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50화 (50/70)

50화

* * *

“……?”

그런데 칼리프가 다가와 테메스와 리티아 사이에 섰다.

칼리프가 키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세 명의 테메스는 경갑옷을 입은 상태에다 키와 덩치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데도 그가 단연 눈에 띄었다.

아니, 그보다 왜 그가 제 옆에 서는지 알지 못한 리티아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테메스들의 눈치를 한껏 보는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왜…….”

차마 칼리프에게 말은 걸지 못하고, 그렇다고 이유도 모르는 리티아가 펠루가에게 의문의 눈빛을 보냈다. 제일 가까운 사람이 펠루가였다.

“같이 전투를 치르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요. 어제 회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

리티아가 뒤늦게 다른 곳에 고개를 돌렸다. 칼리프뿐만 아니라 오브가 한 명씩 사이사이에 껴 있었다. 유난히 칼리프가 저와 붙어 있긴 했지만.

‘왜 지금 보였지.’

괜히 칼리프를 오해해 자신을 또 골린다고 생각하느라 시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테메스들과 다르게 다소 가벼운 차림의 오브들은 조금도 긴장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칼리프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재밌어하는 눈치고 다른 이들은 무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무표정이었다.

리티아는 애써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 균열 주변을 정화하는 데 집중했다.

“서서히 균열이 보입니다. 긴장하십시오.”

그 말에 리티아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르난 헤게와 타냐 하디 그리고 열 명의 성기사가 한쪽에 모여들었다.

“저번보다 인원도 많고 준비를 많이 했으니 잘……되겠죠?”

리티아가 힐끗 칼리프를 보다 마르마티에게 말을 걸었다.

마르마티가 리티아를 지키듯 살짝 앞에 섰다.

“그럴 것 같습니다. 최대한 돌발 상황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야죠.”

“저도 무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

“무기 말입니까?”

“그냥 가벼운 검이라도. 아무것도 들지 못한다는 게 좀 아쉽네요.”

저번처럼 행여나 마수가 또 저를 덮치면 어쩌나 무서운 면도 있었다. 애초에 마수를 이곳에서 처음 봤는데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호랑이나 사자가 자신을 덮친다고 해도 무서워서 기절할 것 같은데 그보다 더 흉측한 모습을 한 괴수가 덮치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이었다.

하다못해 품 안에 검이라도 있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안심이 될 테니까.

찌르는 눈길에 리티아가 다시 힐끔 고개를 들었다.

칼리프가 리티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홱, 깜짝 놀라 리티아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땅의 색이 회백색으로 빠르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리티아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멀리 떨어지십시오!”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리티아는 제 발아래 바닥까지 회백색으로 말라가는 걸 눈에 한가득 담았다.

마치 소나기에 땅이 젖듯 빠르게 오염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바닥에 쩌억 아가리를 벌리듯 균열이 단숨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공녀님, 뒤로 오십시오!”

마르마티의 목소리와 함께 칼리프가 리티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리티아아 순식간에 마르마티와 칼리프의 뒤로 가려졌다.

코를 찌를 듯한 악취가 풍겼다.

“꺄아악!”

옆에서 미젤라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내 리티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마수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수가 많은. 단숨에 눈에 담아도 50마리는 훌쩍 넘을 것 같은 마수가 균열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

처음에 봤던 큰 균열에서 나온 마수와는 차원이 다른 숫자였다.

어떻게 저렇게 단숨에 많이? 순식간에 기사들이 대형을 갖추었다.

마수는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기사들에게 덤벼들었다.

키아악! 챙!

검이 마수의 두꺼운 몸통을 뚫는 소리와 베이는 소리가 들렸다. 리티아는 마수들의 영역을 줄이기 위해 뒤에 더 숨지 않고 광역 정화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오염도는 높아질 테니 서둘러 그들의 영향력을 줄이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마수의 출현으로 손이 덜덜 떨려왔다.

다른 영애들은 아예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피해!”

쿵! 기사 한 명이 거대한 마수에게 부딪쳐 뒤로 날아가 버렸다. 그 뒤를 마수가 빠르게 뒤쫓아 그대로 뛰어들었다. 성기사의 머리를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린 마수가 그대로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검은 연기가 마수를 순식간에 감쌌다. 찢어지는 마수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티아의 눈에 또 한 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오브들은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는 모습으로, 아니 오히려 우아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으로 마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새카맣고 위험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와도 같은 기운이 무차별적으로 마수를 소멸시키고 있었다.

심지어 마수를 죽이는데 픽 웃듯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은 마물을 없애는 걸 즐기고 있는 듯했다. 위험을 인지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장난감을 두고 흥미를 느끼는 동물들처럼.

어쩌면 큰 착각에 빠져 있던 건 리티아 혼자였나 보다.

테오스들이 힘겹게 마수를 상대하는 것처럼 오브들 또한 그럴 줄 알았다. 칼리프가 자신을 구했을 때의 모습은 단순히 그가 수장이기 때문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빛과 어둠. 상극인 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힘은 정말 압도적일 정도로 강했다.

신관들과 성기사들 몇몇의 표정은 이미 리티아처럼 생각한 모양인지 몹시 두렵고 불쾌한 것을 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먼지와 검은 연기 그리고 테오스의 성력 때문에 주변은 뭉게구름이 핀 듯 여러 기운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바로 뒤에 있는 테메스마저 흐릿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

아무리 성력이 강한 리티아라도 무기를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당장 마수가 튀어나오면 위험했다.

균열에서 마수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이쪽도 안전하진 않았다. 역시 테니아도 무기를 달라고 해야 이 답답함이 가실 것 같다.

바로 뒤로 조금 더 가 테메스 사이에 자리하려는데 그녀를 구해주었던 저번처럼 칼리프가 리티아의 등 뒤에 섰다.

너무 놀라 사람들 사이로 그가 자신에게 가까이 왔다는 것조차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고개를 돌리니 조금 더 확보된 시야에 다들 마수와 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마수가 50마리가 넘으니 리티아만큼이나 정신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 누구도 칼리프와 리티아가 붙어 있다는 걸 수상하게 여길 만큼 정신이 여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카, 칼리프?”

“자.”

칼리프가 뒤에서 리티아를 받치듯 허리를 단단히 감싸오며 그녀의 귓가에 낮은 음색을 밀어 넣었다. 움찔하기도 전에 리티아의 손이 그에게 부드럽게 잡혔다.

홀린 듯이 리티아가 손을 뻗었다. 대체 이게…….

칼리프의 몸과 닿은 부분에서부터 리티아의 손끝까지 순간 싸한 기운이 몸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리티아가 숨을 훅하고 들이켰다.

“괜찮아. 이제 하고 싶은 걸 해봐.”

걸음마를 가르치는 어른처럼 구는 칼리프의 상냥함에 리티아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마수 쪽을 향하게 두었다. 이제는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이 남자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츠츠츳-

칼리프가 기다리는 이유가 자신이 성력을 쓰길 기다리는 것 같아 리티아가 성력을 끌어올렸다.

어깨가 뜨끈해질 정도로 저릿했다. 힘이 섞이기라도 하는 걸까? 그게 가능한가?

잠시간의 고민이 허탈하게도 기운들이 섞여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처럼 굴고 있었다.

“…….”

“해봐.”

칼리프가 유혹하듯 리티아를 부추겼다.

그럴수록 손끝에 느껴지는 힘은 매혹적일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짜릿할 정도였다. 만약 이걸 마수에게 사용하면. 그 누구보다 더 빠르게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찰나 쎄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리티아의 손끝에서 나간 기운이 마수을 향해 달려 나갔다. 동시에 몸에서 에너지가 훅 빠져나가는 착각이 들어 몸이 휘청였다.

아까부터 뒤에서 벽처럼 리티아를 지탱하고 있는 칼리프가 그 충격을 모두 흡수했다. 여러 갈래로 퍼진 기운은 삽시간에 마수를 둘러싸더니 단단한 사슬처럼 마수를 얽매었다.

마치 검은 연기 속에서 성력이 자꾸 튀어올라 벼락이 치는 것처럼 보였다.

키에에엑!

마수가 고통으로 버둥거렸다.

방금 신관 두 명이 성력을 퍼부었음에도 큰 타격을 받지 못하던 마수가 버둥거리다 이내 구구구궁 지면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팍 터져 버렸다.

리티아가 놀란 나머지 숨을 쉬는 걸 까먹고 그대로 멈췄다.

다시 숨을 쉰 건 칼리프가 귓가에 나직한 웃음을 흘렸을 때였다.

“……하.”

리티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허무할 정도로 과격하고 무서운 힘이었다.

“뭉개 버리고 싶었어? 과격하네.”

칼리프가 작게 웃었다.

“대, 대체 뭘 한 거예요?”

“글쎄.”

“다른 사람한테도 할 수 있어요? 아니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어요?”

“아니. 마수처럼 터져 버릴걸.”

“난 했잖아요.”

“……니까.”

“네? 뭐라고요?”

“그러게.”

칼리프가 살짝 뒤로 물러났다. 방금 그 말이 아닌 것 같았는데.

리티아가 여전히 제게서 나온 힘을 믿지 못하고 제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어느새 마수가 반쯤 해결이 되고 있었다. 새카만 사슬 같은 기운이 다른 마수를 먹어치우듯 또 한 번 해치웠다.

“…….”

캬아악! 쿵!

육중하게 떨어지는 마수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칼리프가 조금 더 벌어진 사이 곤도르가 마수를 쓰러뜨린 게 보였다. 리티아의 뒤를 마수가 덮치려고 했었던 모양이다.

“괜찮으십니까?”

“곤도르 경. 아, 괜찮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