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42화 (42/70)

42화

* * *

순간 칼리프의 시선이 곧장 다른 곳으로 향했다.

리티아가 미처 눈짓도 하지 못할 정도의 찰나였다.

‘마주친 게 아니었나.’

“공녀님.”

그때 다른 테메스가 리티아에게 다가왔다. 리티아도 마주한 적 있던 얼굴이다. 워낙 눈에 띄는 금발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내내 알고 있는 얼굴이긴 했지만 내심 반갑지는 않은. 아로였다.

“네?”

“저는 아로라고 합니다. 저번에 한번 짧게 인사를 드렸었는데 기억나십니까?”

아로가 제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리티아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네, 기억나요.”

“영광입니다. 첫날부터 활약이 대단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아로는 리티아에게 제법 친근하게 굴어댔다. 어디서 쏘아보는 것 같은 눈길에 리티아가 살짝 고개를 돌리자 로아가 포도주 잔을 들고 이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곤하게 생겼네.’

테니아의 가호를 받아 다들 성력이 비이상적으로 높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평소 로아가 가지고 있는 성력은 형편없어서 지금도 무척이나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 정화를 할 때도 흐릿하게 보였던 빛이 로아의 것이었다. 물론 후보를 제외하면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다섯 명의 성력을 재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로아는 무리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격이지만 성력으로만 따지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정도라 이런 식으로 엮이면 더 피곤해질 뿐이다.

“딱히 그렇진 않았는데요.”

“광역 정화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테니아 님 가호를 받은 상태라지만 그럼에도 대단하시다고 생각합니다.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게 정말 아쉽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마르마티가 끼어들었다.

“야, 아로. 그런 말은 네가 모시는 분한테나 가서 하지 그러냐. 왜 우리 공녀님한테 그러는지?”

싱글벙글 웃는 낯이었지만 평소답지 않게 말투가 날카로웠다.

“사실을 말씀드리는 게 굳이 막을 필요가 있나? 광역 정화를 한 번에 성공시키신 것 때문에 기사들 사이에서도 꽤 말 나오는 중인데.”

그것까진 몰랐다. 솔직히 조금 신경을 쓰면 다른 후보들도 가능할 거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걸 왜 우리 공녀님한테 말하냐는 거지.”

아로 또한 마르마티와 마주 선 채 미소로 대꾸했다. 약간의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아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려면 아까 마수가 뛰어올랐을 때 공녀님을 제대로 보호해야 맞지 않나. 오브가 없었으면 공녀님이 어떻게 되셨을 것 같은데.”

어느새 리티아는 빠지고 둘이 대화를 주로 이루고 있었다.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리티아는 슬쩍 빠져 펠루가와 곤도르 옆으로 가려고 했다.

“그건……!”

“거봐. 그러고도 할 말 있어? 테니아와 테메스는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는 존재고 팀이야. 역량이 맞지 않는데 그렇게 자신 있게 굴 수 있냐는 말이지. 애초에 테메스 후보에서도 떨어진 주제에.”

리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로 경.”

아로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예, 공녀님? 저를 부르셨는지요.”

리티아는 덩달아 자신을 쳐다보는 마르마티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두 분이 친하신 것 같아 끼어들고 싶진 않으나 무례를 저지르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마르마티 경과 펠루가 경, 곤도르 경은 모두 제가 먼저 부탁해 테메스가 되셨습니다. 오히려 저를 걱정하셨던 건 이 세 분들이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 누구보다 저를 멋지게 서포트 해주시고 계시고요. 아까 마수의 일은 본인인 제가 전혀 개의치 않으니 걱정은 그만해 주셔도 될 것 같아요.”

리티아는 최대한 예를 갖추며 아로에게 말했다.

아로가 민망함이라도 느꼈는지 귀 끝이 붉어졌다.

“큼,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신경 쓰이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친하신 두 분께서 응당 해결하실 일이나 제가 끼어들어 오히려 죄송하게 됐네요. 그래도 오해는 바로잡아야 할 것 같아서요.”

간신히 세 명과 친해져서 호흡을 맞추는 중인데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빈정을 상하게 만들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아로는 헛기침을 하며 짧게 인사 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아로가 가는 방향에 로아가 리티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피곤해.’

리티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또 하나의 시선이 느껴졌다. 바로 코앞에서 마르마티가 다소 울멍울멍한 눈으로 리티아를 보고 있었다.

리티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 마르마티 경, 왜 그렇게 쳐다봐요.”

“공녀님.”

“네, 네?”

“방금 저 지켜주신 겁니까?”

“네?”

“방금 공녀님께서 직접 부탁한 테메스라고 그려셨잖습니까.”

“네……. 그게 왜요? 사실이잖아요. 그리고 좀 아로 경이 먼저 무례하게 말씀하시기도 했고.”

“감동해서요. 저 되게 생각해 주고 계셨구나…….”

“아니, 그, 그렇게까지는…….”

옆에서 보고 있던 펠루가가 마르마티의 뒤통수를 약하게 쳤다.

“공녀님 그만 곤란하게 해드려라 좀. 아로 놈 말대로 부끄럽게 굴지 말고.”

“아니, 감동한 걸 감동했다고 그러지 그럼 뭐라 그래? 안 그래요, 공녀님?”

“……네에. 마르마티 경의 말씀이 맞아요.”

“거봐!”

이번에는 펠루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솔직히 저 아로 녀석, 마음 좀 쓰릴 겁니다.”

“네?”

“저 녀석이 테메스 후보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좋은 놈이었으니까요. 물론 검술로 따지면 달라지겠지만 여러모로 테메스에 완벽하게 충족하는 녀석이거든요. 그 옆에 콜로스도 마찬가지고요. 성하께서 직접 공녀님을 언급하신 적이 있어서 당연히 공녀님과 테메스를 맺을 줄 알았을 겁니다.”

“아…… 거기까진 전혀 몰랐어요. 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서요. 그리고 제가 왔을 땐 이미 캐번디시 영애의 테메스가 되신 상태였고요. 그때 처음 뵀어요.”

“영애께서 가장 늦게 고르셨으니까요. 아마 가장 먼저 오셨다면 아로나 콜로스 둘 중 하나 이상은 공녀님의 테메스가 됐겠죠. 저흰 운이 좋았던 거고요.”

펠루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리티아가 정정했다.

“아뇨, 저는 처음부터 저분들을 고를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예?”

“곤도로 경은 아실걸요. 저는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레페 신관님께 제가 따로 다른 기사분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드렸고 그로 인해서 곤도르 경을 좀 곤란하게 했는데…….”

리티아가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곤도르를 쳐다봤다.

곤도르가 헛기침을 하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펠루가와 마르마티의 시선이 곤도르에게 꽂혔다.

“그땐 공녀님뿐만 아니라 그 누가 와도 거절했을 겁니다.”

“……그럼 그때 거절했다는 말이 사실이었냐……? 신관께서 내 이름을 말씀하시길래 네가 추천한 줄 알았는데?”

그날의 일을 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펠루가와 마르마티는 처음 듣는 것처럼 경악했다.

곤도르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티아가 손을 저었다.

“어쨌든 지금은 잘됐잖아요. 저는 세 분이 저와 가장 잘 맞다고 생각해요. 제 결정이 무엇보다 최고였다고 생각하고요.”

“아, 거봐. 공녀님 우리 되게 좋아하신다니까. 후보까지 다 버리고 우리 택했다잖아.”

“처음엔 괴짜라며.”

“닥쳐.”

어느새 아로의 존재는 다 잊은 듯 둘이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리티아는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하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리티아의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동시에 곤도르, 펠루가, 마르마티 모두 표정을 싹 굳히고 리티아를 그들 쪽으로 가리며 가까이 온 존재를 경계했다.

리티아가 뒤늦게 몸을 돌렸다. 칼리프가 다가온 것이다.

리티아도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는데 오브가 테니아 후보에게 가까이 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주변이 시선이 몰려들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 사이로 칼리프만이 여유로운 미소를 띄웠다.

“아까.”

“……?”

리티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서?

“나를 찾았다던데.”

그 말에 리티아가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이내 빠르게 자신을 보호하듯 막은 펠루가와 마르마티의 팔을 잡았다.

“아, 제가 아까 저분을 찾았어요.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요. 못 찾고 되돌아왔는데.”

“그러셨습니까?”

“네, 제가 먼저, 찾은 게 맞아요.”

당황으로 리티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지만 이번에는 정말 핑계가 있었다.

그러자 펠루가와 마르마티가 살짝 몸을 비켜섰다.

리티아가 머뭇거리며 칼리프 앞에 한 걸음 다가섰다.

“아까 정말 감사했어요. 그 말씀 드리려고 아까 낮에 찾았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그러셨습니까? 감사 인사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 헛걸음을 하게 해드렸군요.”

그가 평소와 달리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리티아에게 친절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어…….”

뭐라고 하지. 고맙다는 인사는 다 했는데 긴장이 돼서 그런지 할 말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기다 어느새 또 시선이 리티아에게 모두 꽂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홀에 들어설 때마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 향해서 부담스러운데 이런 시선은 정말 즐기고 싶지 않았다.

“테니아 후보라고 하셨지요.”

“네? 네.”

“오늘 일어난 균열에 대해 의견을 묻고 싶은데 지금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 시간을요?”

펠루가가 리티아의 앞을 막았다.

“협정 중이기는 하나 공식적인 자리 외에는 삼가주시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