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 *
“무슨 이상한 힘을 말하는 거죠? 나는 성력밖에 쓰지 않았어요. 정화할 땐 같이 있지 않았나요. 뭐가 문제인 거죠.”
로아가 하!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분명 오브와 함께 힘을 썼잖아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예요, 오브의 힘을 쓰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내가 어둠의 힘이라도 썼다는 말이에요?”
그러자 로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리티아의 팔을 낚아채듯이 잡았다.
“이 손으로 똑똑히 썼잖아요. 모른 체 하겠다 이건가요? 어쩐지, 이상하리만큼 성력이 강하다 했지. 오브에게 영혼이라도 팔았나요? 그래서 성력을 강화시킨 건가요?”
“…….”
리티아는 가만히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팔을 잡은 로아의 손을 떼냈다.
“캐번디시 영애.”
“네.”
“영애가 날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도, 내가 나타날 때마다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도, 심지어 제가 황태자 전하과 친분이 있는 것 또한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런데 이건 아니죠.”
그때였다.
로아가 다시 리티아의 손을 낚아채 갑자기 성력을 쓰기 시작했다.
리티아에게 정화의 힘을 쓴 것이다.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순간적으로 흰빛이 터졌다. 로아가 여태까지 내던 빛 중 가장 선명한 색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리티아가 벌떡 일어났다.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로아가 잡은 손이 너무 억세 팔목이 금방 빨갛게 물들었다.
로아의 성력이 몸에 타고 들어오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순간 어깨에 통증이 있어도 참으려고 미리 안쪽 입술을 깨무는데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았다.
“…….”
1분이나 더 그런 짓을 하고서야 로아가 숨을 몰아쉬며 정화를 멈췄다.
자신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다소 혼란스러운 눈으로 리티아를 쳐다봤다.
리티아가 한껏 불쾌하다는 듯이 로아의 팔을 거칠게 내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분명 힘을 썼잖아.”
“……그래서 지금 날 정화하겠다고 멋대로 힘을 썼어요?”
리티아의 새된 소리에 로아가 숨을 몰아쉬며 노려봤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다시 손을 잡으려고 했다.
이번에는 리티아가 좀 더 빨랐다. 반대로 로아의 손을 낚아챘다.
“한 번만 더 하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요.”
“아니야, 분명히…….”
그러다 일순간 다시 로아가 눈을 치켜떴다.
“그럼 레페 신관께 말씀을 드리죠.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리티아도 팽팽하게 맞섰다. 여기서 조금 밀려나 의심을 사느니 도박을 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리티아가 조금 더 우위였다. 실력으로나 평판으로나.
“그래요,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결백하다면 캐번디시 영애는 뭘 할 건가요?”
“뭘 하다뇨?”
그러자 로아가 주춤했다. 얼마 전 리티아가 더 건들지 말아달라, 안 그러면 몬트가의 모든 것을 걸고 널 끌어내리겠다 협박했던 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리티아가 턱을 치켜세웠다.
“내 테메스 앞에서, 다른 테메스들의 앞에서, 모두의 앞에서 결백이 드러나게 되더라도 내가 망신을 당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죠. 내 명예는 어쩔 건가요? 그것에 대한 책임도 지셔야죠.”
“뭐라고요?”
리티아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니, 터질 것 같았다.
지금 로아가 자신에게 성력을 불어넣고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건 단순히 저보다 성력이 적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페 신관의 귀에 들어가 행여 의심이라도 사게 되면, 최악의 경우 레페 신관이나 아니면 그 위, 대신관, 더 나아가 테니아까지 문제를 삼아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걸리면 어디까지 발칵 뒤집힐까 걱정을 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머뭇거리는 건 로아 캐번디시에게 대놓고 의심하라 말하는 것과 같았다.
로아 캐번디시는 리티아의 약한 면을 좋아했다. 괴롭히고, 파고들고, 다루기 편하니까. 그로 인해 자신이 좋아하는 황태자 전하에게서 떨어뜨려 놓을 수 있고, 테니아의 자리까지 넘볼 수 있으니까.
앞으로도 그러고 싶은 것이다, 로아 캐번디시는.
“자신 있다면 지금 당장 레페 신관님께 가보세요. 만약 영애의 말이 틀린다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예요. 이제 정말 안 당해줄 거니까. 가세요.”
“…….”
로아가 주춤했다. 이전까지 리티아에게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원래라면 겁에 질려 아니라고, 자신을 믿어달라 울먹여야 정상이었다. 치맛자락이라도 잡고 늘어질 줄 알았던 리티아가 이렇게 나오자 로아도 지금 바짝 짜증이 난 상태였다.
분명 로아는 아까 혼란스러운 중에 이상한 것을 보았다. 다른 것도 아닌 리티아의 손에서 검은빛의 이상한 힘이 나왔다는 것을. 리티아가 스스로 마수를 해치운 걸 똑똑히 두 눈으로 확인을 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오브의 수장이라던 데모드가 있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순물들의 우두머리. 겉껍데기는 무척이나 매혹적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순 없었다. 하지만 그것뿐. 그는 불순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땅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존재가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불쾌하지 않을 수가.
“어서요.”
로아가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로아는 초조한 상태였다.
근데 리티아 몬트의 뒤로 칼리프 데모드가 단단히 버티고 서 있던 걸 로아는 확실하게 보았다. 그 전에도 계속 수상했다. 첫 균열 때도 문제가 일어났을 때 오브가 나서서 리티아를 살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브가 테오스를 살린다? 아무리 협정 중이라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만약 그랬다면 북부에서 마수로 인해 죽어가는 테오스와 테오리스도 그들이 구했겠지. 하지만 아니다. 그들을 더욱 불쾌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들은 사람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서 테오스가 쓸려나간다고 해도 꿈쩍하지 않을 존재라는 걸 로아는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순례 여정이 시작된 이후 제 성력의 크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바람에 자신은 수치심까지 느끼고 있는데, 리티아는 버젓이 수상한 짓을 하고서도 멀쩡히 대우를 받는 게 괘씸했다.
거기다 제 테메스인 아로까지도 자꾸만 자신에게 성력을 더 짜내 보라며 요구까지 하고 있었다. 그것도 리티아와 비교까지 해가면서.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요. 이번은 그냥 넘어가죠.”
“안 가고요?”
“몬트 공녀가 정말 결백하다면 앞으로 지켜보면 될 일이니까요. 만약 그들의 도움을 받고있는 거라면 테니아가 되기 전에 드러날 테니까.”
“그러니까 캐번디시 영애도 확실하지 않았다는 거네요.”
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내 눈은 확실해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영애 말대로 더 확실해야겠다 싶어서요. 어디 열심히 숨겨봐요. 정말 결백하다면 문제 없겠죠?”
“……당연하죠.”
“부디 잘 숨기길 바라요. 설마 죽다 살아난 것도 그 힘을 빌린 건 아니겠죠.”
로아가 그대로 리티아를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갔다.
증거가 없으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인데, 저러고 이까지 가는 걸 보니 앞으로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당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일은 로아가 계속 밀고 가면 그저 오브가 도와준 것이다 하며 자신도 밀고 나가려고 했는데.
“……후.”
리티아가 닫힌 문을 보며 침대에 주륵 주저앉았다.
앞으로 아무래도 더욱 조심해 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다. 테오스와 오브의 사이가 좋아지면 오히려 관계가 느슨해지겠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바짝 경계를 할 때였다.
* * *
리티아는 저녁이 될 때까지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저녁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서야 문 밖으로 나왔다.
다른 영애들도 별다른 행동없이 방 안에 있었는지 막 문을 나오는 리티아와 마주쳤다.
미젤라와 유디트가 짧게 목례만 하고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리티아 또한 인사를 하고 뒤를 따라 내려갔다. 지밀과 로아는 둘이 함께 먼저 가기라도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아예 네 명의 후보는 둘씩 갈라서 다니기로 한 모양이다.
‘지밀에게도 말을 해놓은 건 아니겠지.’
로아 캐번디시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게 지밀 로베르인데.
하필이면 걸려도 로아 캐번디시라.
리티아가 다시 씁쓸함을 느꼈다.
“공녀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식당 홀에 가자마자 펠루가가 리티아를 반겼다.
이미 곤도르와 마르마티는 자리에 앉은 상태였다.
“네, 세 분은 괜찮으시고요? 오늘 마수 제일 많이 잡으셨잖아요.”
“좀 뻐근하긴 합니다. 저녁 먹고 나면 또 괜찮아지겠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펠루가가 털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리티아가 앉기 쉽도록 의자를 빼내주었다.
아직 인원이 가득 차지 않았다. 음식은 하나둘씩 나오고 리티아가 주변을 보다 먼저 와 있던 로아 캐번디시와 눈이 마주쳤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솔직히 신경이 쓰여 그쪽을 안 볼 수가 없었다.
“…….”
로아 캐번디시는 말 그대로 리티아를 끌어내리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의 표정이었다.
증거가 없어 당당한 건 리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한번 해보라지. 리티아는 그쪽에 신경을 거두고 테메스와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네, 뭐라고요?”
지밀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