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 *
칼리프가 눈썹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리티아도 여기서 펠루가가 또 막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다소 놀란 상태였다.
리티아야 관계를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지만 합류 중에도 따로 만나면 안 되는지 몰랐다. 지금껏 그래서 오브들은 따로 무리를 지어 다녔던 건가 싶기도 했다.
“누가 보면 우리가 테니아 후보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서 저희는 공녀님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쪽들 또한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레페 신관과 관련한 대화가 다 끝난 상태라 공녀께도 물어보는 겁니다. 믿지 못하겠다면 가서 물어보든지.”
그 사이를 리티아가 가까스로 끼어들었다.
“레페 신관께서 말씀하신 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펠루가 경. 저도 균열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괜찮습니다.”
“공녀님, 아무리 그래도 이자와 대면은 안 하시는 편이.”
펠루가가 리티아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경고를 했다.
리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가까운 데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할게요.”
그러자 펠루가가 마지못해 뒤로 물러났다.
“공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희는 여기서 있겠습니다. 너무 멀리 가진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앞에서 이야기를 나눌게요.”
리티아는 칼리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뒤에 따라붙었지만 리티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칼리프를 따라나섰다.
연회 홀에서 복도를 나와 기둥을 돌자마자 리티아가 숨을 토해내듯 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문이 닫힌 걸 알면서도 리티아가 뒤로 고개를 힐끔 돌렸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칼리프가 주먹을 말아 쥔 채로 웃고 있었다.
리티아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주먹으로 그의 팔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이, 일부러 그런 거죠.”
“뭐가?”
“일부러 온 거잖아요. 아까 다른 분께 이미 말씀드렸는데.”
“날 찾았다기에 온 건데. 억울해.”
그가 진짜 억울하다는 듯이 실망한 얼굴을 했다. 리티아에게는 별로 통하진 않았지만.
“네가 먼저 나서서 찾은 건 처음이잖아.”
“그건 저번에도…….”
“단지 곤란에서 벗어나려고 찾은 거 말고.”
“아…….”
그렇지. 단순한 이유로 찾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
“그러네요. 그냥 아까 고마워서요. 나 때문에 혹시 다쳤는지 몰라서요.”
“안 다쳤어. 보여줄까?”
“뭘 보여줘요?”
“다친 곳이 없는지?”
“……아, 안 봐도 돼요.”
“아쉽네.”
리티아는 눈을 흘겼다. 그래도 그의 장난을 보고 있으니 정말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목표대로 그에게 고맙다는 말도 전했고.
“근데 균열에 대해 말할 거 있다고 했잖아요.”
“그랬나?”
“…….”
“매번 구해주면 앞으로도 이렇게 볼 수 있겠네.”
“계속 이렇게 따로 보면 또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다음에는 그 자리에서 말할 거예요.”
칼리프가 리티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웃었다.
“왜, 더없이 좋은 기횐데.”
“지금도 충분……히 위험하니까요.”
이 핑계가 없었다면 감히 엄두나 내볼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지금도 테메스에게 말을 하고 나오지 않았다면 온갖 소문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리티아가 칼리프를 빤히 보다 화제를 돌렸다.
“아깐 어디 다녀왔던 건 중요한 일이었어요? 신전에 아예 없다고 들었는데.”
“별거 아니었어. 음, 내일도 잠깐 자리에 없을 수도 있어.”
“네, 어…… 찾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네가 다른 지역에 도착해서 있을 때쯤엔 갈 거야.”
리티아가 여전히 닫힌 문 쪽을 힐끔 보며 끄덕였다.
“말했으니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직 감사 인사 안 받았는데.”
“방금 했잖아요, 고맙다고.”
그러자 칼리프가 기둥을 완전히 등지고 서게끔 리티아를 좀 더 당겼다. 완벽하게 홀 입구가 가려졌다.
“나는 더 받고 싶은데.”
“…….”
칼리프가 기둥에 등을 맞대고 선 리티아의 입술을 가볍게 매만졌다.
리티아가 짧게 입술을 짓씹었다. 이내 발꿈치를 들어 칼리프의 입술에 아주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더는 안 돼요.”
리티아의 단호한 말에 칼리프의 웃음이 바람처럼 흩어졌다.
“네, 공녀님.”
칼리프가 아까 그랬듯 연극을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예의를 갖췄다. 리티아는 그런 그를 밀어내며 다시 복도로 나왔다.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겉으로 보기는 멀쩡해 보였다.
리티아가 칼리프를 슬쩍 밀자 칼리프가 끄덕이며 먼저 연회장 문을 열었다.
리티아가 먼저 들어와 칼리프에게 보란 듯이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곧장 아까 테메스가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공녀님, 이야기는 나누셨습니까?”
“네? 아, 어려운 건 아니었어요.”
“무례하게 굴진 않았습니까?”
곤도르의 시선이 어느새 원래 자리로 돌아간 칼리프에게 향해 있었다. 다른 두 명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오브와 합류할 때의 그 경계를 가진 눈 그대로였다.
“네, 전혀요. 간단하게 물어만 보시더니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무슨 생각을 가진 자들인지 모르니 다음에는 저희도 동행하겠습니다.”
리티아가 웃으며 마지못해 끄덕였다. 여기서 아니라고 더 말해봤자 이상하게 보일 뿐일 테니까.
다행히 나갔다 온 이점도 있었다. 찢어질 듯이 노려보던 로아의 시선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로를 불러서 그가 온 것도 아닌데 왜 저를 째려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또 온갖 트집을 잡으러 오겠다 싶었다. 예전처럼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거나 하진 않지만 피곤한 존재인 건 여전했다.
그 뒤로는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테메스, 기사, 후보들 할 것 없이 반쯤 취해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신관과 오브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종종 목격했지만 연회가 끝날 때쯤에는 거의 시선도 주지 않을 정도였다.
파비 신전에서의 마지막 날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빠뜨린 짐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십시오!”
“회복제와 치료 물품 리스트 좀 주십시오!”
아침부터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짐꾼을 따로 고용했으나 최소한의 인원이라 기사들도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다섯 명의 후보라고 편히 쉬는 건 아니었다.
테니아의 후보들이 오늘 떠난다는 건 마을 사람들도 다 알고 있기에 한 번이라도 더 축복을 받아보고자 사람들이 신전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짐을 꾸리고 오후에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 다섯 명의 후보들은 신전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축복과 정화를 나누어주느라 온통 신경을 쏟아부어야 했다.
“여기 더 계시면 안 돼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에게 축복을 내리는데 대뜸 리티아에게 아이가 물었다.
“여기에?”
“네! 매일 계셨으면 좋겠어요. 마수도 안 나타나고 다 도망갔잖아요.”
“앞으로도 안 나타날 거야. 여기 계신 신관님들과 기사님들이 다 지켜줄 거야.”
“그래도 있으면 안 돼요?”
리티아는 빙긋 웃으며 신관이 아이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던 쿠키 봉지를 하나 집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다음에 또 올게.”
“꼭이요?”
“응, 꼭. 그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다른 사람에게도 축복을 내렸다. 정말 쉴 틈이 없었다.
“정말 나흘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가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여정에 아테스 님의 가호가 지켜주실 것입니다.”
레페 신관이 대신해 파비 신전의 신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
이제 저 인사도 “안녕하세요.”처럼 익숙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종교라고는 팔자에도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리티아는 말없이 손부터 내미는 곤도르를 보며 뒤처지지 않게 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 드디어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정말 번개같이 흘렀네요.”
“그러게요. 커다란 균열을 막고 나니까 다른 건 잘 생각도 안 나는 것 같아요. 다른 곳에 감지된 균열은 더 클 수도 있다고 했나요?”
“예, 우선은 그렇습니다. 보통 커다란 균열은 시간 차를 두고 열리니까요. 원래 어제 없앤 균열이 더 클 거라고 예상했는데 다른 곳이 꽤 지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로서야 여유가 남으니 다행이지만 얼마나 클지는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운이 나쁘면 도착하자마자 투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마차 안에서 틈틈이 쉬는 게 좋겠어요.”
“잠시 눈이라도 붙이십시오. 문제가 생기면 바로 깨워 드리겠습니다.”
리티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파비 신전을 완전히 나와 길 위에 올라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저 뒤로 파비 마을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쿵!
갑자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앞쪽에서 굉음이 나더니 마차가 덜컹거렸다.
놀란 말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빠르게 창문 밖을 확인한 마르마티가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바깥을 확인하고 와봐야겠습니다.”
곤도르가 곧장 문을 열어 먼저 내렸다. 연이어 펠루가만 남은 채 마르마티도 곤도르를 따라 내렸다.
“공녀님을 지키도록.”
“알았다.”
마르마티가 바로 문을 닫았다.
리티아가 창문을 보려는데 굉음이 들린 것치고 리티아가 보는 쪽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펠루가가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여 문 바로 옆 창문을 열었다.
“작은 마수들 몇 마리가 피해서 숨어 있었나 봅니다.”
“숨어요?”
“균열 때문에 숲에 몰려들었다가 규모가 크니 도망갔던 거죠. 가끔 이렇게 숨어 있다가 습격하곤 하는데 낮에 대놓고 습격을 하는 것을 보니 똑똑한 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쿵! 머리 위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마차 위로 뭔가 떨어진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