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왜 날 거두었어요?
(113/154)
113 왜 날 거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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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왜 날 거두었어요?
2022.07.28.
주인이 돌아온 황실은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다.
이틀째 저녁엔 예비 황후인 리엘라가 주관하는 만찬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 두 분 폐하의 식탁에 화려한 촛대를 올리는 건 황궁 시종들에겐 언제나 신나는 일.
하지만 이번 만찬만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다들 뭐라도 하려고 벼르고 있는 것 같던데?”
“벼르다니요?”
“황후에게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진상들을 어떻게든 혼쭐내줄 거라면서.”
“네?”
리엘라는 헤르한이 흥미로워하며 전한 소식에 입을 턱 벌렸다.
“벌써 소문이 퍼졌나요?”
“당연하지. 우리 황실엔 버젓한 리오타 왕국 출신들이 꽤 많으니까.”
“아. 그렇지…….”
헤르한의 말대로였다.
이번 원정 때 왕국에서 차출되었던 시종들을 고향에 돌려 보내줄 생각으로 데려갔지만, 대부분이 다시 제국으로 돌아왔다.
억지로 떠밀린 처음에 비해, 이번은 각자 자신들의 의지로 리엘라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었다.
“네가 하도 신신당부하니 자제는 시켰다만, 모두 같은 마음이야.”
심지어 주방장까지 동료들 몫의 식사에 이상한 약을 타다가 걸렸다는 얘기까지 들었을 때, 리엘라는 참지 못하고 참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통쾌한데요.”
“그래? 난 좀 부족한데. 그냥 약을 타게 둘 걸 그랬나, 후회하는 중이고.”
리엘라는 아쉬워하는 헤르한을 달랬다.
“식사 한 끼만요. 그거 하나만.”
상념에 젖은 듯, 리엘라의 눈동자에 아득한 빛이 떠올랐다.
“아픈 기억이 많지만 그런 기억이라도 있는 게 어디에요. 행크가 버려진 날 거두어주지 않았으면 난 그냥 고아로만 컸을 거예요. 적어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는, 행크도 내게 좋은 마음 아니었을까요?”
“…….”
“그러니 이렇게 한번 대접하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요. 어쨌든, 은인인데.”
헤르한은 눈살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 양아치들에게 은인이라니?
절대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
리엘라가 이렇게 나긋이 웃어주는 것, 그거 하나만 보고 견디면서 오늘의 끔찍한 만찬을 버텨내리라 결심할 뿐.
*
그날 저녁, 만찬장의 샹들리에에 수백 개의 촛대가 올라갔다.
상석엔 헤르한과 리엘라가 나란히 앉았고, 긴 테이블의 양옆으로 행크를 포함한 다섯 명의 동료가 자리했다.
왕성에서 다시 만난 이후로, 리엘라는 제 동료들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동료들은 계속 리엘라를 만나길 요청했지만 리엘라는 그것을 일부러 무시했다.
아직 그들과 싸울 결심도, 용서할 결심도 서지가 않아서.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진 것 같았다.
“리엘라!”
행크는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뜨면서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황후가 될 몸이라고 해도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다니. 우리가 그동안 몇 번이나 널 찾은 줄 알아?”
“바빠서요.”
원망과 질책을 일축해버리는 말에 행크의 안면근육이 꿈틀거렸다.
속으로는 리엘라가 괘씸해 죽겠지만, 바로 옆에 황제가 버티고 있으니 드잡이를 할 순 없었다.
‘분위기 망쳐봤자 손해 보는 건 우리니까.’
행크는 화를 꾹 참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괜찮다. 이젠 대단한 분이시니 어련히 바쁠까. 그래도 이렇게 멋진 자리도 마련해주고 말이다.”
“그래. 리엘라 덕에 호강하는군!”
“고맙다. 리엘라! 고맙습니다. 황제 폐하!”
오늘의 만찬은 유독 더 화려했다.
몇 안 되는 인원이 다 먹을 수도 없을 만큼 푸짐하고 진귀한 음식들.
과연 어떤 일념으로 이걸 준비했을지 시종들의 마음이 훤히 보여서 리엘라는 ‘풋’ 웃음이 나왔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던 행크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거냐?”
“뭘요?”
“우리 말이다.”
행크가 커다란 고깃덩이를 뜯어 물으며 말했다.
아직 리엘라는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을 뿐이고, 헤르한은 영 밥맛이 없다는 듯 딱딱하게 앉아만 있는 때.
“어제부터 황성 주변을 돌아다녀 봤는데, 이 동네는 하나같이 저택이 다 으리으리하더구나. 그런 저택은 값이 얼마나 한다더냐?”
‘슬슬 본심이 나오시나.’
리엘라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옆에 앉은 헤르한 역시 필사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황성에는 폐하의 허가를 받은 귀족만 들어와 살 수 있어요.”
“오. 그래? 귀족. 귀족이라…….”
황성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동료들은 오히려 묘한 기대를 품고서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헤르한은 그 눈빛들이 참을 수 없이 한심했다.
당장 테이블을 엎고 저들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참는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리엘라가 원해서 만든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귀족이란 게 뭐 별거냐? 이렇게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눈앞에 계시는데, 적당한 작위 하나 넣어서 교지 하나 갈겨주면 되잖아?”
하지만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헤르한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장 목을 베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발 뻗을 자리나 구하는 꼴을 봐야 한다니.
“폐하. 죄송해요.”
심지어 사과하는 사람이 리엘라라는 사실에 더 속상해서 울분이 이는데, 그때 리엘라가 꽉 움켜쥔 그의 주먹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이젠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그건 헤르한과 리엘라가 미리 정한 ‘약속’이었다.
‘황제’가 없는 자리에서 나눌 얘기가 있을 것이니, 리엘라가 뜻을 보이면 적당히 빠져주기로 했었다.
“잠시 실례하지.”
아니나 다를까, 헤르한이 먼저 자리를 뜨고 나니 동료들은 급변했다.
한숨을 푸우 내쉬며 의자에 거만하게 늘어지고, 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심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쯧쯧. 남자 고르는 눈하고는! 저런 싸늘한 송장 같은 놈이 뭐가 좋다고? 파비안을 버리고 찾은 게 고작 저거냐?”
“에이. 고작 ‘저거’는 아니지. 돈은 많잖아?”
“권력도 세지. 아, 황제잖아. 황제!”
“세상에. 난 우리 리엘라가 이렇게 출세할 줄 알았다니까? 분명 뭐라도 해내서 우리 한몫 든든히 챙겨줄 줄 알았다고!”
동료들은 다 같이 축배를 들었다.
모두 긴장이 풀려 한결 누그러진 가운데 헛웃음을 터트린 건 리엘라뿐이었다.
“제가 파비안을 버린 게 아닌데요.”
“…….”
그 말 한마디에 사방이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제가 버린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세요?”
그야말로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누구는 올 것이 왔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또 누구는 인상을 쓰고.
“리엘라. 옛날 일이라면 정말 미안하다.”
“……!”
“파비안 그 녀석도 참 너무 했지. 널 그렇게 배반하고 말이야. 다들, 안 그래?”
평소라면 버럭 소리를 질렀을 행크는, 의외로 설설 기는 목소리로 리엘라를 달래기를 택했다.
그걸 시작으로 동료들도 몇 마디를 거들기 시작했다.
“그, 그래. 맞아. 파비안이 너무 했어!”
“왕녀가 널 그렇게까지 괴롭힐 줄은 우리도 몰랐다니까. 우리가 무슨 힘이 있었겠어?”
행크는 내친김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엘라는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그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리엘라. 힘든 일이 많았던 것 안다. 하지만 결국은 다 이렇게 잘 됐잖냐? 그땐 우리가 욕심이 과해서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래. 분명 우린 좋은 시절도 있었어. 안 그래? 이 목걸이! 이거 모르겠어?”
“……목걸이요?”
“그래. 이거, 이거 말이다! 네가 어릴 때 몇 달이나 용돈을 모아서 나에게 선물로 줬던 거잖냐. 응?”
리엘라는 행크가 내민 푸른 목걸이를 빤히 보았다.
행크에게 비슷한 목걸이를 선물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깟 싸구려를 무슨 수로 차고 다니냐며 바로 버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걸……, 계속 보관하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이지. 넌 내 딸이나 마찬가지인데. 네가 준 걸 내가 어찌 버리겠어?”
“…….”
리엘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렇군요, 하고 이대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동료들이 내미는 잔에 건배도 하고. 적당한 돈과 작위를 주면 분명 이들과의 결말은 평화롭긴 할 것이었다.
그건 어릴 때 리엘라가 늘 꿈꾸던 것이기도 했다.
내가 노력해서 동료들의 기쁨이 되어야지, 필요한 사람이 되어서 사랑받아야지, 하는.
하지만.
‘이게 정말 옳은 건가…….’
문득 리엘라의 눈에 제 옆 빈자리가 크게 들어왔다.
자신을 위해 얼마나 화를 삭이며 참았는지, 식탁 위 헤르한이 움켜쥔 주먹으로 짓눌렀던 부분이 움푹 패 있었다.
“폐하를 모셔올게요. 모두 식사하고 계세요.”
“그래. 리엘라! 우리 얘기는 잘 풀린 거라고 믿어도 되지?”
“…….”
리엘라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말없이 일어섰다.
*
만찬장 밖으로 나가니, 헤르한은 의외로 바로 앞쪽 복도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폐하. 여기 계셨어요? 엄청나게 열 받아서 멀리 가버릴 것 같더니?”
“열 받은 건 사실. 하지만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가야 하니 멀리는 절대 못 가지.”
헤르한의 농담 아닌 농담.
어쩐지 버겁기만 한 오늘 저녁에, 리엘라는 그게 유일한 숨 쉴 구멍 같았다.
“듣고 싶다던 말은 들었어?”
“모르겠어요.”
“…….”
“사과를 듣긴 했는데.”
“놈들이 사과했다고?”
“안 믿기죠?”
리엘라는 쓰게 웃었다.
이대로 모두를 용서하면 되는 건가.
속이 어지러운 리엘라의 어깨를 헤르한이 감쌌다.
그렇게 둘이 함께 다시 만찬장 안으로 들어서려는 때에.
“거봐. 리엘라 저것은 순진해 빠져서 조금만 어르면 될 거라고 했잖아?”
“그 목걸이가 신의 한 수였다고! 행크. 그거 정말 버리지 않고 갖고 있던 거였냐? 네가 그렇게 리엘라에게 순정이 있었어?”
리엘라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 몰랐던 동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순정은 무슨! 적당히 비슷한 거로 구해왔지. 어때? 감쪽같냐?”
리엘라의 가슴 속에 잔잔히 파문을 일으킨 것은 낄낄거리는 행크의 대답이었다.
아.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래. 그럴 줄은 알았는데.’
기대가 없어도 실망감에 아플 수 있다는 걸 리엘라는 깨달았다.
그렇게 조금은 얼빠진 눈으로 만찬장의 문을 열었고, 동료들은 상황을 파악하곤 낭패감 어린 얼굴로 입을 턱 벌렸다.
“리, 리엘라?”
“아, 그게, 방금 얘기는!”
“……됐어요.”
모두가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해명을 하는데 정작 행크는 등을 돌리고 선 채였다.
리엘라는 다른 동료들을 무시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행크.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처음 그들과 식사를 하기로 했을 때, 리엘라는 그들에게 ‘왜 날 버렸어요?’ 하고 물으려고 했었다.
만일 그 질문에 저들이 처절히 용서를 구한다면 못 이기는 척 받아줄까 생각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질문이었다.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음을.
“왜 날 거두었어요?”
행크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불과 몇 분 전 리엘라를 살살 달래던 때와 달리, 그의 눈빛은 냉담했다.
“이러지 말지. 리엘라. 좋게 좋게 적당히 넘어가면 되잖아. 꼭 끝을 봐야 하냐?”
“대답해줘요. 왜 날 키웠어요? 밥값도 못하고 발목이나 잡을 여자애, 그냥 버리고 갔으면 되잖아요.”
수염으로 덥수룩한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더는 거짓 웃음이나 가짜 목걸이 따위로 리엘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행크도 이제는 깨달은 것이었다.
“말했잖아. 불쌍해서. 딸 같아서.”
“그거 말고, 진짜 이유요.”
“정말 들어야겠어?”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쯤은 진심을 보여줘도 되잖아요, 홀로 되뇌었고, 행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엘라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네가 비싼 구두를 신고 있었거든. 그거면 우리 일주일 치 밥값은 됐으니까.”
끝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된 적도 없었을 관계.
“리엘라. 시간이 더 필요해? 아직도 참으라면 더 참고.”
뒤에서 나타난 헤르한이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느라 무정한 목소리로 물었고, 리엘라는 곧장 몸을 돌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뇨. 이젠 됐어요.’
말 대신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헤르한은 그 마음을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