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살아 있는 안투의 후손을
(119/154)
119 살아 있는 안투의 후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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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살아 있는 안투의 후손을
2022.08.18.
사실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파비안은 어떻게 지금까지 약 없이 살 수 있었던 걸까.
엔릴의 후손들 대다수는 폭주하는 능력을 어쩌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죽는다던데.
그레타가 파비안을 만났을 때 그는 스물넷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건강했다.
그레타는 그게 파비안이 특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 파비안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건 어느 순간부터 그레타에게 ‘생각’이 아니라 ‘믿음’이 되어 있었다.
파비안은 특별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리엘라 블리니테가 바로 안투의 후손이야. 현존하는 단 하나뿐인 정화자지.”
저 사내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특별한 건 파비안이 아니라 그의 옆에 있었던 바로 그 여자라고.
“하하하…….”
그러니 이렇게 웃을 수밖에 없지 않나?
저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내가 그 여자를 갖고 싶어 했던 건 그래서야.”
“그만.”
“하긴 나만은 아니겠지. 그 여잔 온 세상이 탐낼 여자니까.”
“그만하라고!”
악에 받친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레타의 검은 눈동자가 파도치는 밤바다처럼 살벌하게 출렁거렸다.
웃음기는 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레타는 입으로 웃는 내내 눈으로는 그렇게 독기를 품고 현실을 부정했다.
“왜?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진실이잖아. 사실 당신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처음부터 모든 건 당신이 아니라 리엘라 블리니테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는 거.”
아니야.
아니야.
리엘라 걘 아무것도 아니야.
그레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당장 저 사내의 말이 같잖아서 한마디도 더 듣기 싫은데, 순간 그의 목줄을 아직 자신이 틀어쥐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네 능력은 뭔데.”
“뭐?”
“모든 진실을 알고 계신, 잘난 도련님, 당신의 능력은 뭐냐고.”
“아. 나는. 글쎄.”
사내는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죽을 인간답지 않게 역시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끝까지 짜증나는 꼴.
“난, 그냥……. 재미있는 꿈을 꾸는 능력?”
하.
그레타는 코웃음을 치며 읊조렸다.
“그렇구나. 너도 별 볼 일 없는 새끼였네.”
그런 새끼가 과연 끝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고.
그레타는 주저 없이 자신이 쥐고 있던 약병을 복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챙그랑!
작은 유리병이 깨짐과 동시에 사내의 목숨을 살릴 푸른 액체는 낡은 나무 바닥에 스며들어 버렸다.
“이제 너한테는 볼 일 없어.”
그레타는 사내에게서 돌아섰다.
빼돌린 다른 약은 벌써 전부 처분했다.
방금 깨버린 것이 마지막 남은 하나고, 이제 저는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란 걸 알아챈 사내의 얼굴은 참 볼만할 것이다.
하지만 그레타는 사내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무엇도 뒤돌아보기 싫어서 그저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올 뿐이었다.
*
그레타는 저택에서 도망친 뒤로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정처도 없이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도망치다 보니 저쪽 어딘가에 빛무리가 보였다.
‘저쪽에 민가가 있었나?’
반가운 마음에 한발 앞으로 뻗어 나온 발은 그 자리에 그대로 우뚝 섰다.
‘나 수배 중이지.’
그레타는 입술을 깨물며 뒷걸음질 쳤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저곳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일부러 어두운 나무 그늘로만 다니면서 그레타는 끝없는 자조와 환멸에 시달렸다.
그저 후손 하나만 손에 넣으면 대단한 힘을 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이 파비안을 구원했다고 굳게 믿었던 그 시절.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파비안을 살린 게 아니라 죽인 거였어.’
큭큭.
냉소 어린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쯤 그레타가 멈춰선 곳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였다.
‘그러네. 다 나 때문이었던 거야.’
그 절벽 끝에 서서 그레타는 계속 비틀거렸다.
생의 마지막을 직감해서 그런 걸까. 파비안에 대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리엘라와 갈라놓은 그 순간부터 심지가 다한 불꽃처럼 하루하루 생명이 사그라들던 그 남자.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리엘라가 더 미웠던 건 바로 그래서였다.
꼭 리엘라가 파비안의 생명, 그 자체인 것만 같아서.
자긴 어떻게 악을 써도 그 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네가 안투의 후손이야? 어떻게 네가 그런 대단한 존재라는 거야? 너 같은 게.’
생각해보면 그랬다.
리엘라는 모르겠지만.
용병단의 마차를 타고 오른 언덕에서 처음 만났던 그 날에도 그녀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리엘라는 지금도 세상의 가장 밝은 곳에서 누군가의 찬란한 사랑을 받고 있겠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건 바로 나였을지도 모르겠네.’
그레타는 쓰게 웃었다.
비틀거리던 몸은 이제 단단히 세우고, 다리에 힘을 주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대로 한 발만 더.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모든 것도 다 여기서 안녕.
‘축하해. 네가 이겼어. 리엘라.’
그레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절벽 끝으로 마지막 한 발을 뻗으려는데.
‘…….’
순간 멍해지면서 아무것도 감각할 수가 없었다.
벌써 죽은 건가.
아닌데. 아직 아래로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앞이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때 암전이 된 머릿속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죽으면 안 되지. 넌 할 일이 남아 있잖아.’
*
눈을 떴을 땐 아침, 웬 단칸 오두막 안이었다.
기겁한 그레타는 벌떡 일어나자마자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으윽. 이게 뭐야? 내가 왜 여기에……. 아무 기억도 안 나.’
한참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하다가 그레타는 어제의 기억을 일부 떠올릴 수 있었다.
‘아직 할 일이 있잖아.’
‘가야 해.’
‘넌 네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어.’
끝없이 자신을 괴롭혔던 어떤 목소리. 그 집요하고도 소름 끼치던 암시.
“몰라!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레타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발버둥을 치며 악을 질렀다.
그렇게 온몸에 진이 다 빠질 정도로 몸부림을 쳐도 나타나는 이는 없었다.
정처를 알 수 없는 숲속 오두막, 그 주변을 노니는 새의 한가로운 지저귐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떤 ‘목소리’뿐.
“……그래. 알겠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부정도 해보았다.
내가 기어이 미쳤나보다 웃어도 보았고, 다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계획도 세워 보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원점.
그렇게 며칠을 지낸 뒤에야 그레타는 자신이 그 목소리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그레타는 자신의 사념이 이끄는 종착지가 어디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
긴 여정이었다.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순조로운 여정이기도 했다.
수배 중인 처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레타의 앞길은 항상 트여 있었다.
돈이 떨어질 때쯤이면 공교롭게 적선하는 이가 나타났고, 검문을 맞닥뜨릴 때면 또 공교롭게 도망칠 구멍이 생겨났다.
‘신이 이끄는 거야.’
몇 번은 자고 일어나 보니 자기도 모르게 거리를 이동한 적도 있었다.
국경을 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검문을 뚫을 길이 없어서 틈을 보려고 근처에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일어나 보니 이미 국경을 넘은 상태였다.
그러니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이건 신이 이끄는 길이라고.
“호외요! 호외! 황실의 긴급 발표요!”
어느덧 목적지에 가까운 마을에 이르러 그레타는 바닥에 버려진 신문을 주워 들었다.
신문에 실린 것은 제국 황제가 드디어 약혼자 리엘라 블리니테와 결혼식을 올릴 날짜를 확정했다는 소식이었다.
결혼 날짜는 바로 열흘 뒤.
온 세상이 들썩일 세기의 결혼식이 될 것 치곤 지나치게 급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그레타는 평온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결혼식은커녕 황성 근처에도 가지 못할 지방의 백성들도 제 가문에 경사가 난 것처럼 흥분에 들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레타는 웃지 않았다. 물론 울지도 않았다.
그저 표정 없이 담담하게 제 목적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열흘 후든, 일 년 후든, 어차피 결혼식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것이니까.
“저기 누가 오는데? 오늘 방문 예정자가 있던가?”
“아니 없는데. 누구지?”
“베일을 쓰고 있…….”
“자, 잠깐. 저 여자는……!”
그레타는 이곳까지 이르는 내내 단 한순간도 벗지 않았던 베일을 비로소 벗었다.
‘드디어.’
오랜만이었다.
도망치듯 떠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곳은 참 여전했다.
언뜻 보기엔 밝고 휘황찬란하나 차마 틀어막지 못한 죽음의 냄새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것만 같은.
이곳, 중앙신전.
“리, 리오타의 왕녀잖아?”
“그 수배범?”
“범죄자다! 당장 성기사들을 불러와!”
예고에 없던 등장에 신전 뜰에 나와 있던 신관들이 혼비백산했다.
여자 하나에 거품을 물고 도망치는 꼴이란.
그레타는 조소할 틈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번쩍이는 은 갑옷으로 무장한 성기사들이 그레타를 제압하고서야, 신관들은 다시 그레타 앞으로 몰려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냐?”
“또 넙죽 후손을 바치기라도 하려고?”
신관들이 낄낄댔지만 그레타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맞아. 살아 있는 안투의 후손을 고발하러 왔어.”
***
결혼 날짜가 정해졌다. 고작 열흘 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일정이라며 다들 거품을 물었지만, 반대로 사정을 아는 이들은 그저 묵묵히 준비를 서둘렀다.
“그렇다고 그렇게 침울해하실 것까진 없잖아요. 어쨌든 결혼은 결혼인 걸요!?”
루가 리엘라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리엘라는 감흥 없이 넘기던 카탈로그를 그냥 덮어 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는요?”
리엘라의 물음에 답한 건 델쿠르 백작이었다.
“‘조사’ 중이십니다.”
“오늘도…….”
헤르한은 카넬과 라모슈를 세뇌한 범인을 찾기 위해 그 둘의 기억을 헤집고 있었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두 사람의 평생의 기억을 다 읽어야 하는 데다가 그 안에서 교집합을 찾아 일일이 대조해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헤르한은 조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가만히 묶어 두면 미쳐버릴 사람처럼.
무리하는 건 헤르한뿐만이 아니었다.
연맹의 공격이 목전에 닥쳤음을 직감한 이들 모두가 목숨을 걸고 리엘라를 지키고 있었다.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라모슈를 붙잡은 이후로 열흘 가까이, 적의 아무런 대응이 없었기에 더더욱.
“폐하를 뵈러 가고 싶어요. 안 될까요?”
결국 초조함을 떨치지 못한 리엘라가 델쿠르 백작에게 물었다.
그가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대답을 주저하니, 결국 제스가 한숨을 쉬며 저쪽에서 일어났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무리 근위대 기사들이 상주한다 해도 그게 영 못 미더웠는지 제스는 아예 연구실을 내실로 옮기다시피 하며 계속 리엘라의 곁을 지켰다.
“가시죠. 리엘라 님.”
델쿠르 백작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리엘라의 뒤엔 루도 따랐다.
근위대 기사들을 포함해, 저 한 명이 거동하는 데에 따라붙는 인원이 얼핏 열에 가까운데도 리엘라는 이제 그게 익숙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격리실이었다.
줄곧 카넬이 지내던 곳이고, 이젠 병사 라모슈도 함께 있는 공간.
헤르한은 그 안에서 막 병사의 기억을 읽는 중이었다.
“어제보다 폐하의 안색이 더 안 좋아요. 저러다가 쓰러지시면 어떻게 하죠?”
“안 쓰러질 정도로만 힘을 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물론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다행히 리엘라 님이 곁에 계시니까…….”
제스가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리엘라는 이미 헤르한의 곁으로 훌쩍 가버린 뒤였으니까.
리엘라는 헤르한의 조사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몇 발 떨어진 곳에서 헤르한이 조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잠시 손을 떼고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는 그때 등을 안았다.
뒤에서 제 몸을 기대듯 조심스레 끌어안는 손길.
헤르한은 살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자신에게 깃든 천사의 정체를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
“숙제는 다 하고 온 거야? 오늘까지 부케와 티아라를 골라야 하잖아.”
“몰라요. 대충했어요.”
“대충하면 안 되지. 누구 결혼식인데.”
지친 헤르한도. 그를 위로하는 리엘라도.
몹시 고단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 나름대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제스는 간절히 소원했다.
이 평화가 부디 계속되길.
하지만 그때 아시온이 숨이 넘어갈 듯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제스는 제 조마조마한 소망이 결국 허무하게 무너짐을 직감했다.
“폐하.”
애틋하게 몸을 포개고 있던 두 연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시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눈을 질끈 감고 보고를 올렸다.
“신전에서 출두 명령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