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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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인에게 서류를 던져주고 하노이로 돌아가는 차 안.
“저…….”
룸미러로 비엣 총정치국장의 동태를 살피던 수행비서가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그놈들, 꽤나 똑똑한 놈들 같은데… 적으로 두는 것보단 아군으로 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비엣이 눈을 부릅뜨자 수행비서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 북쪽에 짓고 있는 허브 말이다.”
비엣은 그간 조사했던 걸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좀 알아보니까, 녀석이 진행하고 있는 허브의 연간 기대 수익이 이것저것 다 빼고 1억 달러라 하더라. 그럼 달로만 따져도 830만 달러 가까이 되지.”
“김이 약속한 건 그 중 50프로지 않습니까? 월 400만 달러면 꽤 큰…….”
“큰돈이지. 큰돈이긴 한데.”
비엣이 룸미러를 통해 비서와 눈을 맞췄다.
“너라면 1억 달러를 다 먹을 수 있는데, 그 50%에 만족할 수 있겠나.”
“…….”
“공사 한 번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통째로 내게 굴러들어온다. 그걸 굳이 나눠 먹을 이유가 없지.”
수행비서는 공사라는 단어에 조금 전 후인에게 던져주었던 서류가 떠올랐다.
당원들 사이에서 괴담처럼 퍼져 농담으로 쓰이는 ‘공사 서류’가 그것이었다.
확실히 그 서류 한 장이면 기존의 계약을 뒤집어엎고 한국 놈들에게서 협회의 지분을 모조리 뺏어오는 게 가능하다.
수년간 비엣을 보좌한 경험상, 그가 가능하다고 판단하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거액이 걸린 문제라면 더더욱.
다만 걱정되는 건 그 서류를 왜 하필 후인에게 맡겼냐 하는 부분이다.
서류의 내용을 먼저 알려줘 봐야 좋을 게 없었으니까.
“후인 그놈이 과연 시키는 대로 할까요. 보아하니 이미 김한테 물든 것 같던데…. 서류를 그냥 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예…?”
“솔직히 말해서, 난 후인 그 새끼가 마음에 들어. 교육은 잘 됐는데 겁이 많아서 허튼 생각을 잘 못 하거든. 개를 키울 때도 그런 놈들이 제일 다루기 편한 거 알지?”
수행비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개가 지금은 다른 주인한테 붙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놈한테 직접 일을 맡긴 거야. 겁 많은 개를 다시 불러오려면 몽둥이만 한 게 없거든.”
그제야 수행비서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경고……입니까?”
“그래. 그놈이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 서류를 눈앞에서 본 이상 본인도 알겠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엔 그 서류가 자기에게 올 거라는 것쯤은.”
“…….”
수행비서는 저도 모르게 등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비엣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김준우한테 물들었다고 해도 본인 목숨이 걸렸으면 말이 달라지지.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것보다 내부 분열이 더 효과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놈은 김준우 일행이 돌아가고 난 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거든.”
비엣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놈은 이제 선택지가 없어. 김준우를 본인 손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김준우 대신 본인이 죽든지. 그런데 뭐 상식적으로…….”
“그놈이 후자를 선택할 리가 없죠.”
“내 말이.”
클클클.
차 안에 비엣의 낮은 웃음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
하노이 작전본부, 작전기획실.
비엣에게 몇 번이나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닿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와중이었다.
“……이게 뭡니까?”
후인이 의문의 서류를 가져다주었다.
원어로 적혀 있어서 읽을 방법은 없었다.
“베트남 지부 인프라 구축 및 현지 헌터 육성을 통한 일당 체재 견제 안건.”
“……예?”
“그런 제목의 서류입니다. 밑에 당신 서명까지 돼 있습니다. 당신 이름으로 결재된 서류라는 거죠.”
“…….”
당최 뭔 개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이런 문서를 본 적도 없을뿐더러, 서명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일당 체재 견제 안건이라…….’
그게 공산국가인 베트남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따위 문서를 대체 어디서… 아니 그것보다, 이 문서 대체 누가 만든 겁니까?”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후인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찌 됐든 이런 서류가 존재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금 전에 비엣 국장이 와서 전해줬습니다. 이걸 당신 사무실에 숨겨 놓으라고요.”
“아…….”
머릿속에서 대충 아귀가 맞춰졌다.
덕분에 주먹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내일쯤 사무실로 공안이 들이닥칠 겁니다. 만약 그들이 이 서류를 발견하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게 내란죄로 잡혀 들어가게 되겠군요.”
“당신과 당신 동료 모두요. 사안이 사안인지라 아마 모든 사업이 드랍 될 겁니다. 세 분의 신변이 위험해지는 건 덤이고요.”
“우리를 스파이로 몰아서 인수합병을 백지화시키고 협회 지분을 통째로 꿀꺽하겠다?”
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가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시발, 그렇게 경고했는데 결국 욕심을 부리네…….”
“솔직히 상정하고 있었던 일 아닙니까.”
“쓰읍, 그건 그렇긴 한데.”
뭐, 믿을 놈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작정하고 공사를 칠 줄이야.
그래서 우리 연락을 그렇게 안 받은 건가.
우리와 연락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이 얼마나 철두철미한 개새끼인가.
나는 이를 으득 씹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걸 왜 당신한테 맡긴 겁니까? 지금처럼 다 불어버리면 결국 그쪽한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설마 이걸 생각 못 했을 리는 없을 거고.”
“생각 못 했을 겁니다.”
“…예?”
“이걸 저한테 맡긴 건, 저한테도 같은 경고를 날린 겁니다. 다시 본인한테 붙지 않으면 다음엔 내 차례라는 경고. 정치국장 말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했던 저로선 그 경고를 무시할 만큼 담이 좋지도 않고요.”
“…….”
“솔직히 말하면…… 예, 저도 고민했습니다.”
이야기와는 다르게 후인의 표정은 여전히 퍽 담담했다.
“그런데 왜 결국 저한테……?”
“우리한텐 능력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알아요. 제가 좀 감성적이죠. 하하하.”
“별…….”
기가 차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구슬리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에 자기 목숨을 건다니.
한 달 전엔 이렇게까지 또라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제가 이 서류를 처분해버리면 당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네.”
“그렇다고 이대로 가지고 있으면 다 차려진 밥상이 그놈한테 넘어갈 거고?”
“더불어 세 분 모두, 한 30년은 베트남 감옥에서 보내셔야 할 겁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제가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떡합니까. 그럼 당신에게 모든 걸 말한 의미가 없습니다.”
“하아……. 저한테 너무 어려운 일을 떠넘기시는 거 아닙니까.”
“전 오죽하겠습니까.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에게 제 목숨을 맡겼는데.”
하여간 말은.
‘이제 어쩐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서류를 내버려두는 건 생각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서류를 처분하자니 후인의 말이 마음에 걸린다.
후인은 마치 본인의 목숨만 걸린 것처럼 말했지만 꼭 그럴 거라는 보장도 없다.
이렇게까지 나왔다는 건 협회 소속의 모두를 날려버릴 생각도 하고 있다는 거겠지.
어떻게 뽑아서 교육한 직원들인데 그걸 모두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그냥 지금 당장 한국으로 튀어?
아니, 그런다고 뭐가 해결될 것 같진 않다.
‘시발, 이놈이고 저놈이고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현지 협회를 밥 말아 먹은 거로도 모자라,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내 사업에 손을 대다니.
그것도 이딴 개수작까지 부리면서.
주제를 넘어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마음 같아선 당장에 쳐들어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여긴 한국이 아니다.
그쪽에서 칼을 갈고 나온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비엣은 한 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를 상대로 무력을 쓰는 건 전쟁이나 다름이 없고, 어쭙잖게 대항했다간 역풍만 맞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
그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엔.
“……후인 씨.”
나는 심호흡을 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혹시 제가 저번에 한 말 기억하십니까? 당신 보스, 때에 따라선 적으로 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
뭔가 느낀 듯 그는 몸이 굳혔다.
“이번 사업은 우리한테 정말 중요한 건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신다면…….”
나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부욱―
그의 면전에서 서류를 반으로 찢었다.
***
이후로는 뭐, 예상했던 대로였다.
날이 밝자마자 공안들이 본부로 들이닥쳤고, 모든 사무실을 쥐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들은 내가 있던 작전기획실에서 서류를 발견했다.
그들로선 모두 계획된 일이었겠지만, 한 가지 계획 밖의 일이 일어났다.
서류 반쪽이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하필 없어진 부분이 문서 하단의 서명란이었다.
누가 이 문서를 결재했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사라졌기에, 그들은 나를 연행하긴 했지만, 구치소가 아닌 취조실로 끌고 갔다.
어떻게든 내 자백을 받아낼 심산인 듯했다.
텅 빈 취조실에서 수갑을 찬 채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비엣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당신이 결재한 거 맞지?”
그리곤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참 뻔뻔하기도 하셔라.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글쎄요. 전 처음 봅니다.”
“그런데 왜 이게 네 사무실에서 나왔지?”
“글쎄요.”
순순히 원하는 대답을 할 생각은 없다.
답을 정해 놓은 질문에 나는 계속 똑같은 대답만 내놓았다.
몇 분이 흐르자 비엣은 슬슬 싫증이 나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내 녹음기의 버튼을 끄며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서명란만 없으면 너랑 후인 모두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거 큰 착각이야.”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똑같은 서류 한 장 더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웃어?”
“착각하고 계시는 건 국장님 같습니다.”
그리곤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시는 걸 들어드리려는 거죠.”
“뭐?”
“저희 한국 협회는, 이 순간 부로 베트남 협회 인수를 포기하겠습니다. 물론 이에 따른 그 어떤 위약금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비엣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뭐 하자는 거야.”
“들으신 그대롭니다. 협회랑 허브, 통째로 넘겨드리겠다고요. 그걸 원하신 거 아닙니까?”
비엣이 하, 헛웃음을 뱉는다.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건 아니고?”
“뭐, 썩 틀린 말은 아니군요. 어쨌든 협회를 넘겨줄 테니 우리를 풀어주고 현지 직원들 또한 더는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뜻이니.”
“시발, 성인군자 납셨군.”
“그렇게 봐주신다니 영광이군요.”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번거롭게 할 거 없이 원하는 걸 드린다는 것이니, 나쁜 건 아닐 텐데요.”
어깨를 으쓱이자 비엣이 가늘게 눈을 떴다.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옆에 있던 공안을 향해 턱짓했다.
“……가서 계약서 가져와.”
머지않아 눈앞에 서류 한 장이 놓였다.
베트남 협회와 북부 허브에 대한 최고 운영책임권을 인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서류를 대충 훑어본 후 망설임 없이 서명을 갈겼다.
“이제 베트남 협회 최고 책임자십니다.”
“음”
“그럼 이제 약속대로…….”
그때였다.
철컥―.
비엣이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장전했다.
그리곤 한쪽 입꼬리를 쓰윽 올린다.
“후환은 남겨두지 않는 스타일이라.”
“…….”
정말이지 신뢰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군.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쾅―
“구, 국장님! 큰일 났습니다!!”
공안 한 명이 취조실 문을 벌컥 열며 다급하게 그를 찾았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아뇨! 훨씬 급한 일입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비엣이 총을 거두며 물었다.
“뭔 일인데.”
“그게… 국제 협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순간, 비엣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뭐?”
동시에 나는 미소를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