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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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국제 협회 산하 기구, 퍼팩트 밸런스 코퍼레이션(PB Corporation).
그 건물 지하 17층에 위치한 뱅크 아이템 관리팀 부설, 컨트롤 센터.
“이능파 감도 안정적입니다.”
“좌표 확인 바랍니다.”
“북위 37.3도, 동경 126.5도.”
“입력 완료했습니다.”
“모든 시스템 준비됐습니다. 가동할까요?”
늦은 밤이었음에도 그곳에 있는 많은 직원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 공간 전체에 깔린 이름 모를 복잡한 기계들과 모니터, 온갖 제어 장비.
마치 항공 우주국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물론 여기선 우주선이 아닌 웬 보라색 돌멩이를 다루는 중이었지만.
“가동해.”
이윽고 뱅크 아이템 관리팀장 클로이의 명령이 떨어졌다.
“차원석 가동!”
“카운트 다운 시작합니다.”
“출현까지 앞으로 십, 구, 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고 모든 직원의 시선이 한 모니터에 쏠렸다.
모두가 숨죽인 채 기다리길 잠시.
“생성 성공했습니다!”
누군가 소리쳤다.
동시에 짤막한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좌표 확인해 봐.”
하지만 클로이는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는 듯 일갈했다.
“오차 없습니다. 정확하게 한국, 인천항 근처입니다.”
“좋아. 차원석 상태는?”
“안정적입니다. 이 정도면 일주일 이상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클로이 또한 긴장을 풀었다.
그리곤 곧바로 위성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클로이입니다.”
「그래, 어떻게 됐어요.」
여전히 품격 있는 우아한 목소리.
PB코퍼레이션의 대표, 에마가 물었다.
“방금 던전 생성 성공했습니다.”
「등급은?」
“레드 등급입니다.”
「호오, 오랜만에 쓰는 건데도 꽤나 상태가 좋군요.」
에마 대표가 작게 웃는다.
「그래서? 차원석까지 써서 이제 뭘 어떻게 하려는 건가요. 던전을 생성하는 것과 시간석을 회수하는 게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일단은 한국 협회가 토벌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입니다.”
「아, 혹시 토벌이 시작된 틈을 타서 시간석을 탈취해 온다거나?」
“아닙니다. 물론 못할 거야 없지만 굳이 무력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협회 정도 되는 조직을 상대로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리스크가 상당하니.”
「그럼…?」
“최대한 합법적으로 가야죠. 이번 던전을 미끼로 ‘적대적 인수합병’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적대적 인수합병.
그 말에 에마 대표는 조금 놀란 듯 대답을 아꼈다.
협회끼리의 ‘적대적 인수합병’은 일반 기업과는 그 의미가 크게 달랐던 까닭이었다.
그것은 곧 협회끼리의 전쟁을 뜻하는 말이었으니.
“그렇군요. 적대적 인수합병이라… 클로이 팀장,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무서운 사람이네요.”
“과찬이십니다.”
클로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컨트롤 센터 중앙에 설치된 유리관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꺼운 유리관 안에는 보라색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차원석.
시간석과 같이 국제 협회에서 지정한 ‘뱅크 아이템’ 중 하나.
이능파를 조정해 인공적으로 차원을 열어 던전을 출현시킬 수 있는 아이템.
현재 밸런스 팀에서 가지고 있는 차원석은 5년 전, 필리핀에서 출현한 레드 등급의 차원형 던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협회 간 양도 불가’ 규칙에 따라 필리핀 협회가 계속 보관해 왔지만, 뱅크 아이템이 다른 협회 손에 들어가 있는 걸 극도로 꺼리던 사무총장이 그것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때문에 당시 독립 협회였던 필리핀 협회를 거액에 인수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뱅크 아이템을 양도받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차원석은 국제 협회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대부분의 뱅크 아이템 또한 이러한 방법을 통해 회수해왔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독립 협회 입장에서도 국제 협회와의 인수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물론 그 빌어먹을 한국 협회를 제외한다면.
‘하여간 아시안 놈들, 자존심만 세 가지고.’
클로이가 혀를 찼다.
물론 인수를 거부하는 독립 협회가 한국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만큼은 사안이 조금 달랐다.
시간석이 그들에게 있었으니까.
「아무튼, 케인 팀장이랑 잘 얘기해서 진행해 봐요. 난 다른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신경 못 써줄 거 같으니까.」
“다른 프로젝트라면…?”
「이번에 마르크 팀장이랑 얘기를 해봤는데, 슬슬 헌터들 밸런스 조절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이 나왔어요. 뭐, 말 나온 김에 미리 준비를 좀 해둘 생각이에요.」
“아, 벌써 그럴 시기인가요.”
에마 대표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 애들은 워낙 배우는 게 빠르다니까? 저번에 듣자 하니 무슨 B랭크인데 고유 클래스를 각성한 친구도 있다고 하고…….」
그렇죠, 클로이가 작게 대답했다.
「아, 그건 그렇고… 그 이레귤러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서울 작전 본부장 말이에요. 마르크 팀장 말로는 너무 대중에게 드러난 인물이라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곤 하는데.」
“이번 작전을 겸해서 같이 처리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 변수는 미리미리 손을 써놓는 게 좋겠죠.”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뭐, 다른 팀 업무 대신해준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지. 마르크 팀장이 좋아하겠네.」
“네… 그럼 이대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계속 수고해줘요.」
통화를 마치고 클로이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통신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윽고 들려오는 젊은 남성의 목소리.
헌터 밸런스 조정팀 소속의 한국 담당자였다.
“오랜만에 연락드리네요. 어떻게, 요즘 잘 지내요?”
「그럭저럭. 이번 의뢰에 실패했다는 것만 빼면.」
클로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별일이네요. 당신 같은 사람이.”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오랜만에 당신이 맡아줄 일이 있어요.”
「…밸런스 조정 건입니까?」
“네.”
「타깃은?」
“들어본 적 있을 거예요. 준우 김이라고. 한국 협회 소속 작전 본부장이에요.”
젊은 남자의 대답이 끊겼다.
영문을 모르는 클로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금 물었다.
“할 수 있죠?”
「……물론입니다.」
“정체가 발각되지 않는 선에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마세요. 뒤처리는 우리가 해 줄 테니까.”
「그러도록 하죠.」
“아 그리고, 조만간 우리 팀에서 뱅크 아이템 회수 업무도 같이 들어갈 거에요. 혼선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요. 작전 기획서 보내드릴 테니 한 번 읽어보시고.”
「알겠습니다.」
클로이는 통화를 마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앞으로 바빠지겠네.’
벌써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아닌 게 아니라, 앞으로는 제때 퇴근할 생각은 깔끔히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이 회사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
서울 본부, 통제팀.
회의실에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채였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김민주 팀장을 비롯한 10개 작전 팀장들과 이아영 실장, 편창현 팀장까지 모두가 참석한 회의였다.
“수, 수중 던전이요?”
간략한 브리핑을 마치자 이아영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게다가 황동휘 대리 말로는 레드 등급으로 추정된답니다.”
“…아이고.”
“야단났네…….”
여기저기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나름 베테랑이라는 이들이 저렇게 반응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수중 던전.
지상에 출현하는 일반 던전과 달리 깊은 바닷속에 출현하는 특수 던전.
기본적인 구조는 일반 던전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물속에서 토벌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땅에서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기도 힘들뿐더러 특수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토벌을 진행해야 하기에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수중 던전이 힘든 건 바로 물속이라는 공포감.
자칫 전투 중에 물이라도 먹기 시작하면 패닉에 빠지기 쉽다.
안 그래도 긴장하지 않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던전에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하물며 레드 등급의 수중 던전이라니.
작전 팀장들마저 막막하게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그나마 담담한 자세를 유지하던 김민주 팀장이 물었다.
“작전 개시일은 언제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빠르면 다음 주. 레드 등급이라 오래 두면 위험하니.”
몬스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던전에서 빠져나와 도심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몬스터가 던전을 탈출하는 시점은 옐로우 기준 한 달.
당연히 헌터들은 몬스터가 탈출하기 전에 토벌해야 하지만, 지상 던전이야 딱히 그런 걸 신경 쓰진 않는다. 워낙 헌터가 많으니 기간에는 무조건 토벌이 되니까.
다만 레드 던전은 탈출 시점이 불분명하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충남에 출현했던 레드 등급 던전에서 사흘 만에 몬스터가 탈출한 기록도 있었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이아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수중 던전인 만큼 특수 장비가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번 주까지 준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정이 빠듯하긴 한데…… 가능은 할 것 같네요.”
이아영이 턱을 감싼 채 대답했다.
“작전팀은 어떻습니까. 레드 등급이라 인원이 상당히 필요할 겁니다. 그렇다고 다른 토벌 일정을 무시할 순 없을 테고. 이번 작전에 참가 가능한 인원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전원 투입은 어렵긴 하겠지만, 길드에 협력 작전 요청하면 인원은 충분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편 팀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통제팀은 추가적인 던전 정보 파악하는 대로 저한테 보고하지 말고 바로 작전팀으로 넘겨주세요. 김민주 팀장은 오늘부터 작전 회의 들어가 주시고요.”
모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더미를 정리하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이번에도 다들 잘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홀로 남은 회의실.
정리했던 서류를 다시 뒤적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여전히 께름칙한 부분이 남았다.
‘대체 전생에서도 없었던 던전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걸까…….’
과거에는 없었던 던전이 뜬금없이 출현하다니.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짚어봤지만, 이렇다 할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누군가 인공적으로 던전을 생성했다, 정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상황이 너무 복잡해진다.
던전을 생성하기 위한 차원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걸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시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뱅크 아이템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가진 인원들도 대거 필요하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단체라고 하면…… 역시 국제 협회밖에 없다.
근데 그들이 굳이 인천 앞바다에 던전을 생성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길게 늘어뜨렸다.
‘뭐, 어떻게든 억지로 끼워 맞춰 본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국제 협회 놈들이 이전부터 눈엣가시였던 한국 협회를 흡수하려고 일부러 까다로운 던전을 열어 사고를 유도하는 거라면?
혹은 전생에서와 달리 시간석을 탈취하지 못한 미국 지부가 시간석을 회수하기 위해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너무 소설이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말도 안 되지. 국제 협회가 뭐가 아쉽다고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래, 꼭 전생이랑 똑같이 흘러간다는 법도 없는데 조금은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은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