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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58화 (58/70)

58화

* * *

레페 신관의 뒤로 누군가에게 많이 맞은 것처럼 얼굴이 퉁퉁 부은 기사 두 명이 보였다. 이미 닦아낸 것 같은데도 피딱지가 앉아 시퍼렇게 멍이 든 모습에 리티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저, 신관님. 저 경들의 얼굴이…….”

리티아의 말에 잠시 뒤를 돌던 레페 신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 하아. 일정 중에 문제가 좀 생기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지게 됐네요.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오늘 혼자서 하시느라 어려운 점은 없으셨는지요.”

“네, 테메스분들과 다른 분들께서 애써주셔서 말끔히 정화하고 돌아왔습니다. 그쪽은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다친 기사가 화를 털어내지 못했는지 씨근덕대며 옆을 지나갔다. 딱 봐도 마수 토벌이 아니라 주먹다짐을 한 것 같았다.

뒤늦게 에스코트를 받아 내린 영애들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특히 방금 다친 기사 중 테메스도 있었는데 한 팀인 지밀의 표정은 너무 어두워 거의 땅으로 꺼지기 직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지만 레페 신관이 정말 지쳐 보여서 따로 묻지는 못했다.

* * *

사건의 정황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 마르마티가 알려주어서였다.

“테메스와 오브가 싸움이 붙었었던 것 같습니다.”

“싸움이요?”

역시나. 주먹다짐으로 인한 상처였다.

“처음부터 잘 맞춘다 싶긴 했습니다. 의견 조율 중에 뭔가 터진 모양이에요. 엘가가 먼저 덤비는 바람에 일이 좀 커진 것 같습니다.”

“……오브들은 어떤데요?”

칼리프와 이든 노크는 리티아와 합류를 했었던 터라 그 나머지가 다른 일행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 괴물들이야 쉽게 다치겠습니까. 슬쩍 봤는데 멀쩡하더라고요. 이쪽만 혼자 줘 터진 것처럼 보일 정돕니다.”

“아…….”

“그래도 솔직히 첫날부터 누구 하나 터질 줄은 알았는데 늦게 터진 거라고 생각해요. 성기사 중에 그 누구도 오브와 협정을 맺는 걸 반기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곤도르 경은 크게 불쾌해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기야 상극 중에서도 상극인 성기사와 오브니 호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게 시작일지도 모르겠네요.”

대놓고 주먹다짐이라니. 아무래도 이제 삐걱거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 * *

노지에서 천막을 쳐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해졌다.

다른 일행들이 저녁으로 배를 채우고 바로 신전을 떠난 시간은 거의 10시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기서 더 움직이면 새벽에 천막을 쳐야 하기에 아예 발이 묶인 상황이 됐다.

결국 신전 뒤편 공터에 기사들이 빠르게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신관들이 머무는 숙소를 간신히 빌려 후보들에게 배정했지만 두 개뿐이라 그마저도 두 명, 세 명씩 나눴다.

“몬트 공녀님, 괜찮으시면 저와 좁은 방을 쓰시는 게 어떠세요?”

“아, 괜찮으시면 그렇게 하죠.”

“그럼 저와 공녀님이 이 방을 쓸게요. 넓은 방은 세 분이 쓰시는 게 좋겠어요.”

유디트와 손을 잡긴 싫었지만 로아 캐번디시와는 더 가까이하기 싫었으므로 다시 한번 제게 권하는 유디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둘이 좁은 방을 쓰기로 했다. 그야말로 가시방석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테메스가 주먹다짐을 해 기운이 쪽 빠진 지밀은 미젤라의 대답에 겨우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넷 중에 지금껏 그나마 가장 활달한 편이었던 사람이라 축 처진 모습이 퍽 안타까워 보일 지경이었다.

“……영애, 지금 안쪽에 비었더라고요. 지금 가시는 게 좋겠어요.”

“아, 고맙습니다.”

리티아가 씻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유디트가 바톤터치를 하듯 나갔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오브들의 관리를 맡은 칼리프도 깨나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분명히 마차에서 내릴 때 다른 오브들도 보이진 않았는데. 또 펠루가가 멀쩡한 걸 확인했다는 걸 보면 신전 안에 있는 건 분명했다.

칼리프에게 상황을 물어보려고 해도 오늘은 유디트가 옆에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선 안 되고.

무엇보다 오늘은 불편한 관계 속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 리티아는 조금 더 빨리 잠들기 위해 좁은 침대 위에 벽을 보고 모로 누웠다.

* * *

다음 날 아침.

엘가 테메스의 얼굴은 더욱 처참해졌다.

어제는 멍과 피딱지가 있더니 오늘은 더더욱 부어 눈이 보이지 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분명히 신관들이 치료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안 한 이유가 궁금했다.

결국 화가 난 레페 신관이 평소보다 딱딱한 음성으로 엘가와 기사들에게 주의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부터 장난 아닌데요.”

리티아가 가까이 다가온 마르마티에게 물었다.

“얼굴 보셨어요?”

“네……. 정말 괜찮으신 거죠? 왜 치료를…….”

“레페 님이 어제 일부러 누구도 치료해 주지 말라 그랬답니다. 은근히 독하신 곳이 있어서요.”

“아, 그래서.”

정말 화나셨구나. 저래서는 앞도 안 보일 것 같은데. 분위기마저 여전히 착 가라앉아서 이래서야 오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곧 마차에 올라타면 네다섯 시간을 마차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펠루가 경은…… 절대 싸우지 마세요.”

“저 말입니까?”

“네…….”

“설마 질 것 같아서?”

리티아가 얼른 손을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수습을 제가 해야 할 것 같으니 한 소리였다. 지금도 지밀 로베르가 죽어가고 있는데 세 명 중에 누구 하나라도 싸웠다간 리티아는 정말 땅을 파고 들어갈지도 몰랐다.

“농담입니다. 저는 평화주의자인 편이에요.”

“너무나 안심이 되네요.”

“그렇습니까?”

“……근데 저희 좀 눈치가 없는 것 같은데. 이만할까요.”

둘만 들리게 말을 하곤 있지만 어쩐지 그랬다.

펠루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아뇨, 자업자득이죠. 저놈들 때문에 제가 어제 땅바닥에서 잤는데요. 이불도 없었어요. 더 씹어도 됩니다. 솔직히 묻어버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말투에 점점 분노가 차올라 나중에는 짜증이 팍 났는지 땅바닥에서 밤새 고통을 받은 자신의 허리를 매만졌다.

신전을 떠날 때쯤에는 레페 신관도 화가 풀렸는지 다친 기사들을 직접 치료해 주었다.

퉁퉁 불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멍도 사그라들었지만, 얼굴에는 창피한 기색이 가득했다.

“자, 늦지 않게 출발합시다!”

손뼉을 짝짝 치며 레페 신관이 어서 출발하자 재촉했다.

리티아는 마차에 올라타면서도 잠시 멈춰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칼리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쉬었다 가는 것 같습니다.”

곤도르가 바깥 창문을 확인하고 마차 문을 열었다.

신전에서 떠나온 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얼음 산맥이라고 부르는 산맥 바로 아래 지역이라 여름인데도 겨울처럼 찬바람이 불었다.

“겨울 같아요.”

리티아는 멀리 보이는 산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얼음 산맥이라는 이름답게 새하얀 얼음으로만 뒤덮여 있었다. 심지어 조금의 바위나 나무조차 이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저 산맥을 한 바퀴 다 돌려면 쉬지 않고 마차를 움직여야 열흘이 걸린다고 했다. 그만큼 크고 너무 높아 하늘과 맞닿은 것 같다더니 정말 그랬다.

“저 산맥을 넘으면 또 사막 같죠.”

“그쪽에도 사람들이 많이 사나요?”

“아뇨, 소수 민족만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갈 일이 없겠지만 사막치고 꽤 좋은 풍경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신기하네요.”

웨이타스의 일정은 바로 다음 목적지까지. 그리고 바로 다음 구역으로 완전히 넘어가기 때문에 일행이 저 산맥 너머 사막에 갈 일은 없었다.

어제 천막을 치고 땅바닥에서 자기도 했고 그 후로 두 시간을 마차만 탔기에 사람들이 큰 천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기 시작했다. 앉을 의자조차 적어 맨바닥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이다.

“공녀님. 조금이라도 앉아 쉬십시오. 서서 버티다가 나중에 다리만 아픕니다.”

“그럴게요.”

막 리티아가 자리에 앉는 순간이었다.

산맥 쪽에서 우르릉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얼음이 녹아내리나 봅니다.”

“천둥 치는 줄 알았어요.”

다시 우르릉. 우르릉.

그런데 이상하게 산맥이 가까워져 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무리 커도 그렇게 산맥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나. 하지만 정말 뭔가 아까보다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르릉!

벼락 치듯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처 가장 큰 나무가 우지끈 무너져 내렸다.

“…….”

“설……마.”

리티아의 눈이 불안하게 움직이는 산맥을 따라 움직였다.

“대형 정렬!”

“다들 일어나!”

누군가 갑자기 크게 외쳤다.

동시에 매트에 앉아 편히 쉬던 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검을 들었다. 챙, 챙 날카로운 소리가 퍼졌다.

움직이는 산맥이 아니라 거대한 마수 한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짜 쉴 틈을 안 주냐.”

산맥처럼 웅크려 있던 마수가 포효하듯 팔을 펼쳤다.

고릴라와 곰을 섞은 듯한 모양새에 이빨은 사람 하나를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날카로웠다.

얼음 산맥처럼 새하얀 몸은 마치 얼음을 장벽처럼 둘러 단단해 보였다.

지금껏 본 마수를 다 합쳐도 될 만큼 커다랬다.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마세요, 공녀님.”

“제 뒤에 계십시오.”

별말이 없던 곤도르까지 리티아를 막아서듯 보호했다.

쿵! 크아아아악!

마수가 포효하며 이쪽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Chapter6. 돌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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