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세상이 뒤흔들릴 차례
(140/154)
140 세상이 뒤흔들릴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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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세상이 뒤흔들릴 차례
2022.10.30.
“다과를 조금 더 내올까요?”
“허허. 글쎄. 이제 곧 연회인데 그 전에 배가 다 찰까 걱정이로군.”
“분부할 것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대주교님을 모심에 절대 부족함이 없게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알겠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지.”
루도비코 대주교는 평소보다 더 엄숙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거들먹거렸다.
그가 앉은 곳은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대기실이었다.
하나같이 번쩍번쩍한 가구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달콤한 다과들.
특히 몸을 거만하게 한껏 늘이고 앉은 이 최고급 소파는 그의 신전 집무실에 놓인 것에는 비할 것이 아니었다.
눈길이 닿는 데마다 공들인 티가 역력한 실내를 보면서 루도비코 주교의 입가는 계속 스멀스멀 춤을 추었다.
‘그 건방진 황제가 날 이 정도로 챙길 줄이야?’
루도비코는 격 없이 다리를 꼬고 발을 까딱이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적한 대기실에 비해 바깥은 부산스러웠다.
대연회홀이 손님들로 북적이는 것이 복도 너머의 이곳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황실 쪽에 붙을 것을 그랬어.’
건질 것도 없는 연맹에 붙어서 허비한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까지 들 때쯤, 누군가 대기실 문을 노크했다.
“대주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응? 그대들은?”
루도비코가 아는 얼굴. 하지만 마냥 반가워하기에는 좀 떨떠름한 이들이었다.
연맹의 일을 하며 사귄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이 황궁에는 무슨 일인가?”
“연회에 초대 받아서 왔습니다.”
루도비코는 언짢아졌다.
이자들은 한낱 시골 땅덩이 몇 개를 가진 지방 영주에 불과하기에.
‘대대적인 황실 연회라면서 수준이 왜 이 모양이야? 이런 떨거지들까지 초대장을 받은 거였나?’
그때, 사내들이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카일 님의 부름을 받아 왔습니다.”
“으, 응? 지금 뭐라고?”
예상치도 못한 이름에 순간 뒤통수를 때려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것이 첫 번째이고, 그다음으로는 혹시 누군가 이 대화를 엿들었을까 봐 두꺼비처럼 뻐끔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수발을 들던 시종들은 모두 바깥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루도비코는 다급하게 심호흡하고 사내들에게 호통을 쳤다.
“여기서 그 이름을 함부로 뱉으면 어쩌자는 건가? 누가 듣기라도 하면!”
“누가 듣든 상관없습니다. 전부가 저희의 편이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지금 이 황궁 안에, 연맹의 모든 세력이 결집해 있다는 말입니다.”
“뭐라고?”
“우리가 승리를 거머쥘 날이 드디어 온 겁니다. 대주교님!”
사내들은 도무지 얼떨떨해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루도비코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카일 님은 이미 황실 내부를 전부 장악했다. 이제 남은 것은 황제 헤르한, 그 하나뿐이다.’
‘오늘 연회에 모인 손님들은 전부 카일 님이 불러들인 연맹의 간부들이다.’
‘카일 님은 황제를 무너뜨릴 만한 증거를 다 모았고, 오늘 이 자리에서 황제의 패악을 공론화하고 그를 황위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황궁 바깥에는 우리 연맹의 간부들이 끌고 온 사병들이 진을 치고 있다.’
‘신호만 떨어지면 그들이 들이닥칠 것이고, 이 황실은 발악할 틈도 없이 연맹에 삼켜질 것이다.’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신호라니, 그건 또…….”
“대주교님께서 맡아주셔야 할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저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버거운 루도비코 앞에 사내는 어려운 제안까지 이어 나갔다.
“황제를 정당하게 끌어내리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대주교님께서 나서 주셔야 합니다. 신전의 이름으로 황제의 폭정을 벌하고 안투의 후손을 제 자리에 돌려놓겠다는 뜻을 천명하십시오.”
그러면서 사내는 루도비코 앞에 미리 준비한 선언문을 내밀었다.
“이걸 이따가……. 공인 때 읽으라는 것인가?”
“예. 대주교님.”
루도비코는 놀라서 뭐라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휘황찬란한 황실의 위용에 반해서 앞으로는 평생 황실의 끈을 붙잡겠노라 다짐한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그런데 정말 이런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던 거라고? 나의 신호 한 번이면 황실도 다 무너진다는 건가?’
말하는 대로만 된다면 물론 좋을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 대주교로서 나의 체면이 있고……. 가뜩이나 연맹이 통째로 전범 집단이라고 수세에 몰려 있는 판국에 내가 전면에 나서기는 좀……. 결국 신전이 연맹과 결탁했다는 걸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 되어 버리는 것도 영 우습고…….”
“이런. 대주교님. 설마 겁을 내시는 겁니까?”
“누, 누가 겁을 낸다고 그러는 것인가?”
루도비코는 언성을 높였다.
사내는 그런 루도비코에게 대적하거나 도발하는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다른 당근을 내놓기를 택했다.
“그렇다면 카일 님의 전언이 아직 대주교님께는 닿지 않은 모양이로군요.”
“카일 님의 전언이라니. 어떤……?”
사내는 의미심장한 눈을 들어 대답했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연맹 산하의 조직을 전부 대주교님 아래로 옮기겠다고 하신 말씀 말입니다.”
“뭐? 내 아래로……? 그게 정말인가?”
“예. 황제가 무너지면 안투의 후손은 자연히 신전이 갖게 되는 것이고. 정당한 뜻으로 부활한 세계 연맹까지 신전에 속하게 되면……. 그러면 대주교님께서 세계의 권력을 재편하시는 겁니다.”
루도비코 주교의 눈앞이 아찔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사탕발림이 달콤했다.
‘내가 세계의 권력을 재편한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기에, 더욱 의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어디에서도 이런 계획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는데?”
비단 이 계획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었다.
그레타 전 왕녀가 처형당한 이후로, 루도비코는 연맹의 그 어디로부터도 연락 한 줄 받지 못했다.
듣자 하니 연락통이라는 졸개들은 죄다 도망가고, 간부들마저도 등을 돌리고 조직을 떠났다고 했다.
황제 헤르한이 불러일으킨 거대한 파도에, 그야말로 연맹이 눈앞에서 와해된 것이었다.
루도비코는 더 이상 연맹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번 황실의 부름에 기꺼이 응한 건 바로 그래서였다.
줄을 댈 새로운 권력을 찾기 위해.
그런데.
“연맹은 아직 건재합니다. 확인시켜 드리지요. 대주교님.”
사내가 대주교를 이끌고 움직였다.
그를 따라간 곳은 대연회장으로 들어서는 문 앞.
사내는 내부를 가린 커튼을 살짝 들추어 홀을 빼곡하게 채운 손님들의 면면을 루도비코에게 보여주었다.
“아, 아니. 저자는? 진작 도망친 줄 알았는데. 잠깐. 저자도 왔단 말이야?”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연맹의 모든 간부가 이 자리에 전부 다 모였습니다. 오늘의 승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
“…….”
“대주교님. 부디 카일 님의 부름에 응답해, 저희를 이끄는 새 수장이 되어 주십시오.”
*
몇 시간이 흘러 연회가 시작되었다.
루도비코 주교는 한참 고민하다가 사내가 두고 간 금장의 선언문을 결연하게 집어 들었다.
‘그래. 카일 님의 계획이 어긋날 리 없어.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진 간부들을 이 자리에 다 모으신 것이 바로 그 증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이제 연맹은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카일 님은 몇 수 앞을 내다보시는 걸까?
황궁의 연회장은 그 명성답게 웅장하고 화려했다.
루도비코 주교는 샴페인 잔을 든 손님 사이를 유유히 지나 앞쪽에 특별히 마련된 상석으로 이동했다.
거대한 홀을 메운 인파를 가로지를 때, 루도비코 주교는 전율했다.
이들이 모두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라니.
이제 이들이 모두 나의 우렁찬 외침 속에 환호할 것이라니.
그때 황제와 황후가 고고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회장 안의 이들이 다 탄성을 내지르며 손뼉을 쳤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오만하게 앉아있던 루도비코도 그 순간은 잠시 일어나서 구색을 갖추어 주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마음껏 누려보라고. 지금이 네 놈들이 당당히 웃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 테니.’
루도비코는 끅끅거리며 비열한 웃음을 참았다.
그때 황제 부부를 향해 움직이는 인파 덕에 한 청년이 루도비코의 어깨를 툭 밀쳤다.
주교는 곧장 눈을 세모꼴로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품행이 단정치 못하구나! 감히 대주교님 앞에서!”
바로 옆에서 루도비코의 수행을 돕던 신관이 호통을 치는데도 몸을 부딪친 사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얼굴을 가리는 푸른 머리에, 언뜻 드러난 목덜미가 새하얀 젊은 사내였다.
루도비코는 애써 인자한 표정을 꾸며내었다.
“됐네. 뭘 모르고 실수한 젊은이 같은데. 가보게.”
그 말에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사라지는 사내를 보면서 루도비코는 한껏 인상을 썼다.
‘저런 못 배워먹은! 보아하니 간부는 아니고, 주인 꼬랑지에 붙어서 어쩌다 연회장 안에 운 좋게 들어온 종놈인가 보지? 방자한 놈 같으니!’
화가 났지만 이깟 일에 계속 일희일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참아야지. 카일 님의 뜻을 이룰 시간이 머지않았으니!’
주교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온갖 고상한 척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연회는 무르익었고, 마침내 루도비코 주교가 기다리던 식순이 다가왔다.
“대주교님. 단상 위로 오르실 시간입니다.”
수백의 신관을 거느리고 수천의 신도들 앞에서 기도를 주관하던 그도 이 순간은 심장이 터질 듯이 떨렸다.
“루도비코 대주교.”
단상 위에서 그를 부르는 것은 황제였다.
이 웅장한 황궁의 주인답게 그는 오늘따라 번쩍번쩍 빛이 났다.
“나의 아름다운 황후를 위해서. 이 황실의 안녕을 위해서. 또 안투의 축복으로 이끌어 나갈 내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 축복을 내려 주겠는가?”
“기꺼이 그러지요. 폐하.”
황제의 미소는 오만했고, 거기에 응수하는 루도비코 주교의 미소는 더 오만했다.
네 놈의 그 자신만만한 웃음도 이제는 안녕이로구나.
루도비코 주교는 득의양양하게 단상 위로 올랐다.
그가 손에 쥔 선언문을 펼치자 좌중을 가득 메운 눈이 전부 그를 향했다.
솟구치는 흥분감을 만끽하면서 루도비코는 세상에 다시는 없을 선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될 순간이었다.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고하는 바이다. 나, 에밀 루도비코 프리드란은 신의 부름을 듣는 자이자 세계가 공인하는 중앙 신전의 수장으로서, 또한 신의 후손을 받들고자 모인 세계 연맹의 대표로서, 이 땅에 고통을 몰고 온 황제의 폭정을 고발한다!”
노쇠했으나 무쇠처럼 강건한 음성에 좌중이 동요했다.
루도비코는 곧 세상이 제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라는 망상에 취해서, 전부 제 뜻을 따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청중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낭독을 이어 갔다.
“……황제는 간악하고 타락하였으며…….”
“……우리 세계 연맹은 패악한 황제로부터 신의 씨앗을 구해내고자 하고…….”
“……오늘 이 순간을 기하여 안투의 후손은 신전의 보물임을 다시 천명…….”
“……중앙 신전과 말미암아 뜻을 함께하는 정의롭고 현숙한 새 ‘지도자’로서의 연맹의 부활을 선언하노라!”
루도비코의 발표가 끝났다.
카일 님이 명령하신대로 신호탄을 보란 듯이 제대로 쏘아 올린 것이다.
이제는 제 목소리를 따라 세상이 뒤흔들릴 차례였다.
황제의 폭정을 증명할 이들이 단상 위로 뛰어올라 황제를 고발할 것이었다.
좌중에 가득 찬 이들이 우레와 같이 소리치며 황실을 규탄할 것이었다.
연맹의 군대가 들이닥칠 것이었다.
황제는 꼴사납게 제압당해 무릎을 꿇을 것이었고, 그 옆에 한 떨기 꽃처럼 우아하게 앉아 있는 안투의 화신은 드디어 신전의 수중에 들어오게 될 것이었고.
……그래야 할 것인데.
“…….”
세상이 멈추어 버린 것처럼 고요했다.
쿵쾅. 쿵쾅. 쿵쾅.
아직 헛된 흥분을 떨치지 못한 심장이 사납게 뛰는 소리에 루도비코 주교의 머릿속이 어지러운 가운데.
“……큭.”
정적을 뚫고 들려온 황제의 짧고 낮은 웃음이, 루도비코의 눈앞을 뿌옇게 가리던 탐욕의 창을 산산이 부서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