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믿지 못할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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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믿지 못할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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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믿지 못할 소문
2021.07.29.
리엘라는 자신이 깨어나기 직전 보았던 장면들이 단순한 꿈이 아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전, 화려하게 치장된 왕궁터 한가운데에서 고개를 들고 보았던 남자. 어째선지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보며 왜 혼자냐고 물었던 바로 그 남자의 얼굴.
작년 가을 르 데르에서 만났던 남자와 비슷한 인상이라고 느꼈었지만, 정신이 흐린 탓에 착각한 줄 알았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여기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난다는 건.
‘그런데…….’
착각이라 여겼던 것이야말로 착각이었다.
금실처럼 빛나는 머리카락. 푸른 안광. 매서운 듯도 다정한 듯도 한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흐릿한 기억 속의 모습과 뚜렷이 겹쳤다.
어째서 여태 알아보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돼.’
리엘라는 아직 달랑달랑 매달린 눈물을 닦아낼 틈도 없이 눈을 크게 치뜨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그녀를 내려보고 있는 헤르한의 눈빛은 제법 오만했다.
나는 널 처음부터 알아보았는데 어째서 너는 이제야 날 알아보느냐고 꾸짖는 것처럼.
“눈빛을 보아하니 이제는 날 알아본 것 같고.”
“…….”
“그럼 이제는 예전처럼 도망칠 수 없다는 것도 자연히 알았을 테고.”
그 말에 리엘라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황제다. 그는 엘슈바이크 제국의 강력한 새 군주다. 푸른 제복을 입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발아래 거느리고, 이 나라의 왕실까지도 제멋대로 쥐락펴락하는, 그런 황제. 황제. 황제…… 라는 것.
생각해보니 그건 그저 ‘또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리엘라에게 닥친 ‘가장 크고 무거운 사실’이었다.
‘이건 정말 말이…….’
목소리가 나왔더라도 입이 열리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 시점에 리엘라는 이미 석상처럼 굳은 상태였다. 남자가 황제라는 걸 알고서도 그를 향해 고정한 시선을 거두지도 못할 만큼.
“그러면 네 대답을 들어볼까? 나는 이미 여러 번 너를 도운 것 같은데. 너는 대체 그걸 어떻게, 무엇으로 내게 갚을 생각이지?”
황제가 대답을 종용했다.
그때의 눈빛이 꼭, 그날 어두운 여관에서처럼 도전적이었다. 당신은 대체 뭐냐고, 마녀라도 되냐고 따져 물었던 그때처럼.
“아. 당장은 말을 못 한다고 했던가.”
헤르한이 손에 든 리엘라의 쪽지를 한번 내려보고는 그것을 접어서 제 가슴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좋아. 그럼 입이 트일 때까지 시간을 좀 주지.”
잡아먹을 듯이 리엘라를 몰아붙이던 헤르한은 그제야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빌. 이 여자에게 따뜻한 식사를 내줘. 카넬. 여자가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잘 보살피고. 황명이다. 모두들 리엘라 블리니테를 보살핌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헤르한은 방을 나가버렸다.
헤르한이 들어서기 전 그랬던 것처럼 헤르한이 나가고 난 뒤에도 리엘라의 침실에 모인 이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까만 해도 리엘라를 성가시게 여기며 차라리 죽기라도 바랐던 이들이, 이제는 모두 얼빠진 눈이 되어서 리엘라를 다른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
그로부터 며칠 뒤.
봄기운이 만개한 리오타 왕궁 안에는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처럼 무성하게 ‘믿지 못할 소문’이 퍼져나갔다.
“장난 아니래요. 완전히 푹 빠지셨대요!”
“에이, 설마요.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진짜라니까요? 황제 폐하가 왕실이 마련한 일정도 다 불참하고 별궁에만 틀어박힌 이유가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어요?”
“어머. 정말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
누군가 어딘가 구석에서 속닥속닥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근처를 얼쩡거리던 할 일 없는 시녀들은 전부 자석처럼 그곳으로 이끌려갔다.
왜요, 왜요, 무슨 얘긴데, 나도 좀 듣자, 하며 따라붙은 이들은 각자가 다른 곳에서 들은 얘기도 같이 퍼 날랐다.
“요즘 별궁 난리잖아요. 제국에서 온 수행원들이 다 달라붙어서 그 여자를 엄청 극진하게 모시고 있다고.”
“그 여자? 리엘라 블리니테 말이에요? 그 죄인? 어머!”
“쉿. 조용히. 누가 그 이름 들을라.”
누군가 쉿! 하는 추임새를 넣었지만 사실상 그건 의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왕궁에서 ‘리엘라 블리니테’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는 곳은 없었으므로.
“이건 진짜 비밀인데. 서궁의 브리가 말하길, 엊그제 제국 쪽 수행원이 침방에도 왔다 갔대요. 여성용 의복을 몇 벌 맞춰달라면서 최고급 실크를 색깔별로 한 무더기씩 놓고 갔다나!”
“와. 정말이에요?”
“네. 누가 입을 건지는 말 안 했다지만, 뻔한 거죠. 뭐. 이제 와서 급히 새 옷이 필요한 사람이 그 여자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와, 대단하네, 장난 아니네 하는 식의 탄성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거기엔 놀라움과 부러움도 깃들어 있었지만 빈정거리는 투도 함께 묻어났다.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얼굴 반반한 여자가 측은함으로 어필해서 높은 분의 마음을 얻는다, 뭐 그런 얘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인가? 자길 죽이려던 암살자인데도 다 용서하고 품을 정도로?”
“생각해보면 영접식 때부터 좀 분위기가 이상하긴 했어요.”
“맞아요! 그랬죠? 황제 폐하께서 대놓고 그 여자 편들고! 어머. 첫눈에 반하셨던 건가 봐!”
“팔자 한번 제대로 고쳤네요. 그 여자.”
속닥거렸다가, 거들먹거렸다가, 종내는 꺅꺅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피우기까지.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산책을 나왔던 그레타 왕녀는 담장 뒤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이를 악물었다.
“저……. 왕녀님……. 이만 돌아가시겠어요?”
“아니.”
그레타의 양산을 든 시녀는 오도 가도 못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그레타는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서 반대편의 이야기를 전부 들어냈다.
‘참 대단해. 네가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 처음부터 파비안이나 꽉 잡지 그랬니? 그땐 멍청하게 당하기만 한 주제에. 하긴. 뭐. 너 같은 인생에도 발전은 있다는 건가.’
리엘라 블리니테. 리엘라 블리니테.
그레타는 그 지긋지긋한 이름을 저주하듯 곱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속으로 악담을 퍼부어 봐도 머리끝까지 뻗치는 노기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왕궁 전체가 그녀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 망할 것의 흔적이 성스럽고 고귀한 자신의 왕궁을 이끼처럼 뒤덮어가고 있었다.
*
“소문이 무서운 줄을 모르고 퍼지고 있습니다. 폐하와 비련의 그녀 사이의 세기의 순애보 말입니다.”
슥. 슥. 헤르한이 앞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서류만 들춰보듯, 아시온 역시 황제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잔소리를 이어갔다.
“오. 아닌가. 황제를 함락시킨 팜므 파탈 그녀와의 치정극이던가요? 듣자 하니 인기는 이쪽이 더 많은 것 같던데?”
참 찰지게도 비꼬는군.
그쯤에서 헤르한은 아시온의 말을 더 무시하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 웃음이 화근이었다. 꾹꾹 말을 눌러가며 흥분을 참던 아시온이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웃으셨습니까,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그럼 너는 재미없어? 난 재미있는데. 내 취향도 치정극. 순애보는 영 시시하잖아.”
“그렇게 농담으로 슬쩍 넘어갈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꼭 진담으로 짚고 넘어갈 상황도 아니야.”
“아뇨. 맞습니다. 진담. 저 그거 꼭 듣고 싶습니다. 정말로.”
아시온의 마지막 말은 협박이자 애원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간청하듯 헤르한에게 매달렸다.
평소였으면 어찌 감히 주군의 몸에 손을 댔겠냐만은, 지금은 그런 것도 무시하고 아예 헤르한의 팔까지 붙들고 질척거렸다.
그러곤 물었다. 대체 ‘리엘라 블리니테’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소문처럼 막장 순애보나 치정극까진 아니더라도 뭔가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처음부터 그 여자를 챙기셨던 겁니까? 이젠 제발 대답 좀 해주세요.”
“글쎄?”
아악!
아시온은 답답함에 몸부림을 치다가 깨달았다. 이쪽에서 답을 얻을 수 없다면 다른 쪽을 공략하는 법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곧장 리엘라 블리니테를 찾아갔건만.
“혹시 예전에 우리 폐하와 어떤…….”
“황제께서 새로 즉위하신 게 작년 겨울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양위를 받으셨다는데 자세히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그걸 다 설명할 순 없고요. 그러니까 내가 궁금한 건 당신이 우리 폐하와…….”
“폐하께선 처음부터 작년 가을 일이 리오타 왕실 소행이라는 걸 알고 계셨다면서요? 그러면 이제 엘슈바이크 제국과 리오타 왕국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전쟁이 벌어지나요?”
“전쟁은 쉬운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의 일이니 공식적인 사죄와 보상을 받는 선에서 해결할……. 아니, 그게 아니라!”
“원래 폐하가 황태자였다고 하던데 어째서 그동안 황궁에 계시지 않고…….”
“그만, 그만, 그만!”
리엘라 블리니테는 다른 의미로 강적이었다.
물음표로 사람을 찍어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끝도 없는 질문을 쏟아내는 통에, 황제와의 연을 캐물을 시도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말이 청산유수인 것을 그동안 대체 어떻게 참았습니까?”
아시온은 분통을 터트리며 리엘라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리엘라는 곧장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고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러워서…….”
“…….”
엄청나게 상처받아버린 그 태도에 아시온은 차마 할 말을 잃었다.
한쪽은 철옹성처럼 너무 단단하고, 또 한쪽은 솜털처럼 너무 여렸다.
두 사람이 쌍으로 이러니 사이에 낀 제삼자로선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도무지 저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
리엘라가 침실 밖으로 나온 건 그날 저녁이었다.
목소리를 완전히 회복한 건 그저께였다. 의사는 이제부터 조금씩 몸을 움직일 것도 권했다. 구속된 신분이니 멋대로 움직여선 안 되지만 침실 밖 복도 정도는 오갈 수 있도록 해두겠다며.
의사가 한 말이긴 했지만 사실은 황제가 내린 조치라는 걸 리엘라는 낌새로 눈치챘다.
그 시점에 리엘라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황제 폐하는 어디에 계시나요, 하는 것.
망가진 몸을 회복하는 동안에 황제는 리엘라에게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베풀어주었다.
감옥이나 죄수 병동이 아닌 별궁의 일반 침실에 방을 내준 것도 못 믿을 일인데, 내어주는 식사와 의복, 수준 높은 치료까지 전부 분에 넘치기만 했다.
리엘라는 내내 침실 안에만 있었으니 궁 안에 떠도는 소문들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제 침실을 드나드는 일꾼과 호위병의 눈빛만으로도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어리둥절한 것처럼, 다른 이들 모두에게도 저 자신이 어리둥절한 존재라는 것.
그런데 정작 이 모든 상황을 연출한 황제는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제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진작 들었을 텐데.
입이 트일 때까지 시간을 주겠다며. 무슨 대답을 하나 보자고 도발하더니.
‘대체 뭘까? 그 사람. 아니. 그분의 의도는…….’
혼자 침실에 앉아 고민한다고 답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리엘라는 어지러운 생각이나마 정리하고자 방을 나섰다.
촛대에 불을 밝힌 채 앉아 있는 황제를 발견한 건, 2층 복도를 나와 탁 트인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
예상치 못한 만남에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그 소리를 듣고 황제와 몇 발 뒤에 떨어진 그의 호위 기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황제와 눈이 마주친 순간에 리엘라는 몸을 흠칫 떨며 쭈뼛거렸다. 시선을 피해야 하는 건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동안, 황제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갔다.
아무런 말도 없이 바로 관심을 거두는 그 태도가 리엘라는 허무했다.
자신만 답답했던 걸까? 자신만 황제에게 궁금한 게 한가득 쌓였던 걸까? 자신만 그를 기다렸나?
리엘라는 복잡한 감정을 감추고 돌아섰다.
등 뒤로 황제의 건조한 명령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리엘라 블리니테. 여기 와서 앉아.”
리엘라가 고개를 돌려보니 황제는 소파에 앉아 여전히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방금 정말 황제가 말한 것이 맞나.
망설이는 리엘라와 황제 뒤쪽에 있던 기사의 눈이 마주쳤다.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리엘라는 조용히 테이블로 다가갔다.
귓전에 심장 소리가 울리도록 가슴이 쿵쾅거렸다.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 주변엔 여섯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리엘라는 고민하다가 황제가 앉은 자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회복 중인 걸 잊었나. 벌써 목소리가 잘 나오나 봐?”
그걸 본 황제가 곧장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리엘라가 놀라 고개를 들자 황제는 이제야 똑바로 리엘라의 눈을 맞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가까이 앉으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