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꽤 오래 그리워했던
(19/154)
19 꽤 오래 그리워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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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꽤 오래 그리워했던
2021.09.02.
“먼저 나가서 쉬어도 좋다고 하십니다.”
아시온이 그렇게 속삭여주자마자 리엘라는 비틀거리며 회장을 뛰쳐나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기쁜 건지 슬픈 건지 모를 감정이 요동쳐서 구역질까지 일었다. 황제는 아마 그런 걸 알아채고 자신을 바깥으로 나가게 해준 것이리라.
리엘라는 무작정 볕이 드는 곳으로 내달렸다. 맞은편 복도에 있는 큰 창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매달려서야 가쁜 숨을 뱉을 수 있었다.
구역질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막상 터져 나온 것은 울음이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후련함과 동시에 허탈했다.
“왜 폐하가 급하게 생각을 바꾸셨나 했는데, 당신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때 리엘라가 걱정되어 쫓아온 아시온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우리가 예정대로 고발장을 접수했다면 왕실에게 벌은 줄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당신에게 또 해코지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을 겁니다. 왕녀의 저 성질머리를 봐요. 분명 당신을 가만두지 않았을걸요?”
“아…….”
“뭐, 보상금도 보상금이지만. 당신의 신변을 담보 삼아 평화 조약을 걸어놓았으니 이젠 왕녀도 리엘라 양을 어쩌진 못할 거예요. 그러니 앞으로 안심하시라고요.”
리엘라는 차마 뭐라고 해야 좋을지를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가 그런 계산까지 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레타가 소리를 지르는 게 끔찍해서. 또 그런 그레타가 결국 제 앞에 머리를 숙인 것이 놀랍고 허망해서, 머릿속이 백지장이기만 했는데.
“어째서 제게……. 그렇게까지…….”
“뭐. 팜므 파탈이시니까.”
“네?”
“푸흡. 아, 아닙니다. 방금 그건 그냥 농담이었고요.”
아시온은 몇 번 헛기침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마냥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진 마십시오. 이것도 애당초 우리가 생각했던 여러 방안 중 하나였으니까. 사실, 폐하께서도 반정을 일으켜서 황제가 된 거 아니냐고 몰리고 있는 처지라. 이럴 때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켜봤자 우리 쪽도 득보다는 실이 더 큽니다.”
아시온이 그쯤 설명했을 때 마침내 응접실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눈이 빨갛게 충혈된 그레타였다.
왕녀의 몰골은 처참했다. 아버지인 국왕에게 머리채까지 잡히느라고 늘 탐스럽게 빗질 되어있던 긴 머리도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시체처럼 걸어 나오던 왕녀는 리엘라를 몇 발자국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너…….”
그레타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 다가오진 못했다. 그대로 선 자리에서 리엘라를 노려보다가, 결국은 맥없이 시선을 거두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왕녀 다음으로 양국의 대신들이, 그 뒤엔 떠들썩한 소리로 또 굽신거리는 국왕이, 마지막으로 헤르한 황제가 안에서 나왔다.
리엘라는 제 가슴을 붙들고서 황제에게로 조금씩 나아갔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이렇게 크고 지극한 마음을 표현하는 게 가능한 것이기는 할까.
그런 마음에 고개를 숙일 때 아시온이 유난을 떨며 리엘라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크. 전 폐하께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떠날 준비를 해야 하니 또 바빠서…….”
“네……? 떠나신다고요?”
“그럼요. 조약도 체결되었으니 돌아가야죠. 이미 황실을 오래 비워두었는걸요.”
아. 그렇지.
황제가 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놀랄 것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인지. 리엘라는 또 멍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폐하도 더욱 이런 선택을 하셨을 겁니다. 우리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리엘라 양은 혼자 여기 남아 살아야 하니까. 그게 걱정되어서.”
*
별궁 침실로 돌아온 리엘라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테이블에 놓아둔 황제의 손수건이었다.
리엘라는 그 손수건을 물끄러미 보다가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황제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고, 민망하나마 잠시 공주님이 된 것 같은 호화도 누려보았고.
감히 두 나라의 수장이 마주 앉아 대담하는 자리에도 참석해보았고 거기서 그레타 왕녀가 제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것까지도 보았다.
이제 평생 일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많은 보상금을 받게 될 테고 더는 누군가의 위협에 시달리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분에 넘치는 결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머릿속은 온통 곧 황제가 떠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까?
전부 다 좋게 끝나기만 했는데도 가슴이 답답하고 서럽기까지 했다.
왜. 대체 왜…….
“리엘라 블리니테.”
그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음성이 제 이름을 불러왔다.
그저 이름을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리엘라는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았다.
왠지 황제에게 그 눈물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리엘라는 괜히 짐을 챙기는 척 바쁘게 움직이며 시선을 피했다.
“오늘, 고생했다.”
리엘라가 저를 돌아봐 주지 않는데도, 헤르한은 리엘라의 뒷모습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리엘라는 아무 물건이나 집어 든 손아귀에 힘을 주고는 애써 멀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걸요. 폐하께 너무 많은 신세를 지기만 했습니다.”
“글쎄. 그다지 신세 지지 않았어. 내 욕탕이 또 탐난다면 한 번 더 쓰던지.”
욕탕이 어쩌고 하는 말은 농담이 분명한데도, 농담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마냥 웃지는 않았다.
“받아.”
리엘라가 끝내 뒤돌지 못하자 헤르한이 직접 방안으로 걸어 들어와 무언가를 건넸다.
“왕실이 사인한 협정서다. 네가 앞으로 받게 될 보상 내용은 모두 그 안에 있으니 시간 될 때 천천히 살펴봐.”
“감사합니다.”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하고.”
“네.”
몇 마디가 오고 갔으나 이상하게 대화의 흐름이 뚝뚝 끊기는 듯했다.
둘 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탓이었다.
“이후엔 어디로 갈 생각이지?”
결국. 먼저 묻고 싶던 것을 꺼내든 건 황제였다.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후’라는 건, 황제가 떠나고 난 뒤를 말하는 거겠지.
그런 건 아직 생각할 수 없었기에 리엘라는 아무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갈랜드로 돌아갈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갈랜드…….”
갈랜드, 갈랜드…… 하고 황제의 입술이 몇 번이나 그 지명을 웅얼거렸다.
“여기 잡혀 오기 전까지 머물렀다는 그 마을인가.”
“네.”
“그렇군.”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담담하게 이별을 고했다.
“무사히 돌아가길 바란다.”
리엘라는 또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억지로 웃었다.
“예. 부디 폐하께서도.”
*
그 후로 사흘간, 별궁은 손님을 처음 맞을 때 그러했듯이 손님을 떠나보내는 것도 시끌벅적했다.
말단직까지 더하면 수백에 이르는 제국 수행원들이 짐을 싸고, 짧게나마 정들었던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리오타 왕궁 소속 시종들에게는 엘슈바이크의 황제가 친히 하사한다는 선물들이 전달되었다. 왕국의 궁정 대신들과 귀족들에게도 황제가 보낸 보석과 옷감들이 빠짐없이 돌아갔다.
어째서 순방까지 온 황제가 제대로 된 연회에 한 번을 참석하지 않느냐고 투덜거리던 그들은, 황제의 인장이 박힌 선물 상자 하나에 모두 말을 바꾸었다. 역시 엘슈바이크의 황제는 제국의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도량이 넓다고.
사흘간 국왕은 연일 저녁 황제를 찾아와 온갖 공물을 들이밀고 아부를 떨었다.
혹시 뒤늦게라도 황제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초조한 마음 반, 멀리서 보는 이들에게 제국과 왕국의 친교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물론 국왕이 그렇게 동분서주하는 와중에 왕녀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듣기로는 심한 몸살이 나서 제대로 거동하지도 못할 지경이라는데, 제국 황제의 환송식을 앞두고 왕녀의 감기몸살 따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바쁘고 반갑게 변화를 준비하는 동안 리엘라 역시 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맨몸으로 체포됐던 리엘라였다.
돌아갈 때 역시 빈손이어야 하는 게 맞는데도 리엘라의 방엔 짐이 한가득했다. 전부 헤르한이 내어준 것들이었다.
“전부 돌려드리겠습니다. 폐하.”
“돌려줘봤자 내겐 짐만 되는 것들이야. 네가 가지든지, 아니면 버려라.”
헤르한은 바쁜지 리엘라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아무리 서운하더라도 정말로 물건을 내다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같이 값비싸고, 귀한 마음이 담긴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리엘라는 그것들을 버리는 대신 저를 도와주었던 제국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고도 남는 것은 시종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리엘라가 마지막으로 제 옷장을 연 그날은 별궁 시종들에겐 축제 같은 날이었다.
그렇게 모든 짐을 다 비우고 나니 리엘라에게 남은 것은 흰 손수건 한 장뿐이었다.
‘이거 하나만은 간직해도 될까……?’
리엘라는 먹먹하게 손수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감히 간직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러니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았다. 설령 그가 받지 않겠다고 해도. 버리라고 한다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도 있었다.
참 감사했다고. 감사하단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을 만큼 감사했다고. 이제 저는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어딘가에서 씩씩하게 살아갈 테니, 폐하께서는 부디 제국으로 무사히 돌아가 훌륭한 군주가 되시라고.
리엘라는 그렇게 말하고 손수건을 돌려줄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 혼란스러운 마음도 모두 훌훌 털어버리리라, 결심했다.
“이런. 어쩌죠? 폐하께선 본궁에 가셨는데……. 환송식을 코앞에 두고 왕국 귀족들이 얼마나 몸이 달았는지, 아주 떼를 지어 쳐들어 왔더라니까요. 그냥 돌려보낼 순 없어서 잠깐 얼굴만 비춰주고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용기 내어 오랜만에 내실 문을 두드렸건만 돌아온 건 황제가 자릴 비웠다는 말. 그리고 벌써 제법 휑하게 정리된 실내의 광경이었다.
환송식은 이틀 뒤라고 들었는데. 벌써 이렇게 짐을 다 뺄 필요까지 있었나.
꼭 빨리 떠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그 점이 못내 서러워서 리엘라는 방을 돌아 나왔다.
황제가 올 때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바깥에서 그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황제와 함께 산책했던 정원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가보기도 할 겸.
내내 별궁 안에 틀어박혀 있던 리엘라가, 손수건 하나만을 손에 쥔 채, 궁 밖으로 나온 건 그래서였다.
엄연히 황제를 기다리기 위해 나온 것이었고, 황제를 만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리엘라는 황제를 생각하는 시간이 꽤 많아져서, 자신이 또 다른 누군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자각하지도 못했다.
“리엘라.”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 전까지는.
“드디어 찾았다. 리엘라.”
왜 리엘라가 ‘리엘라’라는 자신의 이름을 좋아했는지.
사실은 이름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를 좋아했던 것이었음을.
아주 오랜 날. 그에게서 버려지고 울며 돌아섰던 그 뒤로도 한동안은 꽤 오래, 그 목소리를 그리워했음을.
“리엘라…….”
리엘라는 별궁의 푸른 담장 앞에서 다시금 깨달았다.
파비안이었다.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참 소중했던 그때와 여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