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 *
유디트까지 자신을 도와줄 줄은 몰랐기에 리티아가 다소 놀란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도와주신 덕분에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요.”
“죄송합니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곤도르가 고개를 숙여 리티아에게 깍듯하게 사과를 해왔다.
금방 안정을 찾은 리티아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쏟아부은 성력이 제구실을 다해 균열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괜찮아요, 방금까지 마수를 상대하고 계셨잖아요. 제가 조금 더 떨어졌어야 하는 건데.”
“혹시 다친 곳은 없는지 신관께 살펴봐 달라고 하세요.”
유디트도 꽤 놀란 상태인지 로아와 함께 리티아를 경계하고 피하던 그녀도 한참이나 더 리티아를 살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이상하면 바로 말할게요.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어느새 칼리프는 근처에 없었다. 고맙다고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데 멀어져 버린 것이다. 알은체하지 말아 달라고 한 건 자신이었지만 미처 인사도 못 한 게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균열이 사라지고 남은 마수마저 처리하고 나니 주변은 언제 위험했냐는 듯 멀쩡해졌다. 회색빛이다 못해 거무죽죽했던 땅도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덩달아 신관들의 얼굴도 환해졌다. 기사들이 하나둘씩 검을 닦아 각자 제 검집에 넣었다.
“오브가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펠루가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 또한 이미 후방에서 다른 마수를 처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리티아가 위험했었단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계셨던 것 같아요. 감사하단 인사를 나중에 꼭 드려야겠어요. 펠루가 경께서 뒤에 마수도 처리해 주셨죠? 감사해요.”
그러자 펠루가가 목덜미를 문질렀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네, 정말 괜찮아요. 이제 마무리가 된 것 같은데. 곧 돌아갈 수 있을까요?”
“확인 작업만 끝나면 될 겁니다.”
꺼낸 말과 달리 칼리프는 리티아의 주변에 없었다. 리티아가 균열을 막으면서 계속 주변을 살펴봐서 알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금방 다가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신관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네, 펠루가 경.”
리티아는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계속 다른 오브가 칼리프에게 말을 걸어오고 리티아에게도 괜찮냐며 사람들이 물어오는 탓에 그곳을 철수하고 돌아갈 때까지도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노릴수록 서로의 거리가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 * *
커다란 균열을 몇 시간 만에 막고 돌아온 사람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오늘 저녁에는 홀에 빠짐없이 모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초입에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하나 해결했을 뿐인데도 저녁에는 연회와 비슷하게 준비하겠다고 제이드 신관은 신나서 말했다.
제이드가 과장하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오늘 가장 큰 균열을 막았으니 일정대로 내일 오후에는 여길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여유는 딱 오늘까지였다.
돌아온 네 명의 후보는 평소보다 훨씬 지친 상태였다. 균열을 빠르게 막느라 다들 쏟아부은 탓에 기진맥진해져 늘 바른 자세를 하고 있던 영애들도 다소 구부정하게 몸을 가누지 못했다.
신관이 서둘러 회복제를 챙겼지만 그걸 마신다고 오늘 쏟아낸 성력이 곧바로 단숨에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래선지 오늘따라 시비를 걸어오는 영애도 없었다.
테니아의 축복을 받아 본래 가지고 있던 성력보다 훨씬 더 많이 쓰게 된 로아조차도 아예 입을 꾹 닫고 회복하는 데만 힘을 쓰고 있었다.
다들 회복을 하러 방으로 들어간 사이 리티아는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돌아다녔다.
기다리면 그가 어련히 찾아올 거라는 걸 내심 확신하고 있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가 오길 기다리는 게 이상할 것 같아서 직접 찾아나선 것이다.
이번에는 고마움을 표할 핑계가 있으니 다른 사람 눈에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브들이 어디서 머무는지를 모르겠네.”
회의실로 통하는 복도에도 없고, 홀로 가는 복도에도 기사들과 신관들만 보였다.
성기사들과 똑같은 숙소를 쓰진 않을 테니 한 번도 가지 않은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서쪽 복도를 지나자마자 코너를 꺾는데 초록색 머리를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타냐 하디였었나.
“저기.”
“…….”
“…….”
리티아가 조금 서둘러 그녀 앞에 다가갔다. 타냐 하디의 앞에는 이든 노크라 불렸던 남자가 있었다.
리티아가 타냐를 불렀을 땐 앞선 노크가 보이지 않았던 터라 둘의 시선이 대번에 리티아에게 꽂혔다.
“무슨 일이시죠.”
타냐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경계하는 시선이었다.
“실례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칼리프, 아…… 데모드 님이 어디 계신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동시에 타냐가 이든과 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금 이곳에 안 계십니다. 왜 찾으시죠.”
“그렇군요. 아까 너무 정신이 없어서 구해주셨는데 감사 인사를 못 드려서요. 그리고 두 분께도 감사드려요. 균열을 탐지해 주신 덕분에 쉽게 일이 끝났네요. 감사합니다.”
리티아는 괜히 말을 더 덧붙였다. 그냥 찾는다고 말하면 되는데 분위기가 마치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든과 타냐는 그런 리티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말 그대로 뚫어져라 쳐다봐 리티아는 피부가 다 따끔따끔했다.
“협정에 의한 행동이지 감사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신 말씀은 데모드 님께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직접 만나서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적대적인 시선도 그렇고 저렇게 딱 잘라 말하니 오면 말해달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티아는 아쉽지만 그래도 인사는 전달했으니 다음에 한 번 더 말하자고 마음먹었다.
“네, 고마워요.”
리티아는 하는 수 없이 짧게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았다.
칼리프만 분위기가 대단한 줄 알았더니 두 사람도 가까이 있으니 기세가 너무 강하게 느껴졌다.
“휴우.”
더 있다간 긴장해서 뭘 못 하겠네.
다시 돌아온 복도를 걷는 중에도 뒤에서 뚫어질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 * *
간단하게 홀에서 점심을 챙기고 저녁까지는 온전하게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때까지도 칼리프는 보지 못했다.
리티아는 남은 시간을 이용해 후원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미처 구경하지 못한 신전 반대편까지 구경을 했다. 그런 후 방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저녁이 되어서야 중앙 홀로 향했다.
“공녀님.”
“마르마티 경.”
뒤에서 마르마티와 곤도르, 펠루가가 다가왔다. 마르마티가 리티아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타이밍이 딱 맞았네요. 아직 안 오셨으면 바로 모시러 갈 참이었습니다.”
“때맞춰 오길 잘했네요. 경들이 고생하지 않아도 되어서요.”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는데요.”
능글맞게 대꾸한 펠루가가 리티아의 뒤에 펼쳐진 저녁 홀 풍경을 쳐다봤다.
“뭐야, 의자 다 어디 갔나.”
“연회를 열겠다고 하더니 가운데 음식을 놓을 참인가 본데요.”
“왜 신관이 더 신났나 몰라. 고생시켜 놓고 앉지도 말라니 너무하는군요.”
저녁 홀은 펠루가의 말대로 의자가 모두 빠진 상태였다.
둥근 식탁으로 바뀌고 그 위에 온갖 음식들이 가득 준비되고 있었다.
신전의 초는 모두 가져온 모양인지 주변에 초가 가득했다.
연주가 대신 커다란 오르골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분위기 좋네요.”
“애쓰긴 한 것 같습니다. 이런 작은 신전에서 연회라니.”
“몸은 좀 괜찮으신 겁니까? 회복제가 더 필요하지 않으시다고 하셨다는데.”
“네, 더 필요하신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잠깐 놀란 거지 마수가 저를 건들지도 못했는데요.”
리티아가 보라며 상처 하나 안 난 얼굴이며 팔을 보여주었다. 회복제가 필요하지 않았던 건 곤도르가 주고 갔던 회복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후보들에게는 꽤 아낌없이 주는 편이었지만 오히려 기사들에게는 할당량이 정해져 있을 만큼 수를 조절하는 걸 알고 있다.
처음에 다른 신관이 너무 많이 가져와 나눠준 것뿐 원래는 무한정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페 신관과 오브들만 오면 다 모이겠네요.”
“그놈들이 오기나 할까.”
“저녁 식사도 참석하는데 당연히 오겠지.”
펠루가와 마르마티가 짧게 대화를 나누자마자 레페 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충분히 휴식은 취하셨는지요.”
리티아와 세 명의 테메스가 똑같이 짧게 목례를 했다.
다시 고개를 드는데 레페 신관의 뒤편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다섯 명이 눈에 띄었다.
“공녀님, 들어가시죠.”
그사이 레페 신관이 홀 안으로 들어가고 뒤늦게 펠루가가 리티아의 어깨를 콕콕 건드렸다.
“아, 경. 네, 지금 들어가죠.”
리티아는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본 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넉넉히 준비했으니 부족함 없이 즐기시길 바랍니다. 물론 내일 원정을 위해서 죽을 만큼 드시는 건 삼가시고요.”
제이드는 역시나 이곳에서 가장 흥에 겨운 사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신이 난 상태였다.
포도주가 찰랑이는 포도주 잔을 들어 사람들의 호응을 높였다.
다소 정적인 편인 신전에서 이런 연회라니 조금은 이질적이었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뒤로는 칼리프의 일행들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 칼리프만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네 명의 입이 연신 움직였다.
보면 다시 인사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들에게 다가가기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리티아는 샴페인을 입에 머금는 척 슬쩍 눈길만 향했다.
그러다 딱 칼리프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