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여름날의 새벽
(50/154)
50 여름날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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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여름날의 새벽
2021.12.19.
“폐하!”
리엘라의 외침에 이엘이 제 눈을 의심했다.
저게 황제 폐하라고?
그를 처음 알현하는 것이라 당황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머릿속에 온갖 물음표가 떠다녔다. 어떻게 갑자기 나타났지? 황제는 순간 이동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침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상태였다.
“폐하, 대체 어떻게……. 어디로 들어오신 거예요?”
놀란 것은 리엘라도 마찬가지였다. 몸살기에 흐릿하던 머릿속이 단번에 맑아질 정도로.
“이엘 바이스.”
하지만 헤르한은 리엘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이엘을 불렀다.
싸늘하고도 무정한 목소리와 걸맞은 차가운 얼굴이 이윽고 침대 옆의 등불에 드러났다.
이엘이 어디선가 엿보았던 초상화 속 얼굴이었다. 다만 자신을 향하는 눈빛만큼은 초상화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야멸찼다.
“폐하를 뵙습니다.”
이엘은 당장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네 손목을 자르면 아무래도 곤란하겠지.”
“예?”
“공무는 수행해야 하니까. 아닌가. 그냥 널 해고하면 해결될 일인가.”
리엘라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이불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섣불리 헤르한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정말 그가 이엘의 손을 자르기라도 할 것 같아 두려워서.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남의 침실에 들어와 있는 건 아무리 보좌관이라고 해도 선을 넘는 것 같은데. 리엘라는 네 상관이기 이전에 여인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가?”
“송구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나가라. 정말 뭐라도 베기 전에.”
축객령을 받든 이엘이 침실을 떠나고 나서야 리엘라는 그동안 꾹 참고 있던 숨을 터트렸다.
놀랍고, 미안하고, 속상한 모든 마음을 담아 헤르한을 올려다보니, 그 역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서 왔어. 리엘라.”
방금 살점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이엘을 몰아붙이고 쫓아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헤르한은 애처로웠다.
그가 블라우스 한 장 차림으로 흐트러져 있는 것이나 아직도 가슴을 거칠게 오르내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이 리엘라의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내달려서 나에게 온 거구나. 리엘라는 깨달았다.
“그런데 너는 다른 남자와 밀회 중이라니.”
“미, 밀회라니요! 그런 게 아니…….”
“됐어. 너는 내가 그립지도 않았나 보군.”
“폐, 폐하!”
리엘라는 잔뜩 상심해 돌아서는 헤르한을 향해 내달았다.
하지만 급하게 몸을 일으켜서일까. 맨발로 바닥을 내딛는 순간 어지럼증이 한 번에 밀려들어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쿵, 작은 몸이 쓰러지자 헤르한은 매몰차게 돌아서던 것도 잊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리엘라! 어떻게 된 거야? 몸이 뜨겁잖아.”
“몸살감기에 걸렸어요.”
헤르한은 리엘라를 안아서 침대에 눕혀주었다.
리엘라는 그가 또 돌아설까 싶어 헤르한의 옷자락을 꼭 쥐고 매달렸다.
“가지 마세요, 폐하. 아니. 가야 하시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저도 보고 싶었어요.”
“리엘라.”
“저도예요. 저도 폐하가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병까지 난 건데. 밀회, 그런 거 정말 아닌데……!”
순간 겁에 질렸던 것. 오해를 사서 서러운 것. 당신처럼 나 역시 당신이 너무나 그리웠던 것.
하나하나 따지면 그리 큰 것도 아닌 감정들이 뭉쳐 눈덩이처럼 크게 불어났다.
아파서 그런가. 아프면 괜히 더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법이니까.
리엘라는 헤르한을 끌어안고 서럽게 칭얼거렸다.
덕분에 헤르한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리엘라를 달랬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울지 마.”
*
“그런데 우리 이렇게 만나도 괜찮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
“검사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요?”
“계속 널 못 봐서 내가 답답해 죽으면 문제가 생기겠지.”
늦은 밤, 촛대 하나만으로 안을 밝힌 침실 안에서 리엘라와 헤르한은 오랜 시간을 마주 보았다.
울음을 그치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동안 리엘라는 계속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비밀리에 요양 중인 헤르한이 호수궁 침실에 몰래 숨어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절대 안 되니까.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가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워 이가 악물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몸은 닿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걸 이제 와서?”
자길 끌어안고 매달린 것으로도 모자라 가슴에 얼굴까지 파묻고 엉엉 울어버린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헤르한이 어이없어 웃건 말건 리엘라는 성실히 제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혹시나 발끝 하나라도 앞에 앉은 그에게 닿을까 봐.
“계속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스를 부르는 게.”
헤르한은 일부러 그런 리엘라를 곯리듯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안 돼요! 폐하가 여기 오신 게 들키잖아요. 이엘 경이 준 해열제를 먹었으니 괜찮아질 거예요. 다행히 이엘 경은 문관인데 의학에도 꽤 박식해서…….”
리엘라는 생각 없이 말을 이어가다가 그만 가슴이 철렁해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나, 헤르한의 눈빛이 또 서릿발처럼 싸늘해져 있었다.
“이엘 얘기는 그만하랬지.”
“잘못했어요…….”
리엘라는 순순히 사과했다. 사실 앞에서도 두 번이나 이엘 얘기를 해버렸고 그때마다 헤르한은 사나운 경고를 했다.
“벌써 세 번이나 참아줬어. 더는 안 돼.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
“무슨 벌을…….”
곧바로 헤르한이 몸을 기울여 입을 맞춰오는 통에 리엘라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헤르한은 리엘라의 입술 위를 간지럽게 지분거렸다.
“폐하. 안 돼요. 이런 벌은.”
간신히 그를 뿌리친 리엘라가 설득도 해보았지만 무리였다. 오히려 리엘라의 저항이 헤르한의 안달을 부추기고 말았다.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입술 사이로 엉켜 들어오는 말캉한 혀에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리엘라의 몸은 버티지 못하고 뒤로 기울었다. 제 뒤통수를 받쳐주는 헤르한의 손길에 의지하면서, 리엘라는 침대 위로 풀썩 누웠다.
“안 되는데. 폐하. 금…….”
간신히 떠올린 ‘금욕’이란 단어를 다시 입에 담을 새는 없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런 걱정이 한 줄 떠오를 때마다 그보다 열 배는 강한 충동이 리엘라를 에워쌌다.
몸살을 앓는 자신보다 제 몸을 무겁게 꾸욱 누르는 헤르한의 몸이 훨씬 더 뜨거웠다.
“비밀로 하면 돼.”
가쁜 신음에 섞인 목소리는 끊임없이 리엘라를 부추겼다.
“그렇게 될 리가…….”
그렇게 될 리가 없잖아요.
말을 하려던 리엘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헤르한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미 선을 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엘라.”
정염을 떨치지 못한 헤르한이 고통스러운 듯 애원하고 있었다.
비밀로 하면 될 것 같아서, 적당히 아무 일 없는 척하면 될 것 같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설령 이 순간이 어떤 미래를 불러온대도 상관없어서. 아니, 어쩔 수가 없어서.
“폐…….”
다시 리엘라의 입술을 헤르한의 입술이 덮었다.
그러는 동안 헤르한의 다른 한 손이 리엘라의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리엘라는 뜨거운 것에 데듯 움찔거렸다.
조심스럽게 옆구리를 쓸고 내려간 손이 더 아래까지 뻗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헤르한을 꽉 끌어안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천천히요. 폐하.”
바들바들 떨 정도로 수줍어하기에 더 농염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헤르한의 팔뚝의 푸른 핏줄이 강하게 불거졌다.
“또 기절하기 싫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리엘라는 결국 생각하기를 멈추고 감각에만 저를 내맡겼다.
은밀한 곳에 맞닿은 헤르한의 일부는 불덩이 같았다.
“오늘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게 해줄게.”
열기에 휩싸인 헤르한의 목소리를 끝으로 둘은 더 이상의 어떤 의미를 띤 말은 주고받지 못했다.
*
여름날의 새벽. 호수궁의 침실 안은 유달리 덥고 습기가 찼다.
‘아직도 열이 덜 떨어졌나.’
품에 안은 몸을 구석구석 짚어보던 헤르한은 침대 아래 벗어둔 옷을 아무거나 하나 집어서 그것으로 리엘라의 땀을 닦아주었다.
이마. 어깨. 쇄골 아래 움푹 팬 곳과 매끈한 허벅지.
‘이렇게 예뻤나.’
새벽의 아스라한 달빛 속, 송골송골 맺힌 땀에 리엘라의 몸은 요정처럼 반짝거렸다. 감기에 걸린 게 아니었다면 계속 그대로 지켜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마든지 더 안을 수도 있는데.’
그랬다간 가뜩이나 병난 리엘라의 몸이 더 축나겠지.
헤르한이 이를 꾹 물고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욕정을 다스리는 사이에 품속의 리엘라가 뒤척였다.
“으……음.”
서서히 깜빡이는 무성한 속눈썹 틈으로 리엘라가 붉은 눈동자를 몽롱하게 들어 올렸다.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헤르한은 리엘라가 또 예쁘고 기특해서 피가 끓었다.
“그런데. 어떻게 왔어요.”
“응?”
“여기. 내 방. 폐하. 어떻게 와요.”
리엘라는 눈도 마주치고 말도 건넬 만큼 의식은 있었지만, 확실히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헤르한은 다시 리엘라를 덮칠 뻔했다.
하지만 참아야지. 끝까지 기절하지 않아 준 것만으로도 리엘라는 십 년 치의 칭찬은 받아 마땅했다.
“그건 비밀이야.”
“비밀……. 나도 비밀 알려줘.”
“싫어.”
“……바보.”
와. 이젠 반말로 모자라 밑도 끝도 없이 욕도 하는군. 그것도 감히 황제에게.
헤르한은 바보라는 말을 들은 것 답게 바보처럼 웃으며 리엘라를 내려다보았다.
리엘라는 이제 눈을 뜰 힘도 없었는지 눈꺼풀을 닫고서도, 잠꼬대처럼 계속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폐하는 엔리인가 봐.”
“뭐? 엔리?”
“응. 나한테 날아서 와요.”
“내가 날아서 왔다고?”
“불도 내뿜나.”
“리엘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응?”
리엘라가 헛소리하는 게 재미있어서 말을 더 걸어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예 입을 꾹 다물고 본격적으로 쌔근쌔근 잠들어버린 리엘라의 이마 위에 헤르한의 입맞춤이 날아들었다.
헤르한은 축 늘어진 리엘라를 꼭 끌어안고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
이엘은 자리에 앉아 책상 위의 시계만 바라보았다.
정해진 리엘라의 출근 시간은 아침 아홉 시.
한번 삼십 분 일찍 온 것을 매정하게 지적한 이후로 리엘라는 늘 정확히 여덟 시 오십 분에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었다.
하지만 지금 시각은 아홉 시 사십 분.
“오늘은 늦잠을 주무시나 봅니다. 제가 가서 확인해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이엘은 부하직원을 물리고 반듯하게 앉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아홉 시 오십 분. 열시. 열 시 반.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리엘라가 없는 집무실은 한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
“리엘라 님. 리엘라 님! 저 루예요. 몸은 좀 어떠세요? 들어가도 되나요?”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헤르한은 벌떡 눈을 떴다.
창밖으로 어슴푸레 드는 햇살이 지나치게 밝았다. 큰일이다. 이렇게 밝으면 안 되는데. 헤르한의 뒷덜미로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리엘라?”
리엘라는 아직도 그의 품 안에서 천사같이 잠든 채였다.
헤르한은 곧바로 리엘라의 이마를 짚었다. 목덜미와 볼도 다정하게 짚어보았다. 다행히 열은 다 내린 듯했다.
‘지금 몇 시지?’
리엘라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하고 나니 다시 당혹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대책 없이 저지른 짓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늦을 줄은 몰랐다. 리엘라를 재우고 잠깐만 눈을 붙이려고 했는데.
‘여, 열한 시?’
반정도 일으켜보고, 암살자에게 쫓겨도 보고, 소소한 전쟁도 치러내면서 늘 의연했던 헤르한의 입에서 ‘망했다’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열한 시는 아시온이 헤르한의 침실로 출근하는 시간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휴가 중인 헤르한 대신 오전 업무를 대행하느라 늦추어진 것이었다.
“리엘라. 빨리 돌아가야겠어. 일단 아시온만이라도 어떻게 하고 바로 다시 올 테니까…….”
헤르한은 리엘라를 다급하게 흔들다가 문득 불길한 기시감을 느꼈다.
“리엘라.”
당연히 리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늘은 그냥 늦잠을 주무시게 두자, 하고 돌아서던 루는 문을 열고 나오는 이를 보자마자 곧장 바닥에 엎드렸다.
“폐, 폐하!”
리엘라 님의 침실 안에 왜 폐하가? 게다가 폐하의 옷차림이 왜?
“루. 의국으로 가서 제스를 불러와라.”
“네?”
“당장 제스를 불러와!”
“네, 네! 알겠습니다!”
날벼락처럼 떨어진 황제의 불호령에 루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앞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