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 간절한 염원이 깃든 물건은 (92/154)


#92 간절한 염원이 깃든 물건은
2022.05.15.


밤새 말을 달린 노신사의 어깨 위로 밤이슬이 내려앉았다.

말뚝에 고삐를 매어놓은 그는 어깨를 털 여유도 없이 어두컴컴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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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어요. 공작 어른.”

구석에서 튀어나온 상냥한 인사에 노신사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노쇠한 눈알이 슬그머니 굴러간 곳엔 어김없이 커다란 소파에 파묻힌 채로 무릎 위에 담요를 덮은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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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엘 바이스를 만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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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뭐라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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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그렇군요, 역시, 하며 사내의 입꼬리가 예쁜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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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어른이 보시기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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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습니다. 그대로 믿자니 꺼림칙한데, 또 안 믿자니 말의 앞뒤가 완벽해서……. 이엘 녀석이 황제 폐하의 친서까지 받아왔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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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황제의 친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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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자기 말을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시켜주겠다면서, 이것까지…….”

노신사가 사내에게 내민 것은 에메랄드빛 광택이 감도는 빳빳한 봉투였다.

사내는 봉투를 열어 안에 담긴 종잇장을 꺼내 들었다.

굳은살 하나 없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은 팔락팔락 소리를 내며 종잇장을 펼쳤다 접었다 희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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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연회 초대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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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리엘라 블리니테를 만나게 해주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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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고민에 빠진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여리면서도 날렵한 턱선이 훤히 드러났다.

달빛 아래 번뜩이는 눈빛은 꼭 황실이 보낸 도전장처럼 오묘한 에메랄드빛이었다.

언뜻 보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여린 빛. 하지만 그래서 손을 함부로 뻗었다간 베일 수도 있는, 아주 날카로운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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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른다는데 가야지요.”

그런 사내가 고민을 마친 듯 산뜻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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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그러면 적당한 사람을 골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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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무려 황실 입성인데 아무나 보낼 수는 없죠. 공작 어른께서 직접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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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래도 그건 좀……. 만약 황실이 다 알고서 미끼를 던진 거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제 목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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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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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곧 맑던 사내의 얼굴이 음험한 노기를 띤 건 바로 그때였다.

노신사는 몸을 떨며 큰 들숨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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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가서 확인하세요. 그런 일 하라고 제가 거두어드린 거잖아요.”

사르락.

사내가 여태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초대장을 살포시 접어 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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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기저기서 대장 노릇 하느라 잠깐 착각하신 겁니까? 공작 어른, 공작 어른 소리 들으니 정말 본인이 그런 위인이라도 된 줄 아셨어요?”

두려움에 떨던 노신사가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사내는 언제 그를 다그쳤냐는 듯이, 다시 방글거리면서 상냥하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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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세요. 만약 정말 황제가 황실 어딘가에 성녀를 숨겨두었다면 기꺼이 목숨을 팔고서라도 찾아오셔야지요. 다 연맹을 위한 일이잖아요. 공작 어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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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어른께서 연회에 참석하시겠다고 합니다.”

다시 황실로 돌아온 이엘의 보고에 제스가 들으란 듯이 픽 코웃음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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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어른은 무슨. 성씨도 없는 공작은 대체 어느 나라 공작인지?”

제스의 말이 맞았다. 그 ‘공작 어른’이란 자는 이름도 얼굴도 알려진 적이 없이, 별칭만 ‘공작 어른’인 뜨내기에 불과했다.

연맹을 일으키려 한다는 자들 전부가 그러했다.

그들은 이엘 앞에 늘 정체를 숨긴 채 나타났다.

공작이란 사람도 진짜 공작이 아니고, 이렇다 할 본거지도 없이 점조직으로 활동하는데다가, 정점에 선 주동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헤르한이 이렇게 위험천만한 작전을 벌이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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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자들을 황실로 부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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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리엘라에 대한 의심을 거두게 만들어야지. 세력을 통째로 뿌리 뽑는 건 리엘라의 안전을 확보한 뒤에 생각할 일이다.”

아시온에게 대답하고 난 뒤, 헤르한은 다시 이엘에게 눈을 돌렸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아 꿇어앉은 자세가 불편할 텐데도 이엘은 아무런 불평 없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헤르한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

대신 냉담하게 용건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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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바이스. 이게 그 결계이자 판별석이라고 했지.”

이엘은 살짝 고개를 들어 헤르한이 내민 것을 확인했다.

언제나 리엘라의 손에서 붉게 빛났던. 그리고 지금은 헤르한의 손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는 그의 마석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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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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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또 없는 단 하나뿐인 물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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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헤르한은 마석에 관해 몇 가지를 더 묻고는, 고개를 돌려 제스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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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실력 좋은 보석 세공인을 하나 수소문해서 은밀하게 데려와라.”

그러자 제스 대신 아시온이 대답을 가로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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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제가 하겠습니다. 제스는 연회 준비로 바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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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아시온 너는 네 일을 해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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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이요?”

아시온은 순수하게 눈을 치뜨며 고개를 틀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가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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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을 준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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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누구의 처형 말입니까?”

주군의 친절한 힌트를 듣고도 아시온은 답을 몰라 헤맸다.

이엘 바이스를 처형하시려나? 아닌데, 그는 이중 첩자로 활용하기로 했는데? 아. 이번 연회에서 연맹 세력을 붙잡아 처형하실 생각이신가?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헤르한이 친히 아시온의 어깨를 토닥이며 귓가에 정답을 흘려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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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프러포즈 반지를 잃어버린 멍청한 부관의 처형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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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힘내세요. 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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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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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연회까지는 말미가 있잖아요. 그 전에 꼭 찾을 수 있을…….”

루는 애써 위로를 건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내실 문 앞, 어깨를 한껏 말고 쪼그려 앉은 채 고개만 간신히 들어 올린 아시온은 꼭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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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찾을 겁니다. 말미가 백 년이어도 못 찾아요. 그건.”

황실군을 호령하는 총대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물쭈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거기서 오히려 씩씩하게 나서는 건 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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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저희 어머니가 누누이 그러셨어요. 간절한 염원이 깃든 물건은 언제나 반드시 제 주인을 찾아가게 되어있는 법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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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루가 작달막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검을 잡는 아시온에 비하면 솜뭉치처럼 여리기만 한 손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그 작은 주먹이 아시온의 물러진 정신을 쿵쿵 두드려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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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와 함께 멀리 출장까지 가셔서 정말 힘들게 구하신 물건이잖아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찾아봐요. 꼭 찾을 수 있어요. 제가 도울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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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양…….”

아시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루는 반듯하게 선 아시온의 가슴께 밖에 키가 되지 않으면서 짧은 팔을 뻗어 아시온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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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내실엔 없는 거 확실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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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리엘라 님의 옷장과 보석함도 한번 다시 찾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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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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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말씀을요! 모두가 함께 공들인 일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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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주 보며 의지를 다지는 두 사람의 우정이 빛났다.

그리고 그 감동적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목격자는, 조용히 발꿈치를 들어 자신의 방 안으로 되돌아왔다.

달칵.

리엘라는 침실 문을 단단히 잠근 후에야 자기 품 안에 고이 감추어 두었던 반지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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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출장을 가신 게 이것 때문이었다고? 모두가 함께 공을 들였다고?’

그렇다면서 왜 그 ‘모두’라는 말 안에 자신은 포함되지 않은 걸까?

폐하도 아시온도. 심지어 루까지 다 아는 일을 어째서 또 자신만 모르는 것인지에 대해 리엘라는 턱을 괴고 고심했다.

리엘라가 반지를 발견한 것은 아시온이 증거품을 가져왔다며 허둥댔던 바로 그날이었다.

처음 카펫 위에 떨어진 반지를 주웠을 때 리엘라는 그것을 순수하게 아시온의 사적인 물건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당연히 바로 돌려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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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아무리 이 잡듯 찾아봐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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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찾아. 그걸 못 찾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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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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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리엘라를 놓칠 테고, 엔릴이 안투를 잃었으니 영락없이 죽게 되겠지. 그럼 난 역사상 가장 단명하는 황제로 기록될 거고. 너는 산 채로 내 무덤에 함께 순장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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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그 반지 좀 없다고 그렇게 될 것까진 없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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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반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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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제 말은 그러니까…….”

 
헤르한과 아시온이 저 몰래 나누는 대화가 너무나 황당하고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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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없으면 날 놓친다는 건 다 무슨 소리?’

혹시 이것도 이엘의 마석 같은 물건일까?

정화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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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뭔가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이 반지에 박힌 보석은 용병단에서 자라며 숱한 장물을 보아 온 리엘라의 눈에도 특별해 보이기는 했다.

여태껏 본 적 없이 커다란 크기에, 불꽃을 담은 듯 선명하고 영롱한 붉은 빛.

게다가 세공도 아주 섬세하게 되어서 한 줄기 조명에 비추어 보면 햇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사방이 찬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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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애타게 찾는데다가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면 어서 돌려드리는 게 맞긴 하는데…….’

반지를 꼭 쥔 리엘라는 당장 복도에 있을 아시온에게 갈까 하다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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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나만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처음엔 꼭 저만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 서운했다.

그래서 좀 더 아시온 대장을, 그리고 헤르한을 골려볼까 하는 짓궂은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길게 하다 보니 오히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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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나만 아무것도 모르네. 나 때문에 다들 저렇게 애를 쓰는데.’

자신이 안투의 후손이라는 게 처음 드러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자신은 항상 진실을 가장 늦게 아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진실을 깨우쳤을 땐 이미 주변의 모두가 저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마다 모든 진실의 뒤엔 헤르한이 있었다.

리엘라는 거기에 담긴 헤르한의 마음을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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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소중해서 날 지켜주려고. 내가 괜한 두려움에 떨지 않기를 바라서.’

하지만 늘 이렇게 숨어서 가만히 배려받기만 해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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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의 주인이야.”

 
이젠 자신이 헤르한의 주인인데?

리엘라는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

얼마 뒤, 리엘라가 다른 이들 모르게 찾아간 곳은 제스의 연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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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경. 바쁘지 않으시면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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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 바쁩니다.”

제스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까칠한 태도에 면역이 생긴 리엘라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고 산뜻하게 제스의 앞에 가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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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바쁩니다. 이거 다 끝내기 전엔 못 놀아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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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폐하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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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스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위로 떠올렸다.

질문의 의도를 몰라 빤히 보니, 리엘라는 참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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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투의 힘으로 폐하를 정화해주시고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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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말고요. 다들 절 위해 애쓰고 계시잖아요. 제스 경만 해도 저 때문에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연회 준비를 하느라 고생이시고. 폐하께서도…….”

잠시 입을 다문 리엘라의 머릿속으로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뒤척이는 헤르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리엘라를 잃게 되면 절대 안 된다’라면서 아시온을 다그치던 태도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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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많이 불안해하고 걱정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폐하를 위해 뭔가를 해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뭐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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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까? 진심으로 저랑 그런 걸 의논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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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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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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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경이 제일 냉정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긴 하네.

제스는 진지하게 납득하다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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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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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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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잠깐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스가 선반 뒤쪽으로 와서 꺼내든 건 ‘계약서’였다.

안투의 후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명확히 고지한.

사랑이니 의리니 하는 불완전한 것에 의존하지 않는, 확실한 결속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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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본을 넉넉히 만들어두길 잘했어. 분명 쓰일 날이 올 줄 알았다니까.’

제스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리엘라가 직접 나서서 이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하면 별말 못 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선반 너머를 흘긋거리는 제스의 눈에 순간 믿지 못할 장면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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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건?’

아주 진지한 얼굴로 제 손바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리엘라.

그리고 그녀의 흰 손바닥 위에서 붉은 광채를 화려하게 뽐내는 어떤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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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태양!?’

제스는 입을 턱 벌렸다.

손에 힘이 풀려 떨어트린 계약서 낱장은 꽃잎처럼 하롱하롱 그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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