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173
“진짜 설마설마했는데! 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 농땡이를 펴요?!”
“…….”
대표이사실.
이아영 본부장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당장 다음 달까지 중동 쪽 지부 결산도 해야 하고, 일본 지부 사업 기획도 검토해야 하는데! 다 내팽개치고 박람회나 열고 있다니?! 제정신이에요, 진짜?!”
“그게 사실 이유가 다…….”
“네, 이유야 있겠죠! 그런데 당신이 왜 거기서 안내를 하고 있는 건데요?!”
“…….”
할 말이 없어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 어떻게 거기서 딱 걸리냐.
여기서 더 변명을 늘어놓다간 날이 새도록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에,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다음 달 귀국 예정 아니었습니까. 왜 벌써 오신 겁니까?”
“말 돌리는 거예요?”
“…….”
귀신이 따로 없네 진짜.
곧 화를 거두고, 이아영 본부장도 한발 물러나 입을 열었다.
“뭐, 생각보다 안정화가 빨랐어요. 하라무라 씨도 예상보다 잘해주고 있고요. 급한 건 일단 다 처리했고, 나머진 성일 씨가 하겠다고 해서 저 먼저 온 거예요. 뭐, 불안하기도 했고…….”
또 한 번 나를 흘긴다.
그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물었다.
“국제 협회 쪽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예?”
“없었다고요. 매각 제안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그건…….”
“좀 이상하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쇼이치 지부장을 속여서 일본 지부를 넘겨받았다는 걸 그쪽이 모를 리도 없고. 이전 같았으면 무력을 쓰든 아니면 수작을 부리든 다시 회수하려고 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아무 반응도 없어요.”
“흐음…….”
확실히 그녀 말대로다.
이미 우리와 국제 협회 본부는 얽힐 대로 얽히지 않았던가.
전부는 아니지만, 서로가 어떤 민낯을 가졌는지 얼추 알고 있고.
심지어 무력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벌써 몇 번이고 부딪쳤다.
왜 이제 와서 반응이 없는 걸까.
일본 지부라면 거액을 들여서라도, 아니 또다시 무력 충돌을 강행해서라도 다시 회수할 만한 가치가 있을 텐데.
나는 잠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뭐, 귀찮았을 수도 있죠.”
“국제 협회가요?”
“그동안 우리와 충돌한 게 한두 번이었습니까. 결과가 다 좋았던 것도 아닌데, 또 우리를 건드리기엔 본인들이 더 피곤했겠죠.”
“그런 거면 다행이고요.”
“뭐, 아니면 이제 우리를 신경 쓸 이유가 없어졌을 수도 있겠죠.”
지나가듯 한 이야기지만 이아영 본부장의 표정이 퍽 굳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건 절대 좋은 징후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그편이 더 신빙성이 있다.
국제 협회의 목적은 단순히 전 세계에 지부를 세우는 게 아니라, 뱅크 아이템을 모으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짓지 않았던가.
저번 일로 모든 뱅크 아이템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다는 걸 수도 있다.
뭐, 만약 정말 그런 이유라면…….
‘이미 목표를 이뤘다는 소리겠지.’
그게 뭔지는 몰라도…… 느낌이 좋진 않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들이 뱅크 아이템을 전부 가지고 있는 건 아무래도 불안하군요.”
“동감이에요.”
“되도록 빨리 거래를 진행해야겠습니다.”
“……무슨 거래요?”
“저번에 노아와 했던 거래 말입니다.”
여동생 사건에 대해 알려줄 테니, 우리가 넘긴 뱅크 아이템을 다시 넘기라는 거래였다.
잠시 미뤘지만, 지금이라도 진행한다면 최소한 이능석과 시간석은 다시 회수할 수 있다.
뭐, 노아가 정말로 가져올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놈이라면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무엇보다 전생에서 여동생 일 때문에 국제 협회 본부를 상대로 전쟁까지 벌인 놈이지 않은가.
각오로만 따지면 사무총장을 죽여서라도 가져올 것이다.
내 쪽에서 주기로 한 정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말이지.
“그런고로, 우리 쪽에서도 슬슬 본격적인 조사를 해봐야겠군요.”
“……네?”
“미국 지부에 연락해서 미팅 날짜 좀 잡아주세요. 직접 가서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으니.”
“…….”
의문투성이의 사건.
여동생이 투입됐던 던전에서 분명 뭔가가 발견되었고, 국제 협회 본부는 그것을 찾으려 했다.
그것을 결과적으로 얻었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그날 이후로 노아의 여동생은 사망하고 함께 작업에 투입됐던 동료들 또한 모두 자취를 감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국제 협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그 던전에서 대체 무엇을 발견했던 건지.
모든 걸 알아내기 위해선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겠지.
“또 농땡이 피우려고요?”
“…….”
“가더라도 일은 다 하고 가세요.”
“…….”
하, 누가 보면 맨날 도망치는 줄 알겠네.
난 의자에 걸어둔 외투에 슬그머니 손을 가져다 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아영 본부장.”
“왜요?”
“저 없는 동안 수고 좀 해주시죠.”
“아, 인간아!!”
귀청이 떨어질 듯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
“정말 괜찮은 거야?”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사무총장실.
에마 대표가 웨슬리 사무총장을 바라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
“일본 지부 말이야. 김준우 그놈한테 눈 뜨고 코 베인 셈이잖아. 우리한테도 꽤 요충지였는데, 이렇게 내버려둬도 괜찮은 거냐고.”
“…….”
웨슬리 사무총장은 대답을 아꼈다.
에마 대표는 그 모호한 반응이 퍽 답답한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우리 애들 보내서 싹 쓸어버리고 다시 회수하는 게…….”
“그럴 필요 없어.”
“뭐?”
“그럴 필요 없다고. 이젠 딱히 상관없어졌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에마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웨슬리 사무총장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반능석, 차원석…… 그리고 한국에 있던 이능석이랑 시간석까지. 이제 모두 우리 손에 들어왔잖아.”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에마 대표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뭐, 애초에 그게 웨슬리의 목표였으니까.
하지만 아는 것과 별개로 목적이 이해되진 않았다.
“아직도 세계 정복, 뭐 그런 거에 로망이 있는 거야?”
“음. 틀린 말은 아니네.”
“어이가 없네. 애도 아니고.”
대놓고 비웃자 웨슬리 사무총장은 고개를 저었다.
“세계 정복이라는 거 말이야. 단어가 좀 유치하긴 하지만, 실제로 지난 수천 년간 힘 좀 있다 하는 놈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시도해온 일이야.”
세계 정복.
단순히 꿈이라면 망상쯤으로 치부하겠지만.
현실성이 생기면 그보다 좋은 목표도 없다.
“처음 시도는 말 타고 돌아다니면서 각 나라에 깃발을 꽂는 방법이었지.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너무 비효율적이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거야. 무엇보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말짱 도루묵이고. 그러다 보니 점점 사람들도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한 거지.”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 하나만 손에 넣으면 되는 거야. 얼마나 쉽고 간단해. 실제로 몇천 년 전에는 종교를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했어. 몇백 년 전에는 탱크를 가진 이가, 몇십 년 전에는 석유를 가진 이가 차례로 물려받았지.”
“…….”
“그럼 지금은 뭘까?”
사실상 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에마 대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던전, 이능력 그리고 헌터. 이 세 가지를 손에 넣으면 전 세계를 손에 넣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뱅크 아이템에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 거야?”
“당연하지.”
던전과 이능력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단순히 토벌해야 할 대상을 떠나 누군가에겐 직업이고, 누군가에겐 사업 아이템이며 또 누군가에겐 국가 전체였다.
그런데 헌터들의 이능력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고, 또 원하는 대로 던전을 여닫을 수 있는 리모컨이 있다면?
그리고 드디어 그 리모컨을 손에 넣었다면?
“우린 이제 국제 사회를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어. 그깟 지부 몇 개?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해.”
“하…….”
에마 대표가 실소를 터트리길 한 차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뭐, 괜찮은 생각이네.”
“그렇지?”
“‘에덴’이 끝까지 발견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
에덴.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웨슬리 사무총장의 표정이 순간 싸늘해졌다.
에마 대표는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해본 소리야.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
여전히 웨슬리 사무총장은 심기가 굉장히 불편한 듯했다.
결국, 에마 대표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차원석은 던전을 컨트롤 하고, 이능석, 반능석은 이능력을 컨트롤 하는 용도라고 하면……, 시간석은… 그건 대체 용도가 뭐야?”
“브레이크.”
“……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에마 대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가가 그 리모컨을 쥐지 못하게 막는 용도라고.”
“그게 무슨……?”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웨슬리 사무총장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김준우 말이야…….”
이윽고 웨슬리 사무총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여기 사람이 아니야.”
***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아영 씨, 화 많이 났던데…….”
도착하자마자 김민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쏟아냈다.
“난 분명 일 다 마무리하고 오자고 했어요. 나중에 가서 우리 탓하지 마요.”
한유빈 또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옅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참 나, 다들 왜 이렇게 겁이 많습니까. 그 사람이 뭐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저희가 아니라 선생님을 잡아먹겠죠…….”
“…….”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이렇게 된 거 그냥 확 고백해버리죠? 내가 볼 땐 살 방법은 그거밖에 없는 거 같은데.”
“한 번만 더 개소리하면 해고입니다.”
“……나한테만 그래.”
단번에 정색하고 말하자 한유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있자니, 김민주가 슬쩍 물었다.
“그래서, 미국 지부에서 마중 나온다던 사람은 도착했대요?”
“글쎄, 시간 맞춰 나와 있겠다고 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분들이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를 보고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앞으로 여러분들을 안내할 미국 지부 소속 지원팀장, 클로이라고 합니다.”
“…….”
“…….”
대체 무슨 깡으로 우리 앞에 낯짝을 들이민 건가 싶었으니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노려보기만 했다.
그때, 한유빈이 넌지시 말했다.
“죽여 버릴까요?”
“……사람 안 보는 데서 하죠.”
여기선 좀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