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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번에도 도망을 칠 건가? (8/154)


#8 이번에도 도망을 칠 건가?
2021.07.25.


사방에 그레타가 내뿜은 찻물이 튀었다.

그건 황제 앞에서 실례인 것을 떠나 정말 추하고 못 볼 꼴이어서, 국왕은 자신이 발가벗기라도 한 양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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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아까부터 대체 왜 그리 경박하게 구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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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큽! 그, 것이……. 큭! 쿨럭!”

그레타의 귀가 터질 듯이 붉어졌다.

헤르한은 빤히 그레타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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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초란 말로 제가 왕녀를 놀라게 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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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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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름 놓으시지요. 섭취량만 잘 지키면 심신 안정에 탁월한 약초로 쓰입니다. 독이 되는 건 무식하게 양이 과할 때의 얘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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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하하. 신기한 풀이로군요. 독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화제를 돌리고자 타란 2세가 황제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그보다 더 눈치 없는 질문이 또 있을까?

그레타는 차마 멍청한 제 아버지를 탓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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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와 목구멍을 마비시켜 말을 못 하게 만들고 정신 또한 혼미하게 한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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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렇군요. 참 박식하십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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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독초에 대해 박식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한데.”

그레타는 뜨끔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헤르한의 눈길이 자신을 훑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레타의 머릿속은 백지장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하는 의문에 답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 그저 이게 다 꿈이기를. 어서 이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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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병실의 죄인이 깨어났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헤르한은 그때 비로소 본론을 꺼내 들었다.

기가 찰 정도로 영리한 수법이었다.

네가 저지른 계교 따윈 이미 다 알고 있다고, 그러니 다시는 우습게 덤빌 생각 하지 말라고, 상대의 혼을 다 쏙 빼놓고서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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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그렇지 않아도……. 일전의 실수에 대해선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폐하께 만회할 방법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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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얘기가 잘 통하겠군요. 국왕. 나는 이번 일의 빠른 마무리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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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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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간 원수가 모두 이 자리에 있으니 굳이 복잡한 절차를 밟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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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 건……. 혹시, 당장 그 여잘 처형하길 원하신다는……?”

헤르한의 말에 국왕이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로 물었다. 그 골칫덩이를 당장 치우고 제 죄를 영영 덮을 수만 있다면 여기 이 자리에서 춤이라도 출 수 있다는 기세였다.

하지만 그건 참 우스울 정도로 헛된 기대라는 걸 그레타는 잘 알았다.

황제가 할 대답은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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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의 일신에 관한 모든 처리 권한을 당장 위임받기를 원합니다. 그 여자에 관해서는 이제부터 모두 우리 제국 측이 알아서 할 테니, 국왕께선 더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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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 아니! 황제 폐하! 그,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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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께선 이견이 있습니까?”

헤르한은 국왕의 반발 따윈 가볍게 무시하고 그레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레타라고 대꾸할 수 있는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황제에게 보기 좋게 ‘물먹은’ 덕에 혀가 둔해진 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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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진 게임이야.’

자신이 리엘라에게 독을 썼다는 걸 들킨 그 순간, 과거 일의 배후에 왕실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 들켜버린 마당에 리엘라에게 덮어씌우려는 작전이 더 통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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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그레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목이 뻐근했다. 클라디 차를 마신 것 때문인지, 아니면 끔찍한 패배감이 목구멍을 틀어막아서인지.

*

리엘라는 그날 저녁에 바로 왕궁 동관 병실에서 나왔다.

리엘라가 옮겨갈 목적지는 별궁이라고 발표됐지만, 저녁까지는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실제로 제국 쪽 수행원들이 리엘라를 데리러 왔을 때, 병실의 궁의뿐 아니라 왕궁 시종과 대신들까지 전부 나와 리엘라를 실은 마차가 별궁 담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 모두는 끝까지 어리벙벙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당연히 처형장으로 끌려갈 줄 알았던 죄인이, 어째서 제국 황제가 머물고 있다는 별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그 속사정을 분명히 아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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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부터 꾸준히 독을 마신 듯하군요. 목숨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가진 약으로 간신히 해독이 가능한 상태이긴 한데…….”

별궁, 소박한 침상이 놓인 방 안.

진찰을 마친 의사의 말에 헤르한 쪽 참모진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온은 쓰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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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탓입니다. 외부인의 출입은 다 막았는데, 궁의를 통해서까지 독을 먹였을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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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짧게 대답하며 아시온의 자책을 덮어버린 건 헤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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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을 뻔히 보고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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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나지 않게 사람을 말리는 독이니까. 아마 그쪽에선 우리가 이걸 알아챌 줄 몰랐을 거야. 맹독 대신 클라디를 쓴 것도 일단은 이 여자가 증언하는 걸 막을 요량이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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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디라고 해도 계속 썼으면 이 여잔 죽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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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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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결국은 죽일 작정이었겠죠. 그래야 자기들 죄가 다 묻힐 테니까.”

아시온의 말에 헤르한은 입을 다물고 침대 위 잠든 리엘라를 빤히 보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죽었을 여자.

참 웃긴 일이었다.

작년 가을 르 데르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도, 이 여잔 ‘조금만 늦었더라면 죽었을 여자’였는데.

반년이 남짓한 시간 동안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했건만 이 여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 일관적이었다.

일관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고, 일관적으로 한심한 꼴이고. 또 일관적으로…….

괴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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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넬. 그 여자를 잘 살펴라.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으니 독은 천천히 풀도록 해. 해독제도 급히 쓰면 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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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폐하.”

그 당부를 끝으로 헤르한은 몸을 돌렸다.

왠지 리엘라 블리니테를 보고 있자면 눈길이 빨려들고 잇새가 악물리는 느낌이라.

그 정체 모를 조바심이나 안달이 퍽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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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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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때 방을 나오는 헤르한에게 따라붙은 건 아시온이었다.

아직도 제 탓이 어쩌고 고해성사를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가 꺼내 물은 건 좀 의외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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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리엘라 블리니테와 제가 모르는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의외가 아니라 정곡을 찔렀다고 해야 하나.

헤르한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고개를 들자 아시온은 목을 긁적이며 중언부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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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제 우리가 저 여자를 챙길 이유는 없잖습니까? 왕실이 바보 같은 짓을 저질러준 덕택에 죄를 추궁할 명분도 충분히 생겼고요. 그리고 그걸 떠나서도 좀, 뭐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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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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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상하잖습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폐하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으니 여자를 무사히 살려만 다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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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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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뭐 대충 그런 뜻이잖아요. 저도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네. 바보는 아니었네.

헤르한은 실없이 웃을 뻔한 걸 참았다.

아시온에게 리엘라 블리니테에 관한 일을 영영 비밀로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이 웃긴 나비 석상이 놓인 왕궁 복도에 서서 잔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으니까.

헤르한은 대신 말을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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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 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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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말 돌리지 마십시오. 절대 안 넘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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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두통이 더 심하군. 아까는 환청도 들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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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말이십니까? 어째서요! 가을부터 바꾼 약이 그동안 잘 들었던 거 아니었습니까? 약 안 드셨죠? 그러고 보니 약 드시는 거 못 본 거 같은데?”

그렇지. 이 얘기엔 이 반응이 나와 줘야 제맛이지.

헤르한은 그제야 피식 웃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

리엘라는 혼몽한 꿈속에서 헤맸다.

꿈은 뒤죽박죽이었다. 파비안이 나와서 자신을 안아주기도 하고, 그레타가 나와서 제 뺨을 치기도 하는 꿈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나열되기도 하고, 무엇이 그리 슬픈지도 모르면서 하염없이 울고 싶기도 했다.

‘기억’인지 아니면 그저 ‘꿈’인지 모를 장면들은 계속 이어졌다.

꽃비가 날리는 곳 한가운데로 내던져진 것.

거기서 수많은 사람의 섬뜩한 시선이 모두 저에게 향했던 것.

누군가의 품에 안겼던 것.

싸늘한 공간에 갇혀 자고 깨기만을 반복했던 것.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가장 마지막으로 리엘라가 떠올린 건 목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데 불을 삼킨 것처럼 목이 뜨겁고 아파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던 그때.

꼭 감옥같이 갑갑한 육신 안에 갇혀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며 속으로만 울어야 했던 그때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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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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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드디어. 아직 일어나면 안 됩니다. 풀지 못한 독이 몸에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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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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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목소리가 안 나올 겁니다. 당황하지 말고 진정해요.”

누군가 나긋하게 말해주었지만 그것이 이제야 깨어난 리엘라를 진정시킬 순 없었다.

리엘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찢기는 듯 아픈 데다가 사방이 낯선 공간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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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 ……아아! 사…….”

리엘라는 울음에 뒤섞인 목소리를 마구 쥐어짜냈다.

제대로 소리가 나오질 않으니 가슴을 치고 몸을 비틀었다.

그걸 본 주변의 이들이 달려들어 리엘라의 팔다리를 붙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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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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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꽤 성가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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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면 흥분할 거라고 했잖습니까. 그러게 살짝 묶어놓자니까.”

주변에서 작은 불평도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리엘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왕궁에 온 뒤로 줄곧 당해왔던 멸시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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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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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좀 진정하라니까요.”

이젠 다소 신경질적이기까지 한 대꾸가 튀어나왔다. 리엘라는 그래도 그들을 굳이 뿌리치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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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봐!”

설마 도망이라도 치려는 건가 하고, 몇몇이 급하게 무기를 비롯해 리엘라를 구속할 만한 끈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엘라가 달려간 쪽은 방문 쪽이 아니라 오른쪽 벽면, 작은 테이블이 놓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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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대체 무슨 속셈…….”

이래서 죄인은 죄인인 건데, 하고 언성을 높이던 제국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테이블 위에서 뭔가를 붙잡고 비틀거리던 리엘라가 돌연 그에게 뛰어와 내민 종이 한 장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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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방 안이 숙연해졌다.

리엘라를 두고 인상을 찌푸리던 이들 모두가 차마 가슴이 먹먹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종이를 건넨 후 힘이 빠진 리엘라는 바닥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그 상태로 잘게 흐느꼈다. 목이 아파서 울음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리엘라는 또 제 가슴을 마구 움켜쥐었다.

침묵하는 이들 사이로 리엘라의 사무친 울음소리만 퍼져나갔다.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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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폐하.”

‘폐하’.

그 말에 리엘라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야 자신이 눈뜬 곳이 황제의 영역 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르한은 일부러 리엘라가 있는 쪽은 보지 않은 채 기사에게로 먼저 직행했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종잇장에는 절박한 단 한 마디가 쓰여 있었다.

-도와주세요.

흐릿하고 띄엄띄엄 엉망으로 휘갈겨 쓴 글씨. 그것도, 고작 몇 글자 되지도 않는데 벌써 눈물방울을 두 개나 떨구어서 잉크가 잔뜩 번진.

헤르한은 그 메모를 꽉 움켜쥐었다.

어쩐지 가슴 속이 뻐근했다. 무슨 대단한 말을 하겠다고 저리 애처롭게 난리를 치는 건가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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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달라고?”

헤르한의 느린 물음에 리엘라가 몸을 숙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따라 또 눈물이 후드드 떨어져 바닥의 카펫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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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헤르한이 물었다.

냉정한 목소리에 작게 웅크린 리엘라가 서럽게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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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명을 쓴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결백한 것도 아니지. 알고 협조했든 모르고 휘말렸든, 너 역시 공범이란 사실은 변함없어. 그런데 왜. 내가 어째서 널 도와야 한다는 거지?”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앞에 선 것은 제국의 황제였다. 한때 용병단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그로서는, 어떤 사정이 있었건 간에 리엘라가 당장 때려죽일 적인 게 당연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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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수밖에는 없으니까.’

자신을 처형하러 온 이 남자에게.

감히 시선을 마주쳐선 안 될 이 남자에게 괘씸하게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다음 선택지 같은 건 영영 남지 않을 것이었다.

리엘라는 더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싶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도망칠 수도 없는 고통 속에서 이미 충분히 괴로웠다. 또 그렇게. 예전에 당했던 것처럼 바보같이. 남이 만들어놓은 지옥 안에서 죽어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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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질문을 바꿔볼까.”

리엘라가 목구멍까지 뻑뻑하게 차오르는 절실함을 뱉어낼 길이 없어 괴로워하는 그때, 황제가 또 다른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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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와주면 넌.”

도와주신다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리엘라가 대답을 가로챌 생각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 황제의 물음은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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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이번에도 도망을 칠 건가?”

리엘라는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의 눈동자가 상대의 얼굴을 담고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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