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 *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리티아가 몽롱하게 잠에서 깼다.
대신전에서 내내 몸을 바짝 긴장시킨 채 기다려서 그런지 마치 추운 곳에서 오래 머물다 온 사람처럼 피곤하고 근육통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구지.’
에밀리아에게 분명 깨우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려고 눈을 뜨려는데 무게추처럼 무거운 눈꺼풀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누군가 계속 리티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무리 잠결이라도 칼리프가 아니라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다.
리티아가 가까스로 눈을 억지로 떴다. 더 잠을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연신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깼구나.”
“아, 언제…….”
엘라르였다. 분명히 리티아가 에밀리아에게 분명히 잔다고 말해달라고 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에밀리아가 말을 안 했을 리는 없는데 왜 방 안에 들어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네가 왔다길래 걱정이 돼서. 더 자.”
리티아가 완전히 잠에서 깨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엘라르가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니야.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몸은 괜찮아? 큰일이 있었다면서.”
아, 소식을 듣고 왔구나. 아무리 오빠라도 다 큰 동생이 잠옷 차림으로 자고 있는데 들어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에밀리아를 무른 모양이었다.
아무리 에밀리아라도 어려웠겠지 싶어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놀란 건 놀란 것이었다.
리티아는 엘라르가 끌어와 앉은 의자에 걸린 숄을 얼른 집었다. 여름이라 덥긴 하지만 그래도 입는 게 나았다.
“응, 괜찮아. 나는 안전하게 있었어. 다른 사람들이 많이 다쳐서 그게 좀…….”
앉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엘라르가 익숙한 듯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리티아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빗질하듯 빠르게 정리했다. 그제야 그나마 엘라르의 머리와 비슷하게 차분해졌다.
“아, 머리 정리.”
“괜찮아. 여기 나밖에 없는데 뭘.”
잠시 정적이 일었다.
아무리 친한 남매 사이를 상기시켜도 어색한 공기를 없앨 방도가 없었다.
“혹시 할 말이 있어서 왔던 거야?”
리티아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네가 걱정되어서.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며. 이렇게 위험한데 꼭 다시 가야 해?”
“응? 그래야지.”
“네가, 안 갔으면 좋겠다. 이보다 더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렇지만 안 가면 지금까지 한 게 다 헛수고가 되잖아. 괜찮아, 오빠. 여기서 소문만 나서 그렇지, 웨이타스에 있는 동안 이번 빼고 위험한 일은 거의 없었어. 심지어 신전 안에서 연회까지 열었고, 마을 축제도 구경했었어.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토벌 때문에 병력 원정까지 보내셨다며.”
“…….”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안 가. 걱정하지 마, 오빠. 정말 괜찮아. 신관들도 나를 유력 후보로 보고 있어.”
자다 일어나서 설득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정말 꼭 가야겠냐고 표정을 굳히던 엘라르도 마지못해 끄덕였다.
“너무 억지로는 하지 마, 응?”
“응, 알았다니까. 나 이제 옷 갈아입어야 해.”
리티아는 아예 엘라르를 밖으로 떠밀었다.
“이따 저녁때까지는 일 마무리할 테니까 같이 저녁 하자.”
“응,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엘라르가 완전히 가고서야 리티아가 몸에 힘을 쭉 뺐다.
잘 자고 일어나서 이게 뭐람.
다시 기운이 빠진 리티아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에밀리아.”
“네, 아가씨……. 제가 주무신다고 말씀드렸는데 아가씨 얼굴을 꼭 봐야겠다고 하셔서…….”
밖에서 줄곧 기다리고 있던 에밀리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에밀리아가 일어나서 보시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꼭 얼굴을 봐야겠다고 했단다.
“알았어. 오빠가 고집을 부렸네. 괜찮으니까 옷 좀 가져다줄래? 가벼운 걸로.”
“네, 아가씨! 얼른 가져올게요.”
역시 집이라고 휴식처가 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 * *
“성하께서 네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구나.”
이틀이 지났다.
집에 돌아온 날도, 어제도 셋이 함께 저녁 식사를 했는데 오늘 저녁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리티아는 집에 머무는 동안 휴식을 취하거나 서재에 가서 있는 등 가볍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 대신관에서 연락이 올지 모르니 최대한 집에 머물기로 하고 일부러 외출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 신전에 다녀온 몬트 공작은 어제보다도 더 표정이 좋아 보였다.
“성하께서요?”
“이대로만 하거라. 이변이 없다면 네가 테니아라고 신탁이 내려오지 않겠느냐.”
“아직 이른 것 같아요.”
“넌 반드시 테니아가 되어야 해. 아니, 그랬으면 좋겠구나.”
“아버지, 리티아 온 지 이제 며칠밖에 안 지났습니다.”
“……그래. 내가 너무 급했던 모양이로군.”
뒤늦게 엘라르의 말에 몬트 공작이 명령 대신 말을 바꾸는 게 느껴졌지만 리티아는 모른 척 잔을 가져와 입을 축였다.
어쩐지 오늘 저녁도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저녁 식사 후에는 에밀리아가 챙겨준 소화제를 먹고 정원을 나섰다.
이제 리티아의 침실 밖 작은 정원은 리티아의 작은 도피처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
에밀리아까지 무르고 나와 있는데 부스럭 소리가 났다.
냐- 익숙한 소리에 한쪽 간이 의자에 앉으려던 리티아가 벌떡 일어났다.
“나비야. 어디 있지?”
리티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고양이 소리가 났는데 부스럭 소리가 한 번 나고서 고요해졌다.
이내 다시 냐- 하면서 검은 고양이가 그녀 앞에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리티아가 환하게 웃었다.
“나비야. 잘 있었어?”
먀- 그릉그릉거리며 리티아의 다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꼬리까지 감으며 고양이가 반가움을 나타냈다.
에밀리아가 말하기로 그간 오지도 않았다고 하더니. 그녀의 말대로 정말 리티아가 정원에 나오자 찾아온 것이다.
우연이겠지만 리티아는 꼭 저만 찾는 고양이 같아서 기뻤다.
리티아는 멋대로 나비라고 이름을 지은 고양이를 안아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연신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요새 안 왔다며.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이상한 거 주워 먹고 그런 건 아니지?”
늘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털도 그렇고. 이곳에서 자주 나타나는 고양이인 걸 보면 확실히 여기 어딘가 시종들이 키우는 고양이 같은데. 에밀리아는 또 여기서밖에 못 봤다고 하니 도통 어디서 사는 고양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턱을 만져주자 고양이는 대놓고 앉아 그릉그릉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리티아는 아예 의자에 등을 기대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데 열중했다. 조금도 걸리지 않는 부드러운 털결이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기분이었다.
“…….”
고양이의 부드러운 검은 털을 보고 있으니 또 자연스레 칼리프가 떠올랐다.
여전히 상황에 오브의 이야기는 쏙 빠져 있다. 리티아가 이곳에만 있으니 당연히 칼리프를 보지도 못했다. 몬트 공작과 엘라르가 계속 저택에 머물다시피 해 리티아가 먼저 찾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따금 이렇게 머릿속으로 그를 쫓는 게 정말 자신의 마음인지도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계속 말은 안 해도 그와 붙어 있다시피 하다 떨어지니 꼭 웨이타스에서 칼리프와 함께했던 비밀스러운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 * *
이튿날.
리티아는 오전부터 대신전으로 향했다.
여유롭게 굴던 어제와 달리 아침 일찍 대신전에서 연락이 왔다. 테니아 후보를 모두 소집하겠다는 말에 부랴부랴 마차에 탔는데 다른 내용은 전해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건지, 아니면 모두 치료가 끝난 상황에 또 다른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근래 신전과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던 몬트 공작이 리티아에게 따로 알려준 것도 없었다.
그들을 소집한 이유는 대신전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지밀 로베르 님께서 테니아 후보 자리를 반납하셨습니다.”
모인 대신전 회의실에 지밀 로베르만 안 보인다 싶더니 레페 신관이 소식을 알렸다. 어제저녁, 지밀 로베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테니아 후보 자리를 포기하겠다 말을 전했다고 했다.
다른 소식이 있을 줄 알았지 스스로 테니아 후보 자리를 포기하는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다. 지밀 로베르는 다소 호들갑을 많이 떠는 편이었지만 그녀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테니아를 향한 열망이 강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부류는 아니지만 활동 자체만 봤을 때 계속 로아 캐번시디와 붙어 다니며 열심히 한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미젤라 플란트가 레페에게 물었다. 눈을 반짝이는 게 마치 이런 소식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직 활동이 재개되진 않았지만 오늘부로 지밀 로베르 양은 후보에서 제외되고 네 분께서 활동을 하시게 됩니다.”
거기다 떠나기 전 테니아에게 받은 축복과 가호의 힘까지 회수하고 모든 혜택과 권한에서 빠지게 된다고도 했다.
내내 고생만 했지 혜택과 권한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아마도 테메스 이야기인 것 같았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 중 가장 허탈해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녀의 테메스였다.
지밀 로베르가 테니아 후보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그녀가 골라 그녀만을 따랐던 다섯 명의 테메스들은 자동으로 테메스 자리가 박탈되고 일반 성기사로 돌아간다.
그녀가 고른 다셧 명의 기사 모두 손꼽히는 실력자들로 차기 테니아를 지키는 테메스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지밀 로베르의 테메스였던 말락이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