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룻밤 상대가 흑막이었던 것에 관하여-69화 (69/70)

69화

* * *

리티아는 오전부터 단장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제, 공작저로 황태자의 서신이 또 한 번 도착했다.

그날 만남 이후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기도 했고, 당분간 너무 바빠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릴 것 같다 인사도 하고 나왔는데 황태자의 방문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대신전의 방문으로 바쁘다고 핑계를 댈 생각이었으나-

「황태자 전하가 방문한다고 하니 준비하고 있거라. 간단히 인사라도 나누고 짧게 대화라도 하려무나.」

상냥하게 권하긴 했지만 단순한 제안이 아닌 명령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리티아는 하는 수 없이 황태자와의 만남을 위해 기다렸다.

“답답하세요?”

“아니, 괜찮아.”

“이거 더 달까요?”

“안 달아도 될 것 같은데……. 이제 마무리해도 되지 않을까?”

“머리만 좀 더 만져 드릴게요.”

본래 만남의 목적은 몬트 공작을 만나는 것 같은데, 황궁에서 만나는 게 아닌 공작저에 오면서 리티아에게 따로 또 서신을 보낸 것을 보니, 그녀와의 만남을 위해 일부러 황태자가 직접 몬트 공작저로 움직인 것 같았다.

바쁜 와중에 얼굴을 보여줄 수 있겠냐는데 리티아는 그걸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몬트 공작은 언제고 황태자와의 사이를 유지하는 걸 바라고 있으니까.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불러온다는데 몬트 공작은 더 욕심을 부리면 부렸지, 덜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 내키지 않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이 그저 마주보고 있는 건 문제가 없지만, 어쩐지 첫 만남을 떠올려 보면 황태자 쪽은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가씨,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좀 전에 오셔서 주인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고 있대요.”

“그래?”

리티아가 단장을 하는 사이 이시안이 도착해 몬트 공작과 접견실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 머리 어떠세요? 정말 잘된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도 예쁘게 잘된 것 같아.”

“그렇죠? 그렇죠? 황태자 전하께서 오시는 날 딱 이렇게 예쁘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에밀리아는 아까부터 훨씬 들뜬 상태였다. 황태자가 리티아와 소꿉친구이기도 하고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기뻐하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단장에 힘을 준다 싶더니 수시로 왔다갔다거리며, 리티아의 단장에 문제가 없는지, 부족한 곳이 없는지 계속해서 살폈다.

“에밀리아. 이제 그만해도 돼.”

“헤헤, 오늘 너무 예쁘신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전에 아가씨께서 그러셨잖아요. 황태자 전하와 매일 같이 놀았다고. 지금도 꾸준히 사이가 좋으신 게 너무 보기 좋고 신기해요.”

“신기할 것까지야.”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릴 적 친구들이 곁에 많았거든요? 그런데 2, 3년 사이에 정말 다 없어졌어요. 다들 바빠서, 멀리 가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이제는 만나기가 힘들어요. 공작저 사람들 모두 친하긴 하지만요. 그래서 정말 두 분의 우정이 대단하시다고 생각해요!”

“나도 크게 다르진…….”

“그리고, 그리고 만약 두 분께서 약혼이라도 하시게 되면…… 정말 그건 운명적인 일 아닐까요?”

그 말에 리티아가 에밀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무 방방 뜬 에밀리아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평소와 확실히 다른 에밀리아는 정말 들떠 다른 생각을 모두 잊은 모양인지 두 손을 모은 채 허공을 보고 있었다. 이미 감동에 젖어 저 먼 미래까지 상상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에밀리아.”

“네?”

“그럴 일은 없어, 나는 황태자 전하께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 에밀리아, 그러니 네가 생각하는 미래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자 에밀리아가 두 손으로 합! 제 입을 틀어막았다.

“죄송해요, 제가 그만…… 정신을 못 차리고.”

“괜찮아. 이제 다시 안 그러면 되지.”

“네, 아가씨. 제가 정말 미쳤었나 봐요.”

에밀리아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다.

“잠시 정원에 있어야겠다. 아버지께서 이야기 끝나시면 에밀리아 네가 알려줘.”

“네, 아가씨! 딱 맞춰서 알려 드릴게요!”

리티아는 에밀리아를 뒤로하고 정원으로 나왔다.

침실 앞에 딸린 곳으로는 많이 나와봤는데 본관 정원을 돌아다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쪽으로는 외출 외에는 갈 일도 없고 여기서 조금 더 나와서 뒤로 가면 리티아가 빠졌던 호수가 나오기 때문에 공작저 사람들은 리티아가 호수 쪽으로 가는 걸 무척이나 꺼려했기 때문이다.

리티아가 그쪽 방향으로 몸을 돌리기만 해도 시종들이 바짝 몸을 굳히고 사리는 바람에 리티아는 그게 신경 쓰여서 일부러 더 본관 정원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정원은 리티아가 처음에 봤을 때보다 훨씬 울창하게 변해 있었다.

잎은 더 진해졌고, 알록달록 색이 진한 꽃들이 가득했다.

“…….”

솔직히 이제 죄책감 같은 건 모르겠다.

어쩌면 죽기 전 리티아는 황태자와의 결혼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황태자는 반드시 황제가 될 것이고, 황후의 자리는 그 어떤 자리보다 버거운 자리긴 하지만 안정적인 데다, 또 그녀가 오랫동안 제 편이었던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삶을 꿈꿨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무리 이건 소설 속 한 인물이라고 해도 지금 리티아 자신이 숨 쉬는 지금, 단순히 종이 같은 인물이라 볼 수 있는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눈을 떴을 때 이곳이 어딘지 떠올려야 했기에 소설 속이라고 인지를 한 상태였지만 심장이 뛰고, 불안함을 느끼고, 기뻐하고 온갖 감정들이 매일 날뛰는데 그저 활자 속 단순한 역할 하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마 그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면 적응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이다.

제 존재가 누구인지 스스로 정립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미쳐서 원래 리티아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을지도.

그 누구보다 살고 싶은 욕구가 큰 자신이었지만, 그래서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내 자유를 스스로 얻겠다고 자신했지만, 사실은 오랜 병상 생활 탓에 정신력이 나약했다는 걸 리티아 자신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리티아가 알고 있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

그런 세상을 책으로 먼저 접했노라 어느새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티아.”

리티아를 부르는 소리에 리티아가 휙 몸을 돌렸다.

“전하.”

리티아가 가슴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목례를 했다.

“잘 지냈어?”

“네, 전하께서는요? 접견실에 계신다고 해서 안 그래도 제가 때맞춰 가려고 했는데…….”

“응, 네가 여기 있다길래 내가 먼저 가겠다고 했지.”

이시안은 오늘도 여전히 친절하고 싱그러웠다.

이번 일에 이시안도 병력을 통솔하느라 계속 바빴다고 들었는데 오늘 모습은 여유롭기만 했다.

“전하께서 이끄는 기사단 소식은 들었어요. 전하께서도 완전히 복귀하신 건가요?”

“아니, 우리는 다음 주까지는 좀 상황을 봐야 할 것 같아. 잠시 황궁에 일이 있어서 복귀한 참이었거든.”

“아…… 그럼 바쁘실 텐데.”

그러자 이시안이 재킷 안쪽에서 뭔가를 꺼냈다. 길쭉하고 작은 상자였다.

“이거, 온 김에 너한테 주고 가려고.”

“……저한테요?”

선물은 전혀, 정말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리티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이시안이 귀 끝을 살짝 붉히며 끄덕였다.

“어쩌다 운 좋게 구하게 됐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고.”

“아, 저는…….”

리티아가 쉽사리 받지 않고 머뭇거렸다. 작은 선물일지라도 받으면 몬트 공작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까 에밀리아가 약혼이니 뭐니 한 것 때문에 행여 이로써 오해라도 가질까 부담이 됐다.

이시안이 머뭇거리는 리티아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냥 가벼운 선물이야. 네가 후보로 발탁됐을 때도 따로 축하도 해주지 못하고 나중에 만났잖아. 겸사겸사, 부담 주는 거 아니니까 그냥 받아줘, 응?”

“…….”

리티아가 한참 만에야 손을 내밀었다.

허공에 이시안이 계속 선물 상자를 내밀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열어봐. 네 마음에도 들 거야.”

이시안의 말대로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서 작은 목걸이가 나왔다. 리티아의 눈 색과 똑같은 새파란 보석이 달린 목걸이였다. 새끼손톱 정도만 한 귀여운 물방울 모양이었다. 사파이어 같은 보석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안쪽에 새하얀 점 같은 빛이 발광하고 있었다.

보석 안에서 빛이 발광한다니?

“신기해요, 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데.”

“정령석이야. 이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들른 영지에서 운 좋게 봤지 뭐야. 때마침 파란색이라서. 정령석 중에서도 파란색은 희귀하다고 하더라고.”

정령석이라고? 보석보다 훨씬 더 가치를 갖는 게 이 정령석인데. 과거에는 광산이나 숲에서 가끔씩 발견이 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마석처럼 특별한 힘이 담긴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전혀 가벼운 선물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정령석이요? 제가 갖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인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렇다고 내가 하고 다니면 아마 하루도 못 가 끊어질걸. 받아주라. 그냥 나는 많은 거 안 바라. 너와 예전처럼 그저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고, 가끔씩 이렇게 만나서 인사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좋아. 네게 큰 부담을 주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정말 다른 의미 없이 네게 주고 싶은 거야. 그러니 받아주면 안 될까? 우리 어렸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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