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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해요…….”
“…….”
이아영 이사가 물었지만 나는 대답을 아꼈다.
아니,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여태까지 국제 협회의 압박이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최대한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협박, 습격, 혹은 전투.
지금껏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쉽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방법들이 먹혔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협박하면 무시하면 되고, 습격하면 쓸어버리면 됐으니까.
공개적으로 사건을 드러낼 수 없는 만큼, 그 녀석들이 쓸 수 있는 방식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나오면 답이 없는데…….’
이젠 그들도 인정한 셈이다.
더는 비밀리에 처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노선을 바꾼 거겠지.
지금까지의 상황이 어땠든, 누가 뭐래도 국제 협회는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다.
우리가 지닌 영향력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다.
그런 기구가 공식 석상에서 우리를 ‘카르텔’이라고 선언했다.
그 한마디로 우린 전 세계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물론 한국 협회와 정부가 나서서 반박했지만,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거다.
무력으로 나오면 무력으로 대응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정치적으로 나온다면…….
우리로선 방법이 없다.
“국내 토벌 조직들의 반발이 어마어마해요. 다들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난리 치고 있고… 한국 협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한 곳도 있고요.”
“하루아침에 토벌 사업이 막혀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죠.”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잖아요! 사업은 둘째치고, 당장 출현 던전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이대로 두면 당장 다음 주부터 몬스터가 탈출하기 시작할 텐데…!”
“그걸 노린 겁니다.”
“……네?”
“일방적으로 한 나라의 토벌권을 막아버리면,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지금에야 토벌 사업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토벌은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위한 행위이다.
그러니 더 이상 토벌을 못 한다는 건, 단순히 사업적인 문제를 넘어 몬스터로부터 국가를 지킬 수단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대로라면 반년…… 아니, 한 달도 못 가서 한국은 무너져 내린다.
그걸 막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국제 협회에 토벌권을 넘겨주는 수밖엔 없습니다.”
“…….”
국제 협회 지부가 들어서고 국내 모든 토벌과 던전을 그들이 관리하게 될 것이다.
베트남에 있는 허브도, 중앙아프리카 지부들도, 그들이 납품해주는 부산물도, 불과 며칠 전에 완공된 이클립스도, 모조리 국제 협회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들 또한 바로 그걸 원한 거겠지.
한순간에 한국 협회를 포함한, 국내 모든 토벌 기업을 없애버릴 수 있을 테니까.
“정말 그 방법밖엔 없는 거예요?”
“협상의 여지가 없는 한 그렇습니다.”
“…….”
이아영 이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녀 또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납득했는지,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전화를 들었다.
이두식 협회장에게 결정된 사항을 전달해야 했다.
“예, 협회장님.”
「……방법을 찾았나?」
“뼈아프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엔 없군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내 토벌권을 비롯한 던전 관리 및 협회의 모든 권한, 국제 협회에 넘겨…….”
“잠깐만요!”
다짜고짜 내 말을 끊으며 사무실로 들이닥친 건, 다름 아닌 한유빈이었다.
“잠깐 제 말 좀 들어봐요.”
“뭡니까…?”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제가 미국 지부 소속이었을 때, 클로이 지원팀장한테 들은 게 있어요. 국제 협회는 늘 목적을 위해서만 행동한다고.”
“……?”
“처음엔 그냥 전 세계 시민들의 안전만을 생각한다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카르텔로 몰아가면서까지 토벌권을 빼앗으려는 걸 보면 절대 그런 목적은 아니겠죠. 아마 뭔가 다른…….”
한유빈이 애써 추측을 내놓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리 도움이 되는 이야긴 아니었다.
결국, 국제 협회에 대해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니까.
하긴, 그녀는 아직 그동안 나와 국제 협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니까.
“유빈 씨한테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우린 여태까지 국제 협회를 계속 방해해왔습니다. 지금 이건 지금까지의 행동에 대한 보복인 거지,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뇨. 생각해보니까 이상하긴 해요.”
그때, 내 말을 끊은 건 이아영 이사였다.
한유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우리한테 보복하는 게 목적이었으면, 카르텔로 규정하자마자 관용 없이 무력을 쓰려고 했겠죠. 굳이 우리가 선택하도록 유예를 둘 이유가 없지 않아요?”
“……그럼 국제 협회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겁니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죠. 가령,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을 온전하게 손에 넣어야 한다거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그럴 만한 게…….”
“…….”
그 순간, 동시에 같은 게 머릿속에 떠오른 듯했다.
“설마…….”
“이클립스…?”
우리가 뱅크 아이템을 추가로 확보했다는 것이 그쪽 귀에 들어간 건가.
‘협회에 보고조차 거짓으로 했는데, 대체 어떻게 그놈들이 알아차린 거지…….’
아니, 일단 그건 제쳐두고, 만약 정말로 뱅크 아이템을 회수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
“아직……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을 수도 있겠군요.”
“……네.”
우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뭐, 뭐…?!”
서울 기획본부, 협회장실.
이두식 이사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게 이능석이었다고?! 근데 왜 나한테는 그냥 부산물이라고 보고한 거야?!”
“우리 선에서 정보를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뭐… 결과적으론 무용지물이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는…….”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쨌든 그쪽 귀에 들어갔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끄응…….”
그가 앓는 소리를 내길 잠시.
“근데 대체 어떻게 그쪽 귀에 들어간 거지? 저번에 자네 말로는 한국 파트는 해체됐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아직도 협회에 스파이가…….”
“그건 아닐 겁니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아영 이사에게 대신 설명을 부탁했다.
“뱅크 아이템은 활성화될 때마다 어마어마한 이능파를 방출해요.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요. 국제 협회에서 저번 사고 때 발생한 이능파를 감지했다면, 충분히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걸 알고 있었으면 더 철저하게 감췄어야지!”
“결과론적인 이야기잖아요. 들켰으니까 이유를 찾은 거지, 그러지 않았으면 우리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이두식 협회장이 머리를 짚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아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정말 그들이 원하는 게 뱅크 아이템이라면, 저희도 선택지가 늘어난 셈이…….”
“야, 야, 너 설마…….”
“시간석이랑 이능석, 넘겨줍시다.”
“…….”
물론 국제 토벌법상, 뱅크 아이템은 협회 간 양도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가 제 손으로 넘겨주겠다는데 국제 협회가 마다할 리도 없을 거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들키지만 않는다면 건네줄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다.
물론 그들이 왜 이토록 뱅크 아이템에 집착하는지는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상황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어차피 이대론 국제 협회에 저희가 쌓아온 모든 걸 넘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뱅크 아이템만 넘겨주고 토벌권이라도 지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협회장님…!”
“조용히 해 봐. 생각 중이니까.”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사실 그 또한 이미 마음속에선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의 성격상, 뱅크 아이템 두 개와 국가의 안전은 비교해볼 것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이유는…….
‘뱅크 아이템을 넘겨준 이후가 불안한 거겠지.’
모은 뱅크 아이템으로 국제 협회가 뭔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할 거다.
마음은 이해한다만, 지금 상황에 고민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쨌든 우리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으니까.
“국제 협회에는 내가 연락하면 되겠나.”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이두식 협회장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넘겨주자. 뱅크 아이템.”
“알겠습니다.”
“하, 시벌…….”
불안감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저번 중앙아프리카 사업, 김준우 대표가 진행한 거 맞죠?”
한별 종합 상사는 국제 협회의 믿을 수 없는 발표에 긴급하게 이사회를 소집했다.
하성일 사장 또한 그 자리에 참석해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청소부 출신이 하는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잖아!”
“지금 카르마 코퍼레이션 때문에 몇 개 기업이 망하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사장님, 더 늦기 전에 손절해야 합니다.”
이사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하성일 사장은 머리를 짚었다.
국제 협회의 발표 직후, 현 상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뉴스를 비롯한 모든 매체가 보도를 이어갔고, 인터넷은 폭발 직전이었으며 정부는 여전히 갈팡질팡했다.
전국 토벌 기업들의 주가가 고작 30분 만에 어마어마하게 폭락했다.
‘어떻게 한순간에 이런 일이…….’
하성일 사장은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공식 입장은 없지만, 아마 협회를 포함한 모든 토벌 조직들이 조만간 사업을 처분할 것이다.
당연하겠지. 이제 한국에선 토벌이 불가능해졌는데.
물론 국내 부산물 유통 사업을 하고 있는 한별 상사 또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거야 수많은 사업 중 하나일 뿐.
타격은 입겠지만 가볍게 손 놓고 다른 사업에 집중하면 된다.
하지만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아니다.
그들은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은 거나 다름이 없다.
하성일 사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한국 협회와 정부가 국제 사회에 계속해서 이의제기하고 있습니다. 카르텔로 규정된 건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처사라고 말이죠. 무엇보다 김 대표님이 국제 협회에 지속적인 테러를 가했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말이고요.”
“근거가 없다뇨! 그럼 설마 국제 협회가 근거도 없이 공식 석상에서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네.”
하성일 사장의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겁니다.”
“…….”
“…….”
김준우 대표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아프리카 지부를 통합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제3자를 이용하여 자작 테러를 벌이려 했다고.
만약 김준우 대표가 그걸 막지 않았다면 훨씬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물론 그 상황을 하성일 사장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다. 그 또한 김 대표에게 전해 들었을 뿐.
하지만 같은 시기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그 직후, 그의 형이 익명의 해외 투자자와 손을 잡고 벌인 암거래 사업.
그 두 가지만 놓고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누구 말이 사실인지 정도는.
‘그렇다고 지난 일을 이사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줄 수도 없고…….’
설명해준다고 해도 믿어줄 리도 없다.
이미 그들은 어떻게든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동맹을 끊고, 피해를 최소화할 생각뿐일 테니까.
이렇게 되면 밀고 나갈 수도 없다.
무엇보다 김준우는 현재 전국 토벌 기업에 공공의 적이 됐다.
본인 혼자 그를 믿는다고 해도, 본인 외의 모든 사람이 김준우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그 또한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럼 뭐…… 나도 방법이 없지.’
이내 하성일 사장이 피식 실소를 뱉었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관계를 끊는 게 당연히 옳은 일이겠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 사장님!”
“지금 정에 연연하실 때가…!”
“그러니 전 이제부터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거기에 회사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하성일 사장이 미소와 함께 결심을 내비쳤다.
“역시… 전 애초에 사장 재목이 아니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