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천재 헌터의 슬기로운 청소생활-168화 (168/366)

168

168

“하아…….”

일본에서 돌아온 지 고작 3일째.

굵직한 걸 하나 해결했으니 심적으로 여유로울 만도 한데…….

한숨이 절로 길게 나온다.

일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아영 본부장이 언질을 주긴 했지만, 설마하니 고작 일주일 자리 비웠다고 이 정도로 밀려 있을 줄이야.

게다가 대부분 해외 사업 기획 검토나 이번 분기 옐로우 등급 이상 던전 토벌 기획 같은, 대충 넘길 수 없는 업무들뿐이다.

거기에 최근 일본 지부의 운영 책임 권한을 위임받은 것 때문에 관련 내용으로 기자회견 준비까지 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아영, 하성일 본부장이 아직까지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은 탓에 그들에게 넘어가야 할 업무까지 죄다 내게 오고 있다.

‘설마 이래서 일부러 일본 지부에 남겠다고 한 건 아니겠지…?’

묘한 배신감에 눈썹이 꿈틀거리기도 잠시.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쯧, 차라리 청소만 할 때가 좋았어…….’

몸은 힘들어도 청소에만 집중하면 됐었으니까.

반평생을 던전에서 보낸 내가 해본 적도 없는 서류 결재나 하고 있으니…… 머리가 아프다 못해 돌이 될 지경이다.

물론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단호하게 거절하겠지만.

‘하아, 어떻게… 해도 해도 끝이 없냐.’

답답한 마음에 책상에 쌓인 서류를 괜히 뒤적거리던 그때였다.

눈길을 끄는 서류 하나를 발견했다.

‘사내 건의 사항…?’

급 흥미가 생겨 빼 들었다.

건의 사항은 나에게까지 올 리가 없는 서류였던 까닭이다.

원래 사내 건의 사항은 지원 본부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한다.

당연히 해당 업무 담당자는 이아영 본부장, 아니면 지원 본부 직원들이 맡는다.

어지간히 큰 건이 아니고서야 나에게까지는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녀가 자리에 없으니 돌고 돌다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어디 보자…….’

서류를 펼쳐보니 청소팀에서 올라온 건의 사항이었다.

천천히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시험 기간엔 뉴스마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고 했던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든 내용을 검토한 후 서류를 덮으며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이런 일이 있었군.

뭐, 이쪽으로 신경을 못 쓴 지 꽤 됐으니…….

물론 내가 직접 처리할 만한 내용은 단연 아니다. 그냥 지원 본부에 넘겨버려도 그만이긴 한데, 그럼에도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끝에.

‘기분 전환 좀 하고 올까.’

그래, 직원들의 고충을 직접 덜어주는 것도 대표의 의무가 아닌가.

무릇 참된 리더라면 이런 작은 부분까지 돌볼 줄 알아야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다.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 피우려는 건 절대 아니고.

***

“아니,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한답니까?!”

청소 2팀 소속, 김동혁이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2팀장, 배해갑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따져, 인마. 일단 건의 사항 올렸으니까 기다려보자고.”

“그거 위에서 들어주긴 해요? 요즘 뭐 일본 지부다 뭐다 해서 해외 쪽으로만 신경 팔려있는데?”

“야 인마, 언제 안 들어준 적 있냐. 최소한 담당자라도 내려보내 주겠지.”

“하아, 그게 언젠 줄 알고 기다립니까.”

김동혁이 못마땅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이자, 배해갑 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팀장에게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게 좋게 보일 리는 없었지만, 이번 일로 팀원들이 무척 고생하고 있는 걸 다 알고 있는 마당에 면박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요즘 들어 이토록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유는, 다름 아닌 임시 보관소 때문이었다.

사체 임시 보관소.

청소팀이 작업을 끝낸 사체를 잠시 보관해두기 위해 도심 곳곳에 설치한 기관이다.

몬스터 타입과 이름, 그리고 특이 사항을 적어 놓고 사체를 분류해 놓으면, 매일 밤 담당 운반 업체가 그것을 수거해 인근 부산물 처리 시설에 조달한다.

물론 작업과 동시에 운반이 가능하다면 굳이 사체를 보관할 필요가 없겠지만, 개별 운반하면 인적, 물적으로 손해가 커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과거 한국 협회에서부터 써오던 방식이었고, 협회와 합병한 카르마 코퍼레이션 또한 같은 방식을 고수해오고 있다.

그런데 최근, 엄청난 부자 동네로 유명한 지역에 있는 19구역 임시 보관소에 대해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악취와 정서적 문제로 임시 보관소 폐쇄를 요청한 것이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요청이었다.

당연히 시민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임시 보관소는 무조건 지하에 설치했고, 악취나 가스 누출과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으니까.

처음엔 대화로 잘 풀어보려 했지만, 워낙에 강경히 반발하고 나선 탓에 결국 19구역 임시 보관소는 폐쇄됐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해당 구역의 보관소가 사라졌으니, 어쩔 수 없이 사체를 다른 구역의 보관소로 옮겨야 했다.

기존에는 보관소에서 밤마다 한 번 수거를 해갔으니 눈에 잘 띄지 않았겠지만.

이젠 낮이고 밤이고, 작업 때마다 사체를 옮겨야 했으니 그만큼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또다시 컴플레인.

아이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학교, 아파트 근방에선 사체 운반을 규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우리가 뭐 동네방네 사체 자랑이라도 했답니까?! 안 보이게 비닐도 잘 씌우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는 건 진짜…!”

“그게 진짜 애들 때문이겠냐. 그냥 본인들 생활 구역에 몬스터 사체가 돌아다니는 게 싫은 거지.”

배해갑 팀장이 혀를 찼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해당 지역에서 작업을 마치면 다른 보관소까지 최대한 먼 거리로 돌아가야 했다.

사실 거기까진 그저 귀찮다 뿐이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조금 불편한 건 감수하려고 했다.

몬스터 사체를 동네에서 완전히 몰아냈다는 소식이 다른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기 전까진.

덕분에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보관소 폐쇄 요청이 쏟아지고 있는 판국이다.

청소 1팀장인 한상혁과 청소과장 문소연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꽤나 노력하고 있는 듯했지만,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잘 안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참다못해 배해갑 팀장이 나서서 사내 건의 사항을 올린 상황.

물론 상부에서 이런 자잘한 일까지 신경 써주리라곤 장담할 수 없지만.

‘쯧, 하여간 이기적인 놈들…….’

배해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에 데면데면 서 있던 젊은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범진이, 너한텐 미안하게 됐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들어오자마자 고생만 하네.”

“아, 아닙니다. 저보다 선배님들이 더 고생이시죠. 저는 괜찮습니다.”

청소 2팀의 신입, 우범진 사원이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좀 편해지네. 클클.”

“팀장님도 참… 그냥 하는 소리잖아요. 그럼 새파랗게 젊은 신입이 팀장한테 힘들다고 하겠어요?”

김동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거 솔직히 우리 선에서 해결할 문제도 아닌데 대체 윗분들은 뭘 하는 건지…….”

“에휴, 높으신 분들이 이런 거 신경이나 쓰겠냐. 토벌이나 해외 사업 같은 중요한 일만 하기에도 바쁠 텐데.”

“그래도 이건 아니잖습니까. 뭐, 우리 대표도 청소부 출신이었다면서요? 그럼 더 신경 써줘야지, 이게 뭐야.”

김동혁이 패기인지 객기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냥 제가 직접 대표님 만나보고 올까요? 똑 부러지게 한마디 할 수 있는데!”

“됐다, 새끼야. 담당자 오면 내가 잘 얘기해볼 테니까, 허튼소리 말고 구경이나 해.”

“믿습니다? 높은 분이라고 막 괜찮다, 할 만하다 그러시면 안 돼요?”

“이런 일에 높은 사람이 내려오겠냐? 끽해야 지원 본부 쪽 놈이겠지. 그리고 높은 분이면 뭐! 대표가 와도 단단히 일러줄 거니까 걱정을 하질 마!”

배해갑 팀장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그때, 사무실에 전화가 울렸다.

“범진아, 전화 좀 받아봐.”

“네, 네.”

팀장의 지시에 전화를 받은 우범진은 몇 번 네네, 하더니 금세 통화를 끝냈다.

“뭐야? 누구야?”

“어… 담당자분이라는데…… 지금 건의 사항 확인차 오신다고 하네요.”

“아 그래? 마침 잘됐네.”

배해갑 팀장은 팔을 걷어붙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똑똑―.

노크와 함께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임시 보관소 관련해서 문제가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팀장님 계십니까?”

“……어?”

“……아?”

배해갑 팀장과 김동혁 대리는 담당자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김준우.

그들이 소속된 회사의 최고 책임자.

농담처럼 말한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대표가, 진짜로 직접 행차한 것이다.

“아까 대표가 와도 단단히 일러준다고 하셨죠?”

“너 아까 직접 찾아가서 담판 짓고 온다고 하지 않았냐?”

“…….”

“…….”

둘은 서로 중얼거리다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닫았다.

빌어먹을.

진짜 대표가 내려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

“…….”

“…….”

청소 2팀 사무실.

자세한 사항을 듣기 위해 배해갑 팀장을 포함해 몇 명의 직원들과 대면하고 있는 상황.

그런데.

‘왜 아무도 말을 안 해…?’

어째 몇 분째 입을 여는 놈이 없다.

입에다 본드라도 발랐나?

사람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안 할 거면 건의 사항은 왜 올린 거야.

결국, 참다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건의하신 내용은 자세히 검토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임시 보관소 폐쇄 요청을 하고 있다고요?”

“예, 예, 예… 그렇습니다.”

“작업하는데, 꽤나 불편하시겠군요.”

“아, 아닙니다. 할 만합니다.”

“……?”

할 만하다고?

그러면 건의 사항은 왜 올렸어?

‘아니 그것보다… 전혀 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

이래 봬도 청소부 출신이다.

임시 보관소가 줄어들면 어떻게 되는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그… 예, 예. 괜찮습니다.”

배해갑 팀장이 어물쩍 대답하자, 옆에 있던 김동혁 대리가 곧바로 그를 쏘아본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대표라고 눈치 보지 마시고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분명히 애로사항이 있으니까 건의를 하신 거 아닙니까?‘

“…….”

“…….”

눈치 보지 말고 말하라는 데도 입을 열질 않는다.

징하다, 징해.

내가 뭐 잡아먹나?

대체 왜들 저러는…….

“임시 보관소 이용이 어려워지면서 몬스터 사체 보관 및 작업 일정 전체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

“……?!”

그 순간, 옆에서 잠자코 있던 젊은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낯익은 얼굴이 아닌 걸 보니 신입인 듯하다.

“야, 야…!”

“너, 너 인마…!”

그와 동시에 무슨 폭탄이라도 터트린 것처럼 질겁하는 팀장과 대리.

하지만 신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하루 평균 가능한 작업량이 기존 대비 40% 이상 감소할 수 있습니다. 임시 보관소 폐쇄뿐만 아니라, 사체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까지 제한시키고 있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때문에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상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

신입이 말을 마치자 옆에 앉은 두 남자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신입을 바라보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새끼, 간만에 쓸 만한 놈이 들어왔네?

“알겠습니다. 당분간 제가 청소팀과 동행하면서 직접 해결책을 모색해보겠습니다.”

“…예, 예?!”

“대, 대표님이 저희랑 같이 일을 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물론 세 분이 불편하지만 않다면요.”

“아, 아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야 영광이죠. 다만…….”

배 팀장은 손사래를 치더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동행하시기에 저희 일정이 조금 힘들 수도…….”

“하, 하하하. 걱정 마시죠.”

조금 힘들어?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나 땐 말이야, 닷새 연속으로 ‘운 나쁜 날’이어도 3시간 자고 주말에 출근하고 그랬어.

“저 이래 봬도 1년 전엔 별명이 귀신 들린 빗자루였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서류 작업이나 하는 건 이젠 지겨운걸.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