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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56화 (56/70)

56화

* * *

곤도르가 방어막이 되어준 덕분에 리티아는 조금도 부딪치지 않았다.

“고마워요, 곤도르 경.”

“아닙니다.”

다시 곤도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살짝 뒤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 내가 막아드리려고 했는데. 이 기회를 이렇게 가져가네.”

세 명 중 리티아의 옆에 답삭 달라붙다시피 한 마르마티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리티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이래서야 세 명은 즐기지도 못하고 자신을 호위하는 데 모든 신경을 다 쏟을 것 같았다.

“오늘은 편히 즐기세요. 위험 지역도 아니잖아요.”

“마수가 없는 대신 소매치기는 있을 테니까요.”

“앗, 돈 없어서 괜찮은데.”

그러자 마르마티가 굉장히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오늘 공녀님이 쏘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 오늘 그런 줄 알고 아침부터 쫄쫄 굶고 왔는데.”

아예 과장해서 제 배까지 움켜쥐며 마르마티가 쇼를 했다.

몸을 갈대처럼 휘청이기까지 하기에 리티아가 그를 말렸다.

“아니, 그 정도는 있단 말이에요. 알았어요. 마르마티 경, 뭐 먹고 싶어요.”

리티아가 마르마티의 팔을 잡고 반대편 손으로 가게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든 말해보라고 하자 마르마티가 제일 비싼 걸 골라도 되냐 물었고 뒤에서 펠루가가 따라오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녀석하고 공녀님이 죽이 맞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신기하다니까.”

마치 사고뭉치 어린애 둘을 대하는 말투였다.

* * *

한편 리티아의 뒤만 쫓고 있던 로아네 일행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로아와 테메스 사이에 대화가 없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로아의 성력을 눈으로 확인한 이후부터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미묘한 관계에 불을 지핀 건 아로의 한마디였다.

「캐번디시 님, 혹시 광역 정화가 안 됩니까?」

약간의 불쾌함과 믿을 수 없다는 뉘앙스를 담은 말투였다.

로아가 짧게 짧게 성력을 뽑아내 정화하고 있을 때였다.

「……가능해요.」

「차라리 광역 정화 한 번 하고 끝내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아로의 시선은 이미 가장 넓은 지역을 정화해버리고 쉬고 있는 네 명을 향해 있었다.

처음부터 다섯 명의 후보 중 가장 사이가 좋아 보이는 팀이기도 했다. 저들 근처만 있으면 계속 웃음소리가 들렸다.

겁이 많고, 낯을 많이 가리고, 우중충하고 어둡고, 피해망상에 빠진. 그럼에도 몬트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 콧대마저 높다는 몬트 공녀에게서는 그간의 편견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지금도 문제없지 않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누가 지금의 몬트 공녀를 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새하얗게 느껴질 정도로 밝은 은발은 입혀놓은 제복이 가장 잘 어울리기까지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색 눈동자는 아름다웠으며 또렷하고 강해 보였다.

무엇보다 다섯 명을 다 합쳐도 겨누지 못할 만큼의 강한 신성력이 아로의 시선을 사로잡은 상태였다. 처음 광역 정화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온통 주변을 새하얗게 만들어버리던.

처음 겉으로 스치듯 봤을 때는 그저 외형만 아름다운, 가녀린 아름다움을 가진 그녀처럼 보였지만 어느새 경이롭게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 그냥, 컨디션이 조금 좋지 않아서 그래요. 내일부터는 나도 광역 정화를 쓸 생각이었어요.」

로아가 그 말을 하고 도는데 돌연 아로가 쯧,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로아가 순간 움찔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일부러 못 들은 척을 했다.

아로 렌티어스는 렌티어스 후작가의 장남으로 스스로 꽤 프라이드가 높은 편이었다.

스스로 성기사단에 지원해 단숨에 실력을 높이고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때마침 열린 테메스 후보 지원에서도 가장 먼저 우수한 실력으로 테메스 후보 자리를 차지했던 그였다.

성기사로서 테니아의 테메스가 되는 것은 가장 큰 성공의 길이니, 아로는 가장 강한 테니아 후보의 테메스가 되는 게 목표였다. 그렇게 되면 테니아가 될 확률이 높고 저 또한 가장 완벽한 테메스가 되는 길이라.

「그럼 속도를 좀 높여야겠습니다. 이러다간 가장 늦게 돌아가는 팀이 되겠군요.」

「…….」

다섯 명의 신탁이 내려왔었다.

그중 한 명이자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리티아 에울루니에 벨루스 몬트. 몬트 공녀가 자살 시도하면서 후보에서 포기할 것 같다는 소문이 돌았다. 솔직히 아쉬웠다.

몬트 공녀의 테메스가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몬트 공녀의 포기가 기정사실이 되자 나머지는 모두 성력이 고만고만해 그나마 가장 나은 가문을 고른 것이었는데.

테니아의 후보는 가진 성력 뿐만 아니라 받쳐주는 배경이 든든해야 테니아가 됐을 때 그 권력을 더욱 크게 쥘 수 있기 때문이다.

로아 캐번디시의 테메스가 되자마자 얼마 뒤 몬트 공녀가 신전을 찾아와 테메스를 고를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아로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생각했었다.

로아 캐번디시는 테메스가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하길 바랐고, 다섯명의 테메스는 로아의 실력을 의심했다.

점점 갈라지기 시작한 관계가 자꾸만 벌어져 냉랭한 기운을 자아냈다.

로아 캐번디시는 그 누구보다 그 변화를 피부로 알아채고 있었다.

애초에 몬트 공녀가 포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로아가 원하는 대로 모두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몬트 공녀가 다시 말을 번복하며 결국 이 사달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버젓이 오브의 도움을 자연스럽게 받았던, 오히려 그 관계가 수상할 정도로 친밀하게 느껴졌던 리티아가 죄의 심판은커녕 인정을 받고 있으니 더 화가 났다.

내일 일정에서도 레페 신관이 일부러 리티아를 따로 보낸 이유를 알고 있다. 가장 유력한 테니아라고 생각해 실력을 확인해 볼 참일 것이다.

역대 테니아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따라 붙은 고위 신관이 가장 많이 시련을 준 후보에게 테니아를 거머쥐곤 했다고.

심지어 로아는 레페 신관이 회의가 끝난 후에 리티아에게 뭔가를 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감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척, 가장 고결하고 고고한 척 굴면서 뒤에서는 저런 협작질이나 했다는 게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데모드와의 관계를 알아야 해. 반드시.’

어떻게든 자신은 리티아를 테니아의 후보에서 끌어내릴 작정이었다.

그 자리는 그 누가 뭐래도 자신이 차지해야 하니까.

테메스와 장난을 치느라 여념이 없는 리티아의 뒷모습을 로아가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 * *

“마르마티 경, 이제 그만 먹어요.”

“왜 그러십니까?”

“……지금 얼마나 드신 줄 아세요?”

정말 해도해도 너무했다.

마르마티는 닭꼬치 가게 앞에서 몇 개만 먹겠다고 하더니 상인이 준비해 온 모든 닭꼬치를 하나도 남김없이 동내기 직전이었다.

“아니, 너무 맛있는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그러면서 먹기 시작하는데 상인은 싱글벙글.

리티아는 애초에 많은 돈을 가져올 수 없어서 아주 조금만 가져왔는데 정말 다 털리게 생겼다.

리티아가 준비해 온 주머니를 꾹 쥐었다. 가문에 있을 때야 돈을 바닥에 뿌리고 다녀도 남아 도니 그런다고 쳐도 여긴 아니었다.

가문의 돈은 쓸 수도 없을뿐더러 다섯 명의 테니아 후보 그리고 테메스, 다른 성기사 모두 같은 활동비를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무조건 그 안에서만 석 달의 생활을 해야 하는데 괜히 마르마티가 원하는 걸 다 사주겠다고 했다가 여정 초반에 다 털리게 생긴 것이다.

“마르마티 경.”

“예?”

“그만 먹어요. 배부르잖아요.”

“아직인데.”

“아니에요, 지금 마르마티 경은 충분히 배부른 것 같아요. 다시 내면에 소리를 잘 들어봐요.”

“공녀님, 손 떨리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펠루가가 웃겨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리티아가 입을 삐죽였다. 그러고는 계산을 바라는 상인에게 주머니를 열어 돈을 지불했다.

“아, 배부르다.”

“…….”

결국 정말 은화 열 개 정도만 남기고 동화를 다 털리고 말았다.

독한 사람. 어떻게 닭고기꼬치를 100개 가까이 먹을 수가 있어, 그 자리에서. 성기사들 먹는 양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지만 마르마티는 그래도 대단한 체력 중에서 그나마, 그나마 늘씬한 편이었다.

“공녀님, 설마 제가 먹은 게 아까운 건 아니시죠.”

“설마요. 그럴 리가요.”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 원래 표정이 그래요. 그래서 원래 억울하냐는 소리 많이 들어요.”

“풉.”

리티아는 뒤에서 계속 펠루가가 저와 마르마티를 보고 웃는 걸 알았지만 뻔뻔하게 못 들은 척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가벼워진 주머니를 쥘 때만큼은 가슴이 쓰렸다.

“저, 반대쪽으로도 한 번 가볼까요? 저쪽에서 연주 소리가 계속 나던데 볼만 할 지 한 번…….”

그때 뒤에서 큰 소리와 함께 와장창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리티아와 곤도르, 마르마티, 펠루가가 동시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무슨 소리죠?”

“뭔가 상인들끼리 싸움이라도 일어났나 봅니다. 주변에서 말릴 것 같으니 최대한 얽히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원래 시장같은데선 싸움이 많이 일어나죠. 금방 해결될 겁니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소리가 너무 큰데.

마르마티와 펠루가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데 다시 또 한 번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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