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 신전의 새 수장으로 (150/154)


#150 신전의 새 수장으로
2022.12.04.



“이엘 경!”

리엘라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대사관 직원이 자리를 피해 주고 난 뒤로도 믿지 못해서 제 앞에 다가오는 그를 계속 빤히 보았다.


“다시 온 거예요?”

그는 아무리 봐도 이엘이 맞았다.

흰 피부와 대조되는 흑색의 눈동자, 또 호기롭게 들어온 것에 비해 막상 눈을 맞춰 주니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모습까지.


“어떻게……. 왜 다시 온 거예요?”

리엘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히 이엘은 며칠 전에 떠났었으니까.

황제의 명이었다.


“이제 감시를 거두어 주지.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그 후엔 자유롭게 황궁을 떠나도 좋다.”

 
정원 전투 이후.

치명상을 입고 간신히 숨이 붙은 이엘에게, 헤르한은 그렇게 말했다.

드디어 이엘의 속죄가 끝난 것이었다.

바이스 가문이 연맹에 가담했던 사실은 기록에서 지워졌고, 황궁 병영 안에 볼모처럼 잡혀 있던 이엘의 가족들도 풀려났다.

헤르한은 그들에게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어느 마을에 저택 한 채를 하사했고 정착금과 새 일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자유를 얻은 이엘은 거동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하자마자 가족과 황궁을 떠났다.

그게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다.


“제가 다시 온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래서가 아니라……!”

얼마나 서운했는데요.

리엘라는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하는 대신 그냥 이엘을 흘겨보기만 했다.

이엘의 가족들이 떠날 때 리엘라는 직접 황궁 성벽까지 나가서 그들의 마차를 배웅했다.

악수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잘 가라는 당부 정도는 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엘은 끝까지 리엘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게 얼마나 섭섭했던지.

그렇게 지긋지긋했나. 이렇게 뒤도 안 보고 떠나버릴 줄 알았다면, 구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쯤은 미리 해 둘걸.

리엘라는 이엘을 보내고 나서도 한동안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눈에 밟혔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이사 준비만 마치고 다시 왔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처음부터 떠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할 일이 산더미인데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

그러면서 이엘은 리엘라 앞, 책상에 놓인 서류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덜름하게 드러난 소매 아래로 그의 하얀 손목에 붉은 상흔이 잔뜩 남은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리엘라는 입술을 꾹 물면서 서류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부지게 말했다.


“이제 그만 해도 돼요. 이엘 경.”

그 말에 뻗어 오던 이엘의 손이 우뚝 허공에 멈추었다.


“이제 그만 홀가분해져도 돼요. 이엘 경은 목숨을 바쳐서 우릴 구했고, 폐하는 이제 이엘 경을 다 용서하셨어요.”

그 말에 이엘의 가슴이 쿵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속을 알 수 없이 깊은 눈은 더욱 아득해졌다가, 이내 살포시 감겼다.


“아니요. 다는 아닐 겁니다.”

“다는 아니라고요?”

“제가 지은 죄가 꽤 많아서 말입니다.”

“내가 모르는 죄가 또 있나요?”

“예.”

“정말이에요? 그게 뭔데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평생.’

영문 모를 말만 하는 이엘은 아주 편안한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건 리엘라가 이엘을 마주한 이래로 처음 발견한 ‘평화’였다.


‘이제는 웃네. 늘 뭔가에 쫓기는 것만 같은 얼굴이더니.’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미소가, 어째선지 리엘라에게서 이엘을 추궁할 마음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엘은 그저 가만히 자신을 바라봐 주는 리엘라에게 품 안에 소중히 넣어 온 것을 꺼내어 내밀었다.

얇은 책 한 권이었다.


“대신 이걸 드리겠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서점에서 운 좋게 구한 물건입니다.”

“흥. 선물로 어물쩍 넘어 가려나 본데 나 그렇게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을……!”

리엘라는 그가 내민 것을 관심 없는 척 흘깃거리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선물 따위에 약해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곧바로 만면에 화색이 퍼져 나갔다.


“이 책 혹시……!?”

“결혼 선물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리엘라는 단번에 책을 집어 들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여기저기서 온갖 진귀한 물건이 축하 선물이랍시고 밀려들었지만 이것보다 더 마음에 드는 선물은 없었다.


“고마워요. 이엘 경!”

리엘라는 사양 없이 밝게 외쳤다.

그때 마침 문밖에 있던 루가 집무실 안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리엘라를 불렀다.

황제 폐하가 대사관 앞까지 마중 오셨다고, 이만 일어나시는 것이 좋겠다고.

리엘라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리엘라가 옆을 지나갈 때, 감히 가까이할 수 없었던 향기가 이엘의 코끝을 스쳤다.

어느덧 찬 겨울인데도 리엘라는 이엘에게 마냥 봄바람이기만 했다.

이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엘 경.”

그대로 집무실을 떠나버리는 줄 알았던 리엘라는 다시 뒤를 돌아 이엘을 불렀다.


“이엘 경. 다시 돌아와서 기뻐요. 꼭 이 선물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고요.”

 

 
선물 때문은 아니라면서.

이엘이 선물한 책을 두 팔로 꼭 끌어안고 활짝 웃는 리엘라는 아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엘은 그런 리엘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리엘라가 돌아서기 전에 먼저 눈을 감았다.

*

그날 저녁, 헤르한은 유독 말이 없었다.

모처럼 단둘이 오붓이 하는 저녁 식사 때도, 리엘라에게는 이것저것 더 먹으라고 권하면서 정작 제 접시엔 음식을 반 이상이나 남겼다.

혹시 호수궁에서 리엘라가 이엘을 만난 일로 신경을 쓰는 것인가 했는데 그건 전혀 아니었다.


“본인이 굳이 황궁에 남고 싶다고 자처한 것이니 알아서 하겠지. 다만 대사관 일로 널 귀찮게 하면 그 즉시 바로 쫓아내겠다고 했어.”

애초에 이엘이 돌아온 것은 헤르한이 먼저 허락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엘의 이름을 담는 그의 말투와 눈빛에도 전과 같은 긴장감은 없었다.


‘그러면 뭐지?’

더 대면해야 할 적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부관들과도 잘 화해했고, 결혼식 준비도 큰 문제없이 순조롭다.

게다가 오늘 아침만 해도 헤르한은 평소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폐하. 혹시 고민 있으세요?”

“응? 아니.”

헤르한은 생각도 거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을 향해 눈을 흘겨 뜨며 다시 물었다.


“아닌데. 분명히 고민이 있어 보…….”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난 헤르한이 작은 테이블 위로 허리를 숙여 리엘라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동그란 티 테이블 위, 찻잔과 주전자가 달그락거렸다.

쪽.

홍차 향을 그대로 머금은 입술은 쌉싸래한 숨결만을 남기고 짧게 떨어져 나갔다.

헤르한은 여전히 리엘라 쪽에 얼굴을 가까이 한 채로 대답했다.


“네가 너무 예뻐서.”

“제가 너무 예쁜 게 왜 고민이 돼요?”

“심각한 고민이지. 내 눈에만 예뻐야 할 텐데 아무한테나 다 이렇게 예쁘면 어쩌나 너무 걱정되잖아.”

순 엉터리 같은 소리.

리엘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하는 헤르한을 노려보았다.

삐죽 입술도 내밀어 보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리엘라의 턱을 감싸 쥔 큰 손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헤르한의 입술이 다시 다가왔다.

조금 전과 달리 천천히 다가온 입술은 리엘라의 붉은 입술 살결 위를 천천히 쓸고 촉촉하게 문질렀다.

서서히 포개지고 나서도 헤르한은 리엘라의 도톰한 입술을 한참 물고 어르면서 공을 들였다.

간절하게 깊이 눌러 왔다가 또 짓궂게 겉면을 핥고 물러나는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애가 탄 리엘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틈만을 노리고 있던 헤르한은 곧장 맹수처럼 깊숙이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까 홍차 향은 썼는데 깊이 얽혀드는 숨결은 달았다.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눈살에 힘을 풀고 헤르한의 입맞춤에 녹아들었다.

헤르한은 리엘라에게 더 가까이하기 위해 몸을 더 낮추었다.

그때 찻잔 하나가 헤르한의 팔꿈치에 걸려 아래로 떨어져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아앗!”

“리엘라. 괜찮아?”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깨진 파편과 찻물이 잔뜩 튄 건 오히려 헤르한 쪽이었다.


“폐하. 씻고 옷을 갈아입으셔야겠어요.”

“난 괜찮은데. 그보다 하던 거나.”

잔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시종들이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주변을 치우기 시작했다.

헤르한은 자신을 일으켜 세워 욕실 쪽으로 미는 손길을 그리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차마 리엘라의 손을 뿌리치는 법은 몰라서 꾸역꾸역 움직였다.

리엘라는 발꿈치를 들고 그런 헤르한에게 속삭였다.


“그러니까요. 하던 거 계속해야 하니까.”

“……!”

“먼저 욕실에 가 계세요. 저도 곧 갈게요.”

리엘라의 수줍은 유혹에 헤르한의 눈이 번뜩거리며 불타올랐다.

그는 리엘라를 확 끌어안아 목덜미에 진득하게 입 맞추고는 알아서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향유는 네가 좋아하는 장미꽃 향으로 풀어 놓을게.”

리엘라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헤르한이 물러난 뒤에는, 헤르한보다 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실 밖으로 나왔다.

헤르한에게는 깜빡 속아 넘어가는 척해 주었지만.


‘흥. 이젠 어림도 없어요. 입맞춤으로 대충 무마하면 눈치 못 챌 줄 알고?’

헤르한이 혼자만 끙끙 앓으면서 저 모르는 꿍꿍이를 꾸미는 것.

이제 리엘라는 그가 눈을 깜빡이는 모양새만 보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아직 말 못 할 일이라고 하면 봐주려고 했는데.’

대충 시치미를 떼려는 헤르한의 시도가 리엘라의 오기를 더 불태웠다.

이렇게 된 이상, 조른다고 해서 헤르한이 고민을 순순히 고백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빈틈을 노려야 하고, 이런 경우 빈틈은 늘 ‘그 사람’이었다.


“헉, 헉!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호출하셔서 급하게 왔습니다.”

“맞아요. 급한 일이에요. 폐하가 욕실에서 나오기 전까지 끝내야 하니까.”

“무엇을…….”

“솔직히 말해줘요. 아시온 대장. 폐하께서 지금 내게 숨기고 계신 일이 뭔지 들어야겠어요.”

단도직입적인 포고에 아시온이 입을 턱 벌렸다.

정말 뭐가 있긴 있었구나.

리엘라는 황당하면서도, 공세를 놓지 않으려고 단호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 안 됩니다. 말 못 합니다. 폐하께서 반드시 입단속 하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충신으로서 그 명을 어길 수는…….”

“그러니까요. 그 ‘충신’ 자리 누가 지켜준 건데.”

“…….”

“아시온 대장 용서받게 해주려고 내가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모르나 봐요. 아니면 아시온 대장의 충심은 나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건가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대장을 엄청 걱정하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아니, 저는…….”

“서운해요.”

“……!”

아시온은 진땀을 흘렸다.

손사래를 치면서 정말 아니라고, 당신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있다면서 버텨 보았지만, 그래도 리엘라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 안 되는데. 정말로…….”

아시온은 울먹임이 섞인 탄식을 끝으로 모든 것을 실토하고 말았다.

리엘라는 아시온의 얘기를 차분히 다 듣고 난 뒤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군요. 아멜리아 사제가 중앙 신전의 새 수장을 찾고 있다니. 하긴,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새로운 감독관이 꼭 필요하긴 하겠어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한데요. 왜 그 일을 폐하께서 걱정하시면서 비밀에 부치라고 하신 거죠?”

“그건…….”

이것까지 말해야 하는 건가.

아시온은 리엘라의 눈치를 보았다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눈치를 본답시고 조심스레 흘긋거린 눈길, 그 안에 담긴 속셈을 또 리엘라에게 들키고 말았으니까.


“말해요.”

“그게 왜 그러냐면…….”

아시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그냥 황후 폐하의 편에 붙어 버리자. 어차피 주군께서도 황후는 이기지 못하시는 것 같던데.


“새 수장의 후보로 황후 폐하가 거론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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