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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뭡니까?”
갑작스레 내 사무실을 찾은 마이클 지부장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무어라 적힌 건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 서류였다.
“저에게 내려온 본부 발령 공문입니다. 조금 전에 본부 감사팀에서 찾아와선 작전 중지를 명령하더군요. 본부에 자리 하나 마련해주겠다고 하면서요.”
“역시 눈치챘나 보군요.”
마이클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공문의 상태가 이렇다는 건…….”
“거절했습니다.”
“본부 놈들이 거절했다고 조용히 돌아갔을 리는 없겠죠.”
“네. 아마 미국 지부는 조만간 국제 협회에서 강제 퇴출당할 겁니다.”
“……?”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서류 말고 하나가 더 있었습니다. 작전을 중지하지 않으면 강제 탈퇴시키겠다고 했으니…… 빠르면 내일 안으로 공문이 내려올 겁니다.”
“그건… 좀 곤란하게 됐군요. 국제 협회에서 쫓겨난다는 건 결국 토벌권도 빼앗긴다는 의미니…….”
“아직 유예 기간까지 3주가 남지 않았습니까. 그 안에 찾으면 그만이죠.”
“하아…….”
이 무슨 대책 없는 소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일단 작전 중지를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대책을 세우는 게 맞지 않나?
한 번 탈퇴 당하면 되돌릴 수도 없을뿐더러, 만약 에덴조차 찾지 못하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인데?
‘뭐, 선택권을 떠넘겼으니 결과는 어쩔 수 없는 거긴 한데…….’
아주 예상을 못 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다만, 듣자 하니 마이클 지부장은 절대 리스크를 지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째서 이런 위험한 선택을 한 걸까.
그런 생각에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압니다. 제 성격이랑 안 어울리는 짓이죠. 저도 처음입니다. 이렇게 대책 없이 결정을 내린 건.”
“그런데 대체 왜…?”
“그냥 묘하게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뭐라는 거야, 시발.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런 중요한 일을 그런 어쭙잖은 감정에 맡기는 건가.
“그런 고로 당신이 전에 했던 제의, 받아들이겠습니다.”
“…예?”
“카르마 코퍼레이션과의 인수합병 제의 말입니다.”
그의 입에서 결국 그 이야기가 나왔다.
미국 지부는 전 세계 협회 중 가장 몸집이 큰 지부이자, 매년 토벌 매출 탑을 찍는 곳이다.
흡수한다면 당연히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일이지만, 이걸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유예 기간이 끝나면 국제 협회 소속 외에는 토벌조차 불가능해질 테니까.
때문에 이제 와서 이도 저도 안 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뭐,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미국 지부를 본부에서 강제 탈퇴시킨다 해도, 3주 동안 계속 작전을 진행하는 걸 보고만 있을 리 없습니다.”
“그렇겠죠.”
“강제로 지부를 점거해서 통제 시스템을 빼앗거나, 작전 현장에 본부 인원을 투입해서 무력으로 토벌을 방해하거나…… 아니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할지도 모르죠.”
마이클 지부장의 표정이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렇기에 일단 작전 중지를 받아들이는 게 나았을 거란 것이다.
현재 우리에겐 무력 충돌을 준비할 만한 인력도, 시간도 없다.
대놓고 작전을 속행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것보단, 차라리 작전을 중지하는 척하면서 몰래 진행하는 게 며칠이라도 더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뭐… 이미 지난 일을 아쉬워해봤자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쉽진 않겠지만 준비를 해둬야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국제 협회를 무너뜨리려는 이상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한 발짝 빨리 찾아왔다.
물론 피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이도 저도 안 될 테니.
이제는 국제 협회와 정면으로 맞붙을 때가 됐다.
***
“마이클 지부장이 작전 중지 명령을 거부했어.”
국제 헌터 협회 본부.
에마 대표가 첫마디를 열자 웨슬리 사무총장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든 막으라고 했잖아.”
“너무 그렇게 보지 마. 그러게 내가 처음부터 지부장 자리에 마이클은 아니라고 했잖아? 그 인간 너무 고지식하다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의 날카로운 말투에도 에마 대표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뭐, 사실 마이클이 고지식하긴 해도 용감한 놈은 아니다. 리스크를 감당할 성격은 더더욱 아니고.
그런 놈이 대책도 없이 중지 명령을 거부할 리가 없다.
김준우가 옆에서 바람을 넣은 게 아닌 이상.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그놈 성격상 이렇게까지 대놓고 우리를 거스르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에마 대표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뭐? 작전 중지 명령을 거절했으니 이젠 어쩔 수 없다 이거야? 본부에서 탈퇴 당한다고 해도 유예 기간 동안엔 계속 토벌을 진행할 텐데?”
“날 뭐로 보는 거야.”
에마 대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 마이클이 뭘 선택하든 딱히 상관없었어. 그저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뭐…?”
“얌전히 작전을 중지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거부해도 큰 의미는 없어. 미국 지부가 우리 소속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우리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
그제야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렴풋이 이해한 듯했다.
현재 미국 지부는 국제 협회의 손에서 벗어났다.
얼핏 보면 국제 협회의 통제권에서 벗어났으니, 본부가 더는 관여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일전에 웨슬리가 전 세계에 통보했듯, 이제 독립협회를 비롯해서 국제 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모든 조직은 토벌권이 인정되지 않으니까.
미국 지부도 결국 비소속 조직이 되었으니, 엄밀히 따지면 미국에는 현재 공식적인 토벌 조직이 없는 셈이다.
오히려 본부가 손을 대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유예 기간이 아직 3주 남았지만.
어쨌든 토벌 주도권이 본부에 있는 이상, 거기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토를 달 순 없겠지.
“미국 땅에서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에마 대표가 어깨를 으쓱였다.
“감당할 수 있겠어? 자칫하면 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을 텐데.”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감당해야지. 네가 그랬잖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고.”
웨슬리 사무총장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나저나 PB 코퍼레이션에 그럴 인력은 있어? 노아도 연락 두절이라면서. 지금 팀원만으로는 뭘 하든 턱도 없지 않나?”
“인력 걱정을 왜 해. 전 세계 토벌 조직의 80%가 우리 소속이 됐는데.”
이내 에마 대표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세계 랭킹 2위부터 50위까지의 헌터 목록이었다.
“랭커들, 이럴 때 부려먹어야지.”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
“보고드립니다.”
미국 북부, 미네소타주에 위치한 한국 토벌대 임시 작전본부실.
북부 구역을 맡은 김민주 팀장에게 아레스 길드의 대표, 차석현이 정자세로 보고를 올렸다.
“오늘 자 북부 구역 출현 던전 총 510개, 당일 토벌 던전 총 510개, 미토벌 던전 0개입니다. 엘로우 등급 던전에서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크게 다치진 않아서 내일 토벌도 계속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부로 지원 나간 파견팀은 어떻게 됐어요?”
“잘 마무리했답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복귀할 겁니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어요. 차 대표님.”
“하하하! 수고는 팀장님이 하셨죠.”
형식적인 보고가 끝나자 차석현 길드장이 이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작전에 참여한 길드는 아레스뿐만이 아니다.
이아영 본부장이 급하게 파견 인원을 모집하던 당시, 김준우가 지휘하는 대규모 작전이라는 정보에 전국 길드가 너도나도 모여들었다.
그렇게 ‘김준우의 작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전국 총 22개 길드 1,5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자진해서 이번 작전에 참여했다.
카르마 코퍼레이션 소속 작전팀은 유예 기간 동안이라도 국내 토벌을 계속 진행해야 했기에, 파견할 수 있는 팀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민간 길드가 자발적으로 나서준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당연히 그간 선생님이 쌓아온 덕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
김민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김 대표님은 여전히 대단하십니다. 하다 하다 미국 전역 동시 토벌 작전을 맡으시다니!”
“그러게요. 이젠 조금 따라잡나 싶었는데… 그럴 때마다 한참을 더 앞서가시네요.”
김민주는 속상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 피곤해 죽겠네.”
때마침 청소와 부산물 처리를 담당하고 있는 한유빈이 작전본부실로 들어왔다.
한켠에 놓인 소파에 몸을 푹 던진다.
“다 끝났어요?”
“겨우겨우 했어요. 아… 이 짓거리를 며칠 더 할 생각하니까 치가 떨리네.”
한유빈이 표정을 구기며 구시렁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나저나 미국 지부, 국제 협회에서 탈퇴 당했다면서요?”
“그렇다고 하네요. 마이클 지부장님이 작전 중지 명령을 거절한 모양이에요. 그 덕에 마지못해 인수합병에도 동의했고요.”
“그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3주만 지나면 토벌 길 막히는 건 똑같은데.”
“아직 유예 기간이 있으니까 그동안에 에덴을 찾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한유빈이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그럼에도 김민주는 그녀를 다독였다.
“대표님한테서 무슨 말 없었어요?”
“있었죠. 중요한 게.”
“뭔데요?”
한유빈이 묻기 무섭게, 작전본부실로 몇 명의 인원이 추가로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이 시간에 소집이라니.”
“무슨 일 있습니까?”
다름 아닌, 아르테미스 길드의 유지우 대표를 비롯한 각 작전팀의 팀장들이 모두 소집된 것이다.
한유빈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꽤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팀장들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지휘 본부에서 급히 전달받은 사항이 있습니다.”
모두 모인 걸 확인하자, 김민주가 여태까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은 비상 방어 체제에 돌입해서…….”
이윽고 김민주가 본론을 꺼내던 그 순간.
콰과광―!!!
어디선가 날아든 폭격에 작전본부실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순식간에 커다란 화염과 검은 연기에 휩싸인 건물.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무너져 내린 잔해 앞으로 두 명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면 되나?”
“아마도?”
두 남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처참한 현장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데이빗 에반스와 솔트 에반스.
세계 랭킹 11위, 12위의 쌍둥이 헌터.
세계적인 길드, 로스트 길드를 이끌고 있는 이들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그러게.”
잿더미가 된 건물을 보며 임무 완수를 확인한 후, 그들이 김이 샌 표정으로 등을 돌리던 찰나였다.
“비상 방어 체제에 돌입해서, 습격해오는 이들을 모두 처리하라…….”
잔해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전달하셨습니다.”
“……후우.”
“흐흐, 토벌만 해도 벅찬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당연히 추가수당은 주겠죠?”
[고유 스킬 : 천수관음]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고유 스킬 : 스팀 펑크]
[고유 스킬 : 아르테미스]
무너져 내린 잔해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오는 이들.
검은 먼지를 뒤집어쓴 팀장들의 눈빛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