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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46화 (46/70)

46화

* * *

리티아에게 쉬라고 말한 곤도르는 펠루가와 마르마티까지 불러 리티아의 할당 자리까지 정화했다.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 바람에 정말 리티아가 해야 할 일이 사라져 버렸다.

“…….”

얼떨떨해진 리티아가 다가가 고맙다고 하려는데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이 오늘따라 더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또 다가가기가 꺼려졌다.

눈썹이 새카맣게 짙은 데다 유난히 눈매가 깊어서 오늘같이 해가 쨍쨍 뜬 날은 고개를 살짝 숙이면 생기는 그늘에 정말 사나워 보였기 때문이다.

“친해진 건지, 아닌지 도통 모르겠네.”

에나를 급한 상황에서 구한 이후 처음보다 적대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은데 이렇게 가끔 챙겨줄 때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동생이 몸이 약한 편이라 늘 노심초사했을 테니 저보다 약한 사람이 보이면 신경이 쓰일지 모르겠다.

성격과 생김새는 달라도 엘라르랑 비슷하다 생각하면 또 곤도르의 행동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엘라르는 아예 눈물까지 쏟으면서 리티아를 걱정했었으니까.

리티아가 집에서 떠나는 날도 정말 괜찮겠냐며 연신 손을 잡고 안 놔줬었다.

“공녀님, 잠깐 로제니아 신관께서 모여달라고 하십니다.”

“아, 네! 가요!”

리티아가 서둘러 기사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 * *

“이게 무슨 일이죠?”

“오염된 물을 마신 것 같습니다. 당분간 정화기구를 통한 물만 마시라고 했는데 냇가에서 놀다가 그냥 마신 모양입니다.”

“정화제는. 정화제는 먹였습니까?”

“방금 먹었어요!”

마차를 타고 이동해 신전 안으로 들어왔는데 신관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조용해야 할 신전에 큰 소리가 오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처음 보는 풍경에 다들 영문도 모르고 복도에 선 채로 굳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함께 나갔던 로제니아가 다른 신관에게 물었다.

또라고 말을 하는 걸 보면 비슷한 일이 이전에도 일어났다는 말이다. 얼마 전이든 아니면 그 전이든.

“아이들이 오염수를 마셔서 부모들이 신전으로 데려왔습니다.”

“오염수를요?”

“오염수인지 모르고 마신 것 같아요. 며칠 전만 해도 편히 놀던 곳이니까요. 기도실에 매트를 깔고 우선 아이들을 눕혀두었습니다.”

“인원은 얼마나 됩니까?”

“8명이요.”

로제니아와 일행에게 설명한 신관은 정화제를 더 챙기기 위해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겨서 저도 가봐야 할 것 같군요. 혹시 신체 정화를 해보신 분이 계십니까? 괜찮으시다면 저를 따라와 도와주시겠어요?”

로제니아가 뒤를 돌아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신체 정화가 가능합니다.”

레페 신관이 먼저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좀 전까지도 걱정으로 딱딱해진 로제니아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그럼 체력이 괜찮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저를 따라와 주세요. 아이들이라 퍼지는 속도가 빨라서 심장에 무리가 가기 전에 해독해야 합니다. 저희 쪽도 있으니 네, 다섯 분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저희가 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도 도움이…….”

인원을 추리느니 빨리 결정해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리티아가 말을 하자마자 동시에 입을 열던 미젤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멈칫하더니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저도 갈게요.”

그러자 머뭇거리던 다른 세 명도 그러겠다며 동의했다.

로제니아가 끄덕이며 서둘러 기도실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덩달아 다섯 명도 로제니아의 뒤를 따랐다.

“아까 잠깐 들었는데, 또라면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예, 그저께 마을 바깥에 있는 우물물을 마셨다가 쓰러져서 신전에 온 일이 있었습니다. 오염수를 마시면 의사의 치료로도 회복이 안 되어서요.”

“아…….”

“이런 일이 드물었는데 균열이 급격하게 생기면서 사고가 좀 생겼습니다. 처음 균열이 생긴 날 정화기구를 나눠주었지만,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기도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아이들은 한쪽에 두꺼운 매트와 이불을 깔아 그 위에 눕힌 상태였다. 괴로운지 입술은 파랗게 변하고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식은땀이 뚝뚝 흐르는 걸 부모들이 닦아내고 있는데 그마저도 방해가 될까 봐 계속 뒤로 물러났다가 아이들에게 갔다가 하길 반복했다.

“신체 정화를 하신 적이 있다고 하셨으니 방법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네, 바로 아이들을 맡으면 될까요?”

미젤라가 누워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물었다. 어느새 미젤라의 얼굴은 냉정하고 침착했다.

“예, 다만 신체 정화는 일반 정화와 달리 성력의 밀도가 높아야 하니 두 분씩 번갈아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이들이라 너무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천천히, 오래, 조금씩 정화를 해야 해요. 성인은 단숨에 정화를 해도 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하면 성장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해서 오래 해봤던 저희들도 그렇게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몬트 공녀, 저와 하시겠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라 리티아가 놀랐다. 파비 신전에서만 해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않았나?

그런데 먼저 제안을 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심경 변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긴급상황인 데다 리티아는 속전속결한 모습이 마음에는 들었다.

“그래요.”

미젤라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나머지 셋은 혼자서 하는 신관 한 명과 팀을 이루어 아이들을 맡았다.

빡빡 깎은 머리를 한, 기껏해야 9살 정도 먹었을 것 같은 남자아이가 괴로운지 목을 긁었다.

리티아가 아이의 팔을 막으며 미젤라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할게요.”

미젤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다른 팔을 잡았다. 조금만 참으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리티아는 심장 근처부터 천천히, 정화의 힘을 불어넣었다. 신체 정화는 신전에서 봉사할 때 한 것과 에나를 급하게 구할 때 한 것뿐이라 스스로 그때의 기억을 몸으로 떠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면 성력의 밀도를 높여주세요. 성장을 방해시키는 것보다 우선 목숨을 살리는 게 우선이니까요.”

사람이 오염수에 오염이 되면 죽을 수 있고, 오래 노출이 되는 경우엔 사람 자체가 마수가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다섯 명 모두 바짝 긴장을 했다.

아이들이 마수가 되는 일은 없겠지만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목숨을 잃게 할 수는 없었다.

누워 있는 8명의 아이에게 약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신관과 후보들이 다닥다닥 붙어 연신 성력을 불어넣었다. 빛이 희미하게 들어갔다 나왔다 반복하며 아이들을 정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이들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심장에서 얼굴, 손에서 팔까지, 발끝에서 상체로 계속해서 성력을 주입하자 다른 신관의 얼굴에서는 땀이 떨어질 정도였다.

쉬지 않고 오염이 풀릴 때까지 성력을 뭉근하게, 일정하게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상태였다.

“으으…….”

리티아 또한 한창 정화 중이었다. 아이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새파랗다 못해 검게 물든 입술이 점점 붉어지는 게 보였다.

“이제 제가 할게요.”

“아, 네.”

미젤라가 다시 리티아에 이어 정화를 시작했다.

이제 아이가 버둥거리지 않아서 좀 더 빠르게 회복이 가능하도록 손과 발을 주물러 주었다.

“살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뒤에서는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부부가 울며 두 손으로 박박 빌었다.

“아이의 상태가 돌아오고 있어요. 괜찮아질 거예요.”

리티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을 진정시키고 정화를 하는 일밖에 없었다.

미젤라와 리티아 그리고 다시 미젤라, 리티아 이렇게 번갈아가며 정화를 몇 번 더하자 아이의 피부색이 온전하게 돌아왔다. 이윽고 숨까지 고르게 쉬던 아이가 드디어 눈을 떴다.

“칸!”

리티아가 외침에 조금 물러나자 그 자리를 아이의 엄마가 파고들어 아이를 껴안았다.

“엄마……?”

어리둥절한 아이는 엄마에게 안긴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쳐다봤다. 아예 좀 전까지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것처럼.

“하아…….”

리티아가 긴장을 풀며 주저앉는 무릎을 굽혔다. 이런 아득한 느낌을 느낀 게 벌써 두 번째다. 에나도, 방금 칸이라고 불렸던 아이도 구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한숨을 쉬다 미젤라와 눈이 마주쳤다. 미젤라가 어색하게 보더니 리티아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리티아도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짓자 미젤라도 그제야 웃음을 지었다. 미젤라와 동질감을 느껴서가 아니라 아이를 구했다는 그 마음이 통한 것이었다.

조금 더 지나자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칸은 신관들이 한 번 더 확인하고서 부모의 품에 안겼다. 부모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칸은 이제 반대로 엄마 얼굴을 닦아주며 울지 말라며 위로해 주고 있었다.

“쿨럭……!”

그때 어디선가 뭔가 토하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꺄악!” 하고 비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시선이 몰려들었다.

“메이!”

부모로 보이는 남자가 아이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리티아와 미젤라가 덩달아 놀라 시선을 주고받았다.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입에서 검은 물이 터진 것이다.

“심장, 심장에 정화를 하십시오!”

검은 물을 토한 아이의 곁으로 신관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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