성력이 성기사들에게 흡수되자마자 짐승의 아가리가 열리듯 균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최대로 벌어졌을 때를 준비하십시오!”

“네, 알겠어요. 다들 정신 바짝 차리죠!”

리티아를 괴롭히고 싶어 안달이 났던 로아도 이번에는 진지하게 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거대한 들짐승 같은 모습을 가진 마수가 균열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르릉. 크르……!

포효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마수 10마리가 동시에 연이어 튀어나와 성기사들을 덮쳤다.

당장 균열에 성력을 쏘아 넣을 준비를 하던 리티아가 멈칫했다.

가까운 곳에서 마수를 목격했다. 커다란 짐승을 본 것이라곤 어렸을 때 동물원에서 잠깐 봤던 우리 안의 맹수들 뿐인데 눈앞에서 그보다 더 큰, 거짓말 조금 보태 집채만 한 마수가 침을 뚝뚝 흘리며 리티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다 새빨간 핏빛 같은 붉은 눈은 그 공포심을 더욱 부추겼다.

‘징그러워!’

거기다 고무를 태우는 것 같은 악취까지.

곤도르와 펠루가가 순식간에 마수의 목을 치고 그 위에 검을 찍어 누르는 모습이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쿵!

육중한 무게를 가진 마수 두 마리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마르마티의 성력이 쓰러진 마수를 흔적 없이 불태웠다.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간 마수도 다른 기사들의 검에 의해 힘없이 쓸려 나갔다.

리티아는 그 사이에서 가까스로 널뛰는 심장을 모른 체 하며 점점 더 벌어지는 균열에 시선을 던졌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덜덜 떨리고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걸 겪으려고 살아남으려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임무를 저버릴 순 없었다.

“지금입니다!”

“지금이래요……!”

한번 열리기 시작한 균열은 마치 안에 새빨간 용암이 들끓는 것처럼 붉은빛을 뿜어냈다.

성인 둘이 세로로 누운 정도와 엇비슷한 길이의 균열이 뻐끔거리듯 벌어졌다.

다섯 명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타이밍을 조절했다. 동시에 강력한 빛이 균열 안으로 쏟아졌다.

치익! 치이익-

뜨거운 불에 그을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균열의 붉은빛이 점점 꺼져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성력을 쏟아붓자 차츰차츰 균열 깊숙이 들어간 힘이 마기를 불태우고 갈라진 균열이 점점 희미해졌다.

좌우로 벌어진 균열이 50cm 정도를 남겼을 때였다.

사라지는 균열에서 느닷없이 마수가 하나 더 튀어나왔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마수가 뒤늦게 튀어나온 것이다.

가장 강한 성력을 없애기 위해 마수가 균열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목표지는 리티아였다.

“몬트 공녀님!”

테메스가 그 근처에서 빠르게 리티아의 앞으로 뛰어들었지만 마수 몸체가 워낙 빨라 리티아조차도 미처 피하지 못할 정도의 거리였다.

간발의 차이로 곤도르의 검이 마수를 스쳤다.

키아악!

붉은 눈을 번뜩이며 마수가 리티아를 향해 발톱을 세웠다.

옆에선 찢어지는 비명이 들리고 리티아가 결국 다 피하지 못하고 팔로 얼굴과 몸을 가렸다.

그때 리티아의 뒤로 단단한 몸이 닿았다.

깜짝 놀라 리티아가 눈을 뜨는 순간 익숙한 체향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리티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주변에서도 지금과는 다른 소리로 놀라는 게 느껴졌다.

크르르륵!

코앞까지 온 마수가 리티아에게 닿기도 전에 검은 연기에 휩싸여 뒤로 쿵! 떨어져 나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수의 괴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그대로 마수를 삼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

리티아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대, 대체.”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곤도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대신 리티아는 뒤로 몸을 돌려 자신을 단단히 지탱한 남자를 올려다봤다.

‘……칼리프?’

대체 언제?

칼리프의 시선이 리티아를 향해 내리깔린 채였다.

“괜찮나.”

주변에서 리티아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마치 모두 멈춘 것처럼 그의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아……괜, 괜찮아요.”

“다행이야.”

그리고 칼리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리티아가 휘청이는데 가까이 다가온 곤도르와 바로 근처에 있던 유디트가 동시에 리티아를 붙잡았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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