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기적이구나2022.01.13.
“뭐라고?”
“폐하는 제가 꽉…….”
정수리까지 뻗쳐오는 부끄러움에 리엘라는 차마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루가 시키는 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수백 번을 연습한 말이었다. 마침내 대사 끝에 요염하게 눈짓을 하는 것까지 성공해냈을 땐 이제 됐다 싶었는데. 막상 헤르한 앞에 서니 눈짓은커녕 제대로 고개를 들고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어려웠다.
“다시 말해봐.”
헤르한은 곧장 리엘라의 허리 아래를 잡아서 위로 안아 올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손목에 나란히 채워진 수갑이 쇳소리를 내며 쩔껑거렸다. 리엘라는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저도 모르게 헤르한의 목을 남은 한 팔로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더 헤르한을 자극해버린 것 같았지만, 얼굴을 마주 보지 않으니 차라리 나은 것 같았다. 덕분에 지독히도 연습했던 마지막 대사도 할 수 있었다.
“폐하는 제게 꽉 잡혔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절 두고 그 어디도 못 가세요.”
헤르한은 아찔했다. 리엘라가 이런 깜찍한 말을 한다고? 이렇게 앙큼하게, 감히 황제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서?
“지금 모양새를 보면 네가 내게 붙잡힌 것 같은데?”
헤르한의 목소리는 열기로 가득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수갑을 채웠잖아요.”
헤르한에게 안긴 채로 침대까지 간 리엘라의 등에 곧 푹신한 이불과 베개가 닿았다. 그대로 하릴없이 제 위로 쏟아지는 푸른 시선을 응시하면서, 리엘라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제가 폐하를 잡은 게 맞아요. 폐하께서 먼저 저를 알아보고, 먼저 저를 구해주고, 또 먼저 저를 제국까지 데려와 주셨지만……. 폐하께선 한 번도 저를 멋대로 대하지 않으셨어요. 항상 제 선택을 기다려주셨잖아요.”
“…….”
“그러니까 이건, 제가 정한 거예요.”
“…….”
“폐하가 절 억지로 잡아둔 게 아니라, 제가 원해서, 제가 폐하를 꽉 붙들고 있는 거라…….”
헤르한은 더 듣지 못하고 리엘라의 몸 위로 허물어졌다. 부드럽게 포개진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호흡이 새어 나왔다. 끈질기게 리엘라의 살결을 탐할수록 헤르한의 피도 빨리 끓었다. 헤르한은 그제야 리엘라를 곁에 둘 때마다 늘 솟구쳤던 이 정염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리엘라가 자신의 영혼의 반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입술을 떼고 숨을 고를 때, 파르르 수줍게 떠는 리엘라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헤르한은 생각했다.
‘기적이 맞구나.’
아시온의 말이 옳았다. 먼 옛날 전설 속의 엔릴과 그의 연인이었던 안투가, 너와 나로 다시 만난 거였다. 얼마 전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구원의 화신이 지금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의 품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건…….
‘정말 기적이었어.’
헤르한의 몸 아래, 리엘라가 반짝거렸다. ‘폐하’ 하고 애틋하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헤르한의 짙은 불안에 감춰져 있던 환희를 비로소 끄집어냈다. 이렇게 리엘라를 깊이 안기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리엘라. 대체 어떻게 너 같은 사람이 나에게 온 거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찬 마음이 한데 몰려왔다.
‘나의 여신.’
헤르한은 이를 악물고 리엘라에게로 파고들었다. 리엘라를 온전히 갖고 말리라, 이 기적은 오직 나만의 것으로 하리라, 다짐하면서. 평소보다 사납게 휘몰아치는 헤르한의 몸짓이 힘겨웠는지 리엘라가 달뜨게 호흡하며 뒤척였다.
“하아……. 폐하……. 수갑이 불편……. 열쇠를 저기 어딘가에 두었는데…….”
“필요 없어.”
“하지만…….”
“이렇게 하면 돼. 내 손을 따라 그대로 움직여.”
헤르한은 수갑을 찬 한쪽 손으로 나란히 수갑이 채워진 리엘라의 손을 쥔 채 자신의 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폐, 폐하! 거기는……!”
리엘라는 너무나 뜨거운 촉감에 깜짝 놀라 손을 이불 밖으로 빼내려 했지만 손목의 사슬이 팽팽해 녹록지 않았다.
“네가 날 붙잡은 거라며. 그러니까 나를 마음껏 가져. 리엘라.”
너는 나만의 여신이니까. 나는 너만의 것이니까.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린대도 상관없어. 헤르한의 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리엘라의 손바닥을 간지럽히다가 이내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깍지를 끼고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베개 위를 짓눌렀다. 그날 밤, 둘의 몸을 잇는 얇은 사슬의 금속성이 그치지 않고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며칠이 지났다. 리엘라는 여느 날처럼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아침 단장을 했다. 호수궁의 많은 시녀 중 리엘라의 침실 안에 드나들 수 있는 건 루를 포함해 다섯 명뿐이었다. 전부 황제가 직접 ‘검증’해서 엄선한 사람들이었다.
“이엘 보좌관님은 오늘도 바쁘신 것 같아요. 이제 그레타 왕녀님이 도착할 날이 정말 머지않았나 봐요.”
리엘라는 루가 제 머리를 빗겨주는 척하며 슬쩍 귓가에 흘려준 말에 몰래 미소 지었다. 이엘의 해고는 다행히 해프닝으로 그쳤다. 리엘라가 다정하고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황제가 못 이기는 척 명을 거두겠다는 교지를 이엘에게 전한 것이었다. 물론 단서 조항이 따르긴 했다. 업무에 관한 모든 일은 리엘라가 아닌 외무대신과 논의할 것과 리엘라의 내실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을 것. 덕분에 리엘라는 며칠째 이엘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마저도 감지덕지라고 여겼다.
“오늘은 날이 정말 좋아요. 아까 보니 호수에 물안개도 꼈더라고요. 얼마나 아름답던지!”
“물안개요?”
“네. 리엘라 님은 아직 보신 적 없으신가요? 호수궁은 항상 아름답지만 물안개가 꼈을 땐 정말 장관이에요.”
한 시녀가 하는 말에 리엘라는 눈을 초롱초롱 떴다가 이내 상심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괜찮으니, 다들 편하게 나가서 산책하고 오세요.”
“하지만 어떻게 저희끼리…….”
“나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리지?”
침실 왼쪽 구석의 소파에서 서류를 보던 황제가 몸을 일으키며 다가온 건 바로 그때였다. 산책 얘기를 꺼냈던 시녀는 제 혀를 깨물고서 황제의 시선을 열심히 외면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느스름하게 뜬 황제의 눈길은 시녀 쪽이 아니라 아직 단장 중인 리엘라 쪽을 향했다.
“폐하께서 절 침실 안에 가두신 건 사실이잖아요.”
“언제는 내가 가둔 게 아니라 네가 원해서 있는 거라며?”
“이렇게 침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것을 뜻한 건 아니었죠.”
리엘라는 쀼루퉁하게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향한 헤르한의 과잉보호가 줄어들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호수궁의 경비가 몇 배로 늘어난 것이나 출입증을 가진 자만 침실 안에 드나들게 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이 방 안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지. 또, 황제씩이나 되는 당신께서는 왜 바쁜 일정을 다 마다하고 자신과 함께 격리되어 있기를 자처하시는 건지. 리엘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세요?”
수갑까지 채워가면서 그 부끄러운 말을 다 했는데? 토라지다 못해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짓는 리엘라에게 헤르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지. 내가 방심한 사이에 누가 널 채가면 어떻게 해?”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자 리엘라의 옷매무새를 만지던 시녀들이 손을 떼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헤르한은 아직 덜 여며진 리엘라의 허리끈을 자신이 직접 매어주고는 리엘라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건 호수궁의 일상이었으므로, 시녀들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다정한 두 연인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루. 오늘 리엘라와 호수로 나가봐.”
“네? 산책을 허락해주시는 건가요?”
회의로 인해 잠시 호수궁을 떠나기 전, 헤르한은 루를 불러 조용히 명령했다.
“그래. 다만 너무 오래는 안 된다. 호위기사 두 명을 붙여줄 테니 데리고 나가고.”
“네! 알겠습니다, 폐하! 리엘라 님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그래. 기뻐하겠지. 남의 속이 얼마나 타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헤르한은 방 안쪽의 리엘라를 애틋하고도 야속하게 바라보았다. 리엘라는 근심없이 시녀들과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리엘라의 재잘대는 목소리, 미소, 눈빛 모든 것에 헤르한은 또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었다. 지난 며칠이 전부 그랬다. 헤르한은 꼭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벅찼다. 어둠 속에서 예정된 죽음만을 향해 걸어가던 그를 밝은 빛 속으로 끄집어내준 이는 물론 리엘라였다.
‘그러니 이해해줘. 리엘라.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널 꼭 내 옆에 두고 지켜야겠으니까.’
*
“제가 그림자 상인에게 접선해보겠습니다.”
황제에게 결의를 다진 건 카넬이었다. 헤르한은 팔짱을 끼고서 그런 카넬을 빤히 보았다. 제스가 자신을 연구실이 아닌 격리실로 자신을 부르기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벌이려는 줄은 알았는데, 역시나.
“그림자 상인이라면, 네가 예전에 조사하던 밀매상 중 하나 말인가?”
“예.”
카넬은 한때 제국 전역을 돌면서 숨어 있는 능력자들을 상대로 불법 억제제 장사를 하던 이들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지금 헤르한이 먹는 약은 그때 그들에게서 구한 여러 약들을 토대로 제스가 완성해낸 것이었다.
“그곳의 운영자가 신전에서 파문당한 신관이라고 들은 바 있습니다. 그자라면 성녀를 판별하는 법을 알 수도 있습니다.”
위험하지만, 신빙성이 있는 말이었다.
“접근할 수 있겠나, 카넬?”
“예전에 거래한 적이 있어서 접선 루트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쪽은 제 신분을 모릅니다.”
“병사를 지원해주지.”
“아닙니다. 괜히 꼬리가 길었다가 덜미를 잡힐까 봐 저어됩니다.”
카넬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가 함께 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거기에 제스까지 다부지게 가세했으므로 헤르한은 그들의 제안을 물릴 수 없었다.
“그래. 너희를 믿어보겠다.”
*
“엥? 대장을 찾는다고? 그는 왜?”
“왜, 왜긴요. 나는 원래 그하고만 거래했습니다. 우리 쪽도 아는 얼굴을 봐야 믿고 물건을 사든 할 거 아닙니까?”
“……쳇. 원래 대장 고객이었던 건가.”
황성 바하보르덴을 벗어나자마자 나오는 슬럼가의 한 어두컴컴한 술집 안. 깊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약을 찾는 손님으로 위장한 카넬은 의심받지 않고 대장을 부르는 것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대장은 이제 여기 없어. 이 바닥에서 손 뗐다고.”
“예?”
낭패였다.
“그래도 물건은 확실해. 대장에게 인수인계는 확실히 받았으니까, 믿고 사라고. 못 믿겠으면 꺼지고.”
덮어놓고 믿어라, 못 믿겠으면 꺼지든가. 그건 밀매상들의 흔한 레퍼토리였다.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카넬 대신 준비한 가방을 꺼내든 건 제스였다. 사내는 가방 안에 가득 든 돈다발을 보고 곧장 경계심을 풀었다. 제스는 그 타이밍을 노려 슬쩍 운을 뗐다.
“혹시 다른…… 약도 있습니까?”
“무슨 약? 왜? 서야 할 게 안 서나? 큭큭.”
“성녀를……. 판별해내는 약이라든지.”
그 순간. 고삐를 풀고 돈다발이나 챙기던 사내의 눈에 험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젠장, 너무 조급했나, 제스는 입술을 깨물었고 카넬도 주먹을 꽉 쥐었다. 사내가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린 건 잠시 뒤였다.
“크크큭! 푸하하하, 크큭! 형씨. 웃긴 소리를 하는군. 뭐, 성녀 타령이야, 약값에 시달리는 놈들이 늘 하는 거지만. 그쪽은 돈도 많아 보이는데 쩨쩨하게 왜 그래?”
“아, 하하. 예…….”
제스는 사내를 따라 억지웃음을 지으며 십년감수의 한숨을 삼켰다.
“성녀는 약으로 판별하는 게 아니야. 눈으로 하는 거지.”
“지금 뭐라고……. 눈으로 한다고요?”
“그래.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어. 대장이 전수해주고 간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이 있는 거였어!?’
제스와 카넬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면서 쾌재를 불렀다.
“대체 뭡니까? 그 방법이?”
문제는 마주 앉은 이 사내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걸 그냥 말해줄 것 같냐는 아주 음흉한 눈. 제스가 여분의 돈다발을 그에게 더 내밀어봤지만, 그럴수록 사내는 간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여기로 데려와 봐. 그러면 내가 직접 보고, 판별해주지.”
사내와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소득 없는 거래를 마친 제스와 카넬은 그 술집에서 멀지 않은 골목에 몸을 숨긴 채로 한숨을 주고받았다.
“제스 경.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일단 폐하께 사실대로 보고해야지.”
“저자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리엘라 양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는 건 너무 위험한 일 같은…….”
그때 갑자기 카넬이 말을 하다 말고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가 이쪽 골목을 향해 오고 있었다. 제스도 곧바로 숨을 죽이고 카넬의 옆에 몸을 숨겼다. 빠른 걸음으로 골목 안에 들어선 누군가는 다급하게 주변을 살피더니 그림자 상인이 있는 술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손님이 끊이질 않으니 저 장사치는 참 좋겠어. 이만 가자. 카넬.”
제스는 혀를 끌끌 차며 카넬을 끌어당겼으나 카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카넬. 왜 그래?”
“그게…….”
카넬은 가게 문을 향해 커다랗게 부릅뜬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말했다.
“방금 술집 안으로 들어간 사람. 제가 아는 사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