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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PB 코퍼레이션 본사.
모든 팀이 이전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중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역시나 밸런스 조정팀.
굉장히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마르크 팀장이 언성을 높였다.
“내부 데이터는 1kb도 남기지 마! 지출 내역서든 식단표든 싹 다 지워!”
“밸런스 명단은 어떻게 할까요?”
“당분간 밸런스 업무는 올 스탑이다. 어차피 남아 있어봤자 꼬리만 잡혀!”
“아, 알겠습니다.”
지시에 따라 직원들이 모든 자료를 파기했다.
가장 중요한 자료인 헌터 밸런싱 명단을 파기하는 만큼 사안이 시급하고 중대했다.
그렇게 자료란 자료는 모조리 삭제하고 있던 와중에, 한 남자가 느긋한 표정으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직도 안 끝났나? 꽤나 처리할 게 많은 모양이군.”
토벌권 회수팀장, 케인이었다.
그를 보자 마르크 팀장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도와줄 거 아니면 나가.”
“적반하장이군. 자네 팀 덕분에 회사 전체가 난리가 났는데 어디서 성질인가.”
“…….”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마르크 팀장의 낯빛이 더욱 험악해졌다.
“대표님도 화가 단단히 나셨어. 그러게 처음부터 김준우인가 뭔가 무시하자고 했잖나. 느낌이 안 좋다고”
“자네가 언제 그런 말을……?”
“기억 안 나면 말고.”
“…….”
마르크 팀장은 기가 찼다.
앞으로 토벌권 회수 작업에 방해될 게 뻔하니 빨리 처리하라고 눈치를 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나마 이 정도면 다행이라 생각하게. 하마터면 자네 팀 전체가 물갈이될 뻔했어. 뭐, 본보기로 몇 명은 잘리겠지만.”
“대표님은 뭐라고 하시나?”
“뭘 뭐라고 하겠나. 감사팀만 대기시켜 놓으셨지.”
마르크 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PB 코퍼레이션의 감사팀.
내통자 색출 및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그들을 대기시켰다는 건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하니 한국 파트를 바로 해체할 줄은 몰랐네. 그놈들 교육한다고 꽤 공들이지 않았나?”
“어쩌겠어. 현장직 말로가 다 그런걸. 애초에 쓰다 버릴 놈들이야. 대체할 놈들도 얼마든지 있고.”
“어이구. 무시무시해라.”
케인 팀장이 과하게 호들갑을 떨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그럼 파트장은 왜 살려뒀나? 미스터 황 말이야.”
“최소한 김준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놈 한 명은 남겨둬야지.”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건가?”
“그런 감정적인 게 아니야. 그냥 일일 뿐이니까.”
물론 속내는 달랐다.
어떻게 미련을 갖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 새끼 덕분에 애지중지 키워놓은 부하들을 제 손으로 처리해야 하게 생겼는데.
하지만 애써 본심을 숨기며 물었다.
“어디로 이전할지는 정해졌나?”
“아직. 이곳저곳 알아보고는 있는데…… 마땅한 곳이 없긴 해.”
“이번에 아프리카 쪽 독립 협회들 통합해서 한꺼번에 인수 진행한다면서. 그쪽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 팀 업무에 관심이 많네? 뭐, 그것도 나쁘진 않긴 하지. 어쨌든 최종 결정은 대표님이 하실 테니, 너무 앞서가지 말게.”
케인 팀장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준비되는 대로 대표님한테 연락드려. 며칠 자리 비우실 거라 대면 보고는 힘들 테니까.”
“자리를 비우신다니? 이 상황에 어디 출장이라도 가시는 건가?”
“나도 자세히는 몰라. 듣기론…….”
케인 팀장이 뜸을 들이다가 미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한국에 개인적으로 볼일이 좀 있으시다고.”
“한국?”
마르크 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상황에 한국에 가신다고?
대체 왜…….
‘설마 김준우를 직접 처리하시려는 건.’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뭐가 아쉬워서 직접 현장 일을 하겠는가.
‘개인적인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길래.’
속으로 중얼거리는 마르크 팀장의 얼굴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마치 본인의 턱 끝 바로 앞에 칼이 드리워진 느낌이었다.
***
점심시간이 막 지난 오후.
직원 대부분이 아직 복귀하지 않아 한적한 사무실에서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슬아슬했던 리젠 던전 작전이 무사히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큰 피해 없이 대규모 작전을 성공시켰음에도, 어째 뒷맛이 썩 좋지 못했다.
작전은 둘째치고, 행정본부 폭탄 테러에 작전 본부장 습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협회를 비롯해 시민들과 언론 또한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 터졌다, 터졌다 하더니 진짜 터져버렸네?
> ㄹㅇ;; 그나마 사상자 없어서 다행이지 작전본부 터졌으면 우리나라 망했음;;;
└ 그래서 범인 잡혔음?
└ ㄴㄴ아직 못 잡음
└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협회를 테러할 생각을 하냐;;
> 것보다 차기 작전 본부장은 누가 하냐?
└ 아무도 안 하려고 할걸? 두 달 만에 습격당해 죽었는데 누가 하고 싶어 하겠냐
> ㅅㅂ 이래서 앞으로 토벌은 제대로 할 수 있겠냐
└ 내 말이; 그나마 김준우가 도와주고 있어서 버티고 있는 거지, 김준우마저 등 돌리면 ㄹㅇ망할 듯;;
└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정부 기관으로 들어가면 안 되나? 그러면 최소한 토벌은 계속할 수 있을 텐데
└ 안 그래도 미래민주당에서 토벌권 정부에서 관리하는 법안 추진 중이라 함ㅇㅇ
무슨 일이 있어도 늘 농담 따먹기나 하던 누리꾼들도 이번에는 심각성을 인지한 듯, 불안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하다.
협회는 지금, 사상 초유의 위기에 봉착했다. 단순히 농담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몬스터로 인해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당신은 오늘 이겨도 진 겁니다.’
양민호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폭탄 테러와 본부장을 습격한 범인을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사가 진행 중이었다.
벌써 몇 명이 용의 선상에 올라왔지만…… 아마 범인이 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파트장인 황동휘 대리는 이미 모든 걸 던지고 튀었고. 무엇보다…….
「협회에서 발생한 연이은 사건 사고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가운데, 전국 각지의 헌터 사이에서 의문의 사고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부산의 함제원 기자 만나보시죠.」
「어제 새벽 3시경. 광안대교를 지나던 고 모 씨 앞에서 탱크로리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사고로 인해 피해자는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경찰은 폭발 경위 조사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헌터들의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한 것도 이번이 서른 번째로…….」
TV에서 기자의 격양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길드, 지부, 프리랜서.
소속을 가리지 않고 전국 각지의 헌터들이 의문의 사고를 당하거나 실종되기 시작했다.
언뜻 불행한 사고로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 수가 30명을 넘어서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간 숨어 있던 인원을 PB 코퍼레이션에서 물갈이 중이란 걸 말이다.
그거 말곤 설명할 수가 없다.
‘협박한 게 먹히긴 했나 보네…….’
그렇다고 설마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꼬리를 자를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움직여도 의미가 없다. 이미 실체가 사라져버렸으니까.
에휴.
답답한 심정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있었다.
어쨌든 PB 코퍼레이션이 최소한 한국에서는 손을 뗐다는 거다.
물론 이걸 그대로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아직 미지수겠지만.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인범 전 협회장이 학을 떼며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행정본부가 테러를 당한 것도 모자라 작전 본부장이 습격을 당하고, 전국 각지에선 헌터들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그러게 말입니다.”
“오죽하면 협회에서 잘린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니까.”
살다 살다 별일이 다 있다고 협회장은 중얼거렸다.
협회장에게 적용된 횡령 혐의는 결국 유죄판결이 떨어졌다.
다만 특정 인물과의 유착 관계나 사익을 추구한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 정상 참작되어, 결과적으로는 벌금형에 그쳤다.
“본부나 지부나 당분간은 제대로 굴러가긴 힘들 것 같구만.”
“힘든 정도가 아니라 오늘내일하겠죠.”
“그러니까 말이다. 상황이 이런데 이두식 고놈은 협회장 자리를 받아들이질 않나…….”
“그랬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니잖습니까.”
“누가 아니래나. 협회가 내려앉게 생겼으니 책임지고 독박 써줄 사람이 필요한 게 눈에 뻔히 보이는구만. 이사회가 선심 쓰는 척 떠넘기려고 한 것 같은데…….”
“이사님이 그걸 모를 리 없겠죠.”
“쯧, 그러니까. 알고도 나선 게야. 하여간 철없는 놈이라니까.”
“뭐, 이사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믿는 거랑 잘하는 거랑은 또 다르지.”
협회장은 연신 불안한 눈치였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협회가 위태로우면 정부든 기업이든, 온갖 것들이 이때다 싶어서 움직일 거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자칫하다간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까지 홀라당 뺏길 수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협회장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뜻을 곧바로 알아채곤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복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참 나.”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득보다 실이 많을 자리에 다시 기어들어 갈 이유는 없다.
어쨌든, 녀석들이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 이상 어느 정도 원했던 목적을 달성했다.
회귀 전과 다른 형태로 협회가 위태로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국제 협회가 간섭할 여지 자체가 사라졌으니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물론 그 과정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당장 이번 주 작전부터 문제겠구만. 인원 부족도 문제지만, 이를 지휘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야. 혹시 토벌만이라도 도와줄 생각은 없나?”
협회장은 날 다시 협회에 앉힐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참 포기를 모르는 양반이네.
“그렇지 않아도 이두식 이사님한테 연락 한 번 왔었습니다. 임시라도 좋으니 조금만 도와달라고.”
“그럼…….”
“죄송하지만, 제 코가 석 자인 걸 어떡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전 따로 해야 할 일도 있고요.”
“해외 지부 사업 말인가?”
“예. PB 코퍼레이션이 한국에서 철수했고, 꼬리도 잡았으니 더는 미룰 이유가 없죠.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좀 있습니다.”
“뭔가?”
“……자본이 없습니다.”
“…….”
뭘 그렇게 도끼눈으로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돈줄이었던 협회가 개차반인데 영향이 없을 리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어려워질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지원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회사 운영 문제였다.
본부가 어려워지면서 계약 대상인 지부들도 덩달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파견 계약을 해지, 또는 연장이 어려워졌다.
덕분에 매출은 전달 대비 마이너스 150%에 달했다.
사실 여기까진 어떻게 버틸 만했다.
진짜 어려워진 이유는 리젠 던전 사건 이후, 도심에 널린 몬스터 사체 처리를 우리 회사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원래라면 당연히 계약금을 받아야 하겠지만…… 협회가 내려앉은 마당에 지급할 돈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어려운 거 뻔히 아는데 소송을 걸기에도 좀 그렇고…….’
폭락한 매출에, 최후의 보루였던 계약금까지 미지급.
상황이 이러하니 당장 이번 달 직원들 월급조차 밀릴 수준이었다.
“그간 운영이 좋았잖나. 모아둔 여유 자본은 없나.”
“작은 회사에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버는 대로 인원이랑 장비에 썼죠. 장비 유지 및 수리비에 잔업 수당, 야근 수당, 특별 수당, 성과금, 파견 출장비, 유류비 등등 이것저것 떼주고 나면 남는 게 없습니다.”
“…….”
“무엇보다 협회 자금줄도 막혔으니… 상황이 좀 어렵습니다.”
그제야 협회장도 상황이 심각한 걸 받아들이는 듯했다.
“기업 투자라도 받아보지 그러나. 자네 네임밸류면 뭐든 안 붙겠어?”
“요즘 세상에 누가 이름만 보고 투자를 한답니까. 심지어 딴 것도 아니고 청소팀 파견 회사인데. 뭐, 일단은 인건비라도 좀 아껴봐야죠.”
“알고 있겠지? 처음부터 안 주는 것보다 줬다 뺏는 게 더 반발이 심하다는 거.”
“제가 왕년엔 마른오징어에서도 물을 뽑아냈습니다. 아랫놈들 쥐어짜서 돈 뽑아내는 거엔 도가 튼 몸입니다.”
욕은 좀 먹겠지만…… 어쩔 수 없다.
회사가 어려우면 다 같이 고생하는 거지.
나만 해도 특별한 수당 없이 지금까지 일만 하고 있구만.
아무튼, 앞으로 단단히 각오들 해야 할 거다.
악독하고 무지막지했던 왕년의 ‘김준우’로 돌아갈 때가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