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하나도 안 아팠으면 좋겠다
(145/154)
145 하나도 안 아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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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하나도 안 아팠으면 좋겠다
2022.11.17.
리엘라는 기절하듯 헤르한에게 몸을 기댔다.
헤르한을 붙잡으려고 전력을 다해 일어서기까지는 했지만 아직 몸을 온전히 가두기는 힘든 탓이었다.
“리엘라. 피가 묻을 텐데.”
“상관없어요. 난 그냥 당신이면 돼요.”
고개를 끄덕인 헤르한은 제 사지가 피로 잔뜩 물든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엘라를 안아 들었다.
더러운 피 한 방울도 리엘라에게는 닿지 않으리라.
그런 각오로 세상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금 리엘라를 되찾은 이 순간에 헤르한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깊은 나락에 빠져서 헤매든지 반드시 너를 안아 줄 거라는 것.
또, 너 역시 내가 얼마나 끔찍한 어둠 속에 처박혀 있든지 내게 돌아와 빛이 되어줄 거라는 것.
두 사람은 다시 하나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헤르한의 뒤로 카일이 숨을 쿨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리엘라의 힘을 빼앗아 연명한 목숨줄이 그 이유일까?
참 질기기도 했다.
때마침 헤르한의 앞에, 드디어 카일의 지배를 떨치고 정신을 되찾은 아시온이 다가왔다.
그는 경직된 얼굴이었다.
늘 까무잡잡하기만 하던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어떤 표정도 제대로 지어내지 못하는 것이 꼭 우는 것 같기도, 떠는 것 같기도 했다.
“폐하…….”
아시온의 힘겹게 뱉어낸 부름에 헤르한이 리엘라를 안은 채로 살짝 몸을 틀어서 섰다.
그게 자신에게 당한 어깨 쪽을 보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인 것을 알고, 아시온은 눈썹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시온. 카일을 이 자리에서 끝내.”
“폐하, 제가 아까…….”
“아시온. 정신 똑바로 차리고 명령을 따라. 네 할 일을 해라.”
“……예. 알겠습니다.”
아시온은 피눈물이 고인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카일에게 나아갔다.
“이게 과연 끝이겠어?”
카일은 코앞에 닥친 죽음에도 어떻게든 리엘라와 헤르한을 옭아 보려고 발버둥이었다.
“네가 안투의 후손을 가진 이상 싸움은 계속될 텐데. 견딜 수 있겠느냐고? 여길 봐. 지금 이 주변의 꼬락서니를 보라고. 잘난 황제. 전부 당신이 이렇게 만든 거잖아.”
카일은 헐떡거렸다.
이따금 피를 토해내느라 말도 뭉개졌지만, 어쨌든 그는 전력을 다해 헤르한을 저주하고 있었다.
“나 하나 죽인다고 끝나지 않아. 리엘라를 독차지하려는 이상, 당신도 나랑 똑같은 괴물인 거야.”
“상관없다.”
하지만 헤르한은 카일의 저주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럴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리엘라를 안겠노라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난 애초에 정의로운 영웅이 되고자 한 적도 없다. 난 그냥 내 사람을 지키면 그뿐이야.”
“…….”
“카일 파를란테. 너와 나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나?”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일 수도,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나에겐 괴물이 되어도 날 지켜 줄 여신이 존재하지만, 너에게는 없다는 것이지.”
헤르한은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돌아섰다.
“부디 마지막까지 보잘것없기를 바란다.”
그때, 리엘라는 의식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헤르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카일을 보지 않았다.
카일은 마지막까지 리엘라의 부름을 기다렸다.
부름이 아니라면 저주라도 바랐으나, 리엘라는 끝까지 그를 외면함으로써 긴 악연의 종지부를 찍었다.
*
모든 싸움이 다 끝났을 때, 황궁엔 완연한 겨울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선선하게 들던 바람이 이젠 제법 코끝을 시리게 만들었다.
새 계절을 맞은 황궁의 하인들은 분주히 창문 단속을 하고 난로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싸늘해진 날씨만큼이나 황궁 안에 감도는 냄새도 달라졌다.
장작 냄새, 두꺼운 새 모직 양탄자의 냄새, 그리고, 승리의 냄새.
자신이 연맹의 하수인으로서 타락했음을 자백한 루도비코 주교는 헤르한에 대한 반역의 죄로 엘슈바이크 제국의 감옥에 임시 갇히었다.
“루도비코 주교를 구명하자는 뜻을 가진 신관들이 힘을 모아 규탄대회를 준비하려는 조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헤르한의 집무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아멜리아가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전에 제가 루도비코 주교의 만행을 모은 탄원서를 먼저 제출할 테니까요.”
헤르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신전에는 아직 루도비코 주교의 사람들이 남아 있겠지?”
“네.”
아멜리아 사제의 대답은 쓸쓸했다.
‘루도비코 주교의 사람들’ 그중에는 제 동료들도 있을 것이니까.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내 결연하게 답했다.
“썩은 뿌리는 뽑아내야지요. 그리고 저 또한 한때 루도비코 주교의 사람이었으니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알겠다. 그대는 리엘라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예. 감사합니다.”
다음은 제스 쪽이었다.
“재판은 계속 진행 중인가?”
“예. 어제 일자 판결들은 따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제스는 연회장에서 잡아들인 연맹 간부들의 처리를 맡았다.
일단 투항을 한 자들은 리엘라와의 약속대로 ‘목숨’은 구해주기로 했으나 각자 죄질이 달라 처리가 어려웠다.
따라서 공개 재판을 통해 저마다 합당한 벌을 내리기로 했다.
“수가 하도 많으니 재판을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나흘째 야근이라고 법무 대신이 도망가려는 것도 간신히 잡아놓았습니다.”
“잘했군. 조금만 더 고생하라고 해 둬. 그러면 이제…….”
루도비코 주교, 그리고 연맹 간부들.
모든 처리를 논하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카일 쪽이었다.
카일은 그날 정원 분수대 앞에서 근위대장 아시온의 검에 즉결 사형되었다.
헤르한은 그의 목을 황성 광장에 올려 만민이 보도록 했다.
그레타가 처형당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 일을 맡은 것은 아시온이었고.
“……명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래.”
헤르한과 아시온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평소라면, 참 볼만했다든가 카일의 목을 보려고 몰려든 인파가 어쨌다든가 하며 수다를 이어 갈 아시온이 오늘은 잠잠했다.
그를 대하는 헤르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필요한 말만 단답형으로 주고받되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이다지도 서먹한 공기가 감도는 건 분수대 정원에서의 전투 이후였다.
“흐, 흐흠! 황후 폐하께서는 아직 주무시려나요? 날이 더 쌀쌀해지기 전에 함께 산책하러 나가볼까 하는데요. 저번에 황후 폐하께서 정원을 산책시켜 주셨을 때 참 좋았…….”
그 삭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고군분투하던 아멜리아는, 순간 생각 없이 튀어나온 ‘정원’ 소리에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내 어둡던 아시온의 얼굴에 그늘이 한층 더 짙게 드리웠다.
‘이를 어쩌나……. 제스 경. 어떻게 좀 해 봐요!’
제스는 아멜리아가 절박하게 보내오는 신호에 마지못해 주군을 잡아 일으켰다.
“폐하. 이만 일어나시지요. 아직 회복 중이신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헤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주군이 떠나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아시온은 도무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제스는 그런 그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또 그냥 내버려 두고 떠나려고까지 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괜히 등을 치며 말했다.
“야. 아시온. 오늘 한잔 할래?”
제스는 평소에 아시온이 아무리 함께 술을 먹자고 질척거려도 쉽게 응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먼저 술을 권하는 건 유례없이 드문 일인데도 아시온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멍청한 자식. 안 어울리게 그런 우울한 표정 짓지 말라고. 제기랄.’
제스는 괜히 신경질이 일어서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시온이 힘없이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제스. 폐하의 어깨 상처는 어때?”
“오늘 아침에도 말했잖아. 별로 깊지 않다니까.”
“그래도. 나 아무래도 자격 미달이지? 세상에 제 주군을 베는 멍청한 근위대장이 어디 있겠냐.”
“…….”
“나 역시 그만두어야 할까?”
아시온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제스는 ‘네 잘못 아니야’라는 다정한 위로나 할 성격은 못되었다.
대신 그는 차분하고 냉정한 말로, 자기식의 위로를 건넸다.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
그 무렵 리엘라는 병상에서 찌뿌둥한 몸을 폈다.
병상이라고 해봤자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늘 지내던 침실 안에 약과 붕대 등이 든 트레이가 하나 들어와 있다는 것.
제스가 하루 세끼 때마다 들어와 귀찮게 군다는 것.
또, 침대 밖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하면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들어와 ‘폐하! 쉬셔야 합니다!’ 하고 간곡히 외친다는 것 정도.
리엘라는 사실 이틀 밤을 푹 자고 일어난 후에 곧장 몸을 회복했다.
진짜 ‘병상’이 필요한 것은 오히려 헤르한이지만, 황제가 부상당했다는 사실은 극비리에 부쳐졌다.
리엘라는 그래서 더욱 걱정이었다.
‘어디서 아픈 티도 못 내고 돌아다니고 있겠지.’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더는 안 되겠다 하고 일어나는 그 찰나에, 헤르한은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리엘라. 어딜 가? 가만히 누워 있어야지.”
그건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할 소리인데.
두 사람이 서로를 함께 흘겨보았다.
그렇게 애틋한 투정을 주고받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는 건 헤르한 쪽이었다.
그 뒤는 포옹이었다.
그는 잠시라도 외출했다가 돌아올라치면 꼭 리엘라를 끌어안고서 심호흡을 했다.
“……으.”
오늘도 그렇게 어김없이 리엘라를 안던 헤르한은, 저도 모르게 얕게 신음했다.
리엘라는 그의 몸이 미세하게 경직된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아파요?”
“아니.”
“거짓말. 방금 으, 소리 냈잖아요.”
리엘라는 묵묵부답인 헤르한을 침대로 끌어당겼다.
“벗어 봐요.”
“아직 대낮인데?”
칼을 맞아 아파 죽겠다면서, 그 와중에도 또 장난기가 서린 눈빛에 리엘라는 하마터면 헤르한의 등을 칠 뻔했다.
“붕대 갈아드릴 테니까 벗어 보세요.”
“제스를 부르지.”
“제가 직접 해주고 싶어서요.”
폐하도 제스보단 내가 해주는 쪽이 더 좋지 않나?
헤르한의 장난에 응수하듯, 이번엔 리엘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헤르한은 피식 웃으면서 셔츠를 벗었다.
힘겹게 벗은 셔츠 안쪽으로 드러난 건, 온통 붕대를 칭칭 감은 몸통이었다.
“여기 피가 배었어요. 어깨 쪽 상처가 또 벌어졌나 봐요. 여기가 특히 잘 아물지를 않네…….”
리엘라는 안타깝게 중얼거리다가 붕대를 잘라냈다.
싹둑, 가위질을 하니 탄탄하게 감겨 있던 붕대가 허물처럼 스르륵 풀려 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야 헤르한의 맨몸이 드러났다.
군데군데가 아직 붉은 자상으로 얼룩져서, 보는 이의 마음이 더 아픈 몸이.
‘아.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또 울음이 올라와서 리엘라는 입술을 꾹 물었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거봐. 그러니까 제스 부른다니까.”
“내가 할 수 있어요. 내 남편이니까 이 정도는 내가 할 거예요.”
그래. 내 남편이니까.
리엘라는 씩씩한 기운을 되찾고서 트레이에서 연고를 집어 들었다.
마개를 열자 쌉쌀한 소독약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졌다.
연고는 차갑고 끈적거렸다.
리엘라는 연고를 묻힌 손끝으로 헤르한의 아픈 상처를 조심스럽게 만져 주었다.
“앗.”
“…….”
“윽.”
리엘라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헤르한은 움찔거리며 묘한 소리를 냈다.
헤르한의 상처에 안타까워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리엘라가, 기어이 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폐하. 지금 되게 이상한 소리 내고 계시는 거 아세요?”
“넌 모르지? 그 연고가 얼마나 차갑고 쓰린지.”
“더 아픈 건 잘도 견디면서. 누가 밖에서 들으면 이상한 상상 하겠어요.”
“알 게 뭐야. 신혼부부의 침실에서 무슨 소리가 나든.”
아. 그건 그러네.
어느새 뻔뻔스러운 것도 닮아 가는지, 리엘라는 헤르한의 말에 수긍하며 웃다가 그의 어깨에 유독 깊게 팬 상처를 보았다.
그건 바로 아시온이 낸 상처였다.
“많이 아프죠?”
“별로.”
“엄청 아파 보이는데.”
리엘라가 말하는 건 단순히 칼에 찔린 것을 뜻하는 게 아님을 알았기에, 헤르한은 더 대답하지 못했다.
헤르한의 몸을 할퀸 수많은 상처.
그 상처가 이리도 아물지 않고 아픈 것은, 그게 전부 헤르한이 믿던 ‘자신의 사람들’에게서 입은 상처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정원 분수대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들은 아시온을 비롯한 1 기사단과 황후 근위대였다.
전부 헤르한과 리엘라에게 확실한 충성을 맹세하고, 수차례 검증을 받은 믿음직한 무관들이었다.
그 일이 있었던 직후 그들은 전부 일선에서 물러나 근신 중이었다.
대체 인력이 업무를 보는 동안, 그들에겐 전부 감시가 붙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기가 감히 주군을 해하려고 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을 시도한 이들만 벌써 열 명이 넘어서였다.
상처를 낸 자들이 그렇게도 아플진대 헤르한은 오죽할까.
“그 아픔도 내가 다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끔찍한 소리 마.”
“진짜예요.”
헤르한의 몸에 구석구석 꼼꼼하게 약을 발라주던 리엘라는, 마지막으로 듬뿍 찍어 바른 연고를 어깨 쪽 가장 깊은 상처 위에 덧발랐다.
흰 손끝이 살결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느낌에 헤르한은 미간을 찌푸렸고, 리엘라는 그렇게 일그러진 미간조차 안타깝고 사랑스러운 마음에 입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폐하. 이제는 하나도 안 아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