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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미스터 김.”
웨슬리 마틴.
현 국제 헌터 협회 사무총장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걸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차려입고 올 걸 그랬군요.”
“…괜찮습니다. 피차 우리가 격식을 차릴 사이도 아니고.”
“하하,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서로 어쭙잖은 격식을 차리던 그때, 웨슬리와 내 눈빛이 서로 교차했다.
나를 회귀하게 만든 장본인.
이 모든 일의 원흉.
드디어 그를 만났다는 고양감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여태껏 직원들이 죽어 나가도 본부에서 가만히 박혀만 계시던 분이 이번엔 어쩐 일이십니까?”
“그만큼 상황이 상황이라는 거겠죠. 솔직히… 랭커들까지 막아낼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너무 얕보신 거 아닙니까? 그동안의 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했을 텐데요.”
“글쎄요, 당신을 얕봤다기보단 랭커들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군요.”
웨슬리 사무총장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유이토를 향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세계 랭킹 2위였던 그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웨슬리 사무총장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아랫놈들에게 맡기기 힘들 것 같아서 말이죠.”
“이제 와서 큰일 났다 싶으니까, 허겁지겁 달려왔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하하하! 착각하지 마세요, 미스터 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
“더 이상 토벌을 진행하기 힘들다는 거,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글쎄요. 본부가 무너져도 팀원들만 있으면 어떻게든 진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팀원들도 계속 토벌을 진행할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나는 주변을 살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
갑작스러운 습격 때문에 발생한 수많은 부상자.
어떻게든 막아냈긴 했지만, 대부분이 무기를 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
그건… 김민주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깟 랭커 몇 명 상대로 이 꼴이라니…….’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억울하긴 하지만 웨슬리의 말이 맞다.
다들 이 상태라면 더 이상의 토벌은 힘들다.
“물론 당신 성격상 어떻게 해서든 또다시 에덴을 찾으려 하겠죠. 뭐, 그때마다 막는 거야 어렵진 않은데…… 우리 쪽 손해도 만만치 않아서 말이죠. 어쨌든 우리로서도 소모전은 피하고 싶군요.”
“막을 순 있지만, 수지가 맞지 않는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국제 협회가 그렇게 싫으면 무력으로라도 무너뜨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 당신도 그만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니, 아직 그 방법은 쓰고 싶지 않겠죠.”
맞는 말이다.
솔직히 사무총장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무력으로 국제 협회를 점거해서 강제로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실패했을 경우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느니, 차라리 조금 돌아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전쟁은 늘 최후의 보루였던 겁니다. 이기든 지든 피차 손해를 보는 건 마찬가지고. 특히나 요즘 같은 세상에선 이득을 보는 것보단 손해를 보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굳이 둘 다 손해를 볼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보아하니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내용 같은데.”
“협상하자 이겁니까? 당신이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내가 묻자, 웨슬리가 가만히 노려보며 말했다.
“앞으로 전 세계 토벌은 우리 국제 협회가 관리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들을 포함해, 모든 독립 토벌 기구들은 전부 길거리에 나앉게 되겠죠. 하지만… 당신은 그걸 막고 싶은 거죠?”
“……뭐?”
“그러려고 과거로 온 거 아닙니까? 국제 협회의 독주를 막고, 나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
그 순간, 내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뭐야, 이 새끼…….
내가 회귀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큰 충격에 잠시 이성이 마비된 그때, 웨슬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 놀랄 필요 없어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알 수 있는 건데.”
“…….”
“뭐, 대의를 위해 희생한 것엔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은데… 솔직히 누가 알아줍니까?”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의? 희생?
그건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미스터 김, 국제 협회로 들어오십시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드리죠.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보군요. 좋습니다. 그럼… 차기 사무총장 자리까지 약속드리죠.”
뭐라고?
“어떻습니까. 제 밑에서 몇 년만 버티면 전 세계가 당신의 손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 대신 더 이상 에덴을 찾지 마라…?”
“정확하게는, 저희를 방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애써 숨겼다.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시간석에 대해 조사를 해본 건가?
아니 그런 건 둘째치고…….
‘혹시 내가 본인을 막기 위해 회귀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제시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옳다구나 덥석 물 수는 없다.
“제가 그걸 받아들일 이유가 있습니까?”
“음?”
“여기서 내가 당신을 죽이면 다 해결되는 건데, 뭐하러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겠습니까.”
“하하하! 해보시든가요. 할 수 있으면.”
그가 두 팔을 벌리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여기서 저놈을 죽이는 거야 어렵지 않다.
여태까지 나에게 해온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렇게 수다나 떨 이유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다.
여기서 저 인간을 죽인다고 해도 내가 사무총장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아직까진 국제 협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지부를 포함해 전 세계 대다수가 아직은 국제 협회를 신뢰하고 있으니.
그런 상황에 사무총장이 죽어버리면 비공식 토벌 조직에 맞서다 순직한 영웅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우린 전 세계의 표적이 되겠지.
카르마 코퍼레이션을 제2의 국제 협회로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건 너무나 치명적이다.
웨슬리가 이제 와서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방법이 없나…….’
솔직히, 내가 먼저 에덴을 찾는다고 해도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내 유일한 목표인 사무총장 자리까지 약속했다.
그렇다면 굳이 더 싸울 필요가 있는가.
굳이 힘들게 카르마를 제2의 국제 협회로 만들 필요가 있는가.
굳이 멀리 돌아갈 이유가 있는가.
이제 와서 저놈한테 고개를 숙이는 건 뭣 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선 저놈 말대로 합의를 보는 게…….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옆에 있던 김민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선 불안도,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다시금 주변을 살폈다.
목숨이 오갔을 전투를 마치고 다들 피투성이가 된 채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팀원들.
그 모두가 숨죽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국제 협회에 들어가길 바라는 건가…….’
하긴, 그들과 척을 진다면 또다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날이 계속될 테니.
아무리 나를 따르고 있다고 해도, 결국 본인의 안전이 최우선이겠지.
그때,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유감이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다.
도저히 저 새끼 밑으로 들어갈 맘이 생기질 않는다.
그럴 바엔 차라리 돌아가지 않는 편이 낫지.
다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 상태로 계속 에덴을 찾는 건 확실히 무리다.
게다가 유예 기간이 지나면 공식적으로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해체된다.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가진 패가 너무도 없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그때였다.
지지직―.
때마침 내 통신기가 울렸다.
“예.”
다름 아닌, 이아영 본부장으로부터 온 통신이었다.
“……정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짧은 통신을 마친 후, 나는 다시 웨슬리 사무총장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협상은 결렬된 것 같군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김준우 앞에서 웨슬리 사무총장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어떤 놈이건,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손해 볼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국제 협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본인이 원하는 대로 토벌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
기존 팀 그대로, 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차기 사무총장 자리까지 내걸었다.
이 모든 게, 에덴을 찾지 않겠다는 조건 하나에 걸린 것들이다.
똑똑한 놈이라면 이걸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대의를 위해서 과거로 온 자라고 해도, 당장 눈앞에 놓인 권력을 외면할 리가 없으니까.
‘뭐, 다른 놈들은 거절하길 바라는 눈치인데…….’
웨슬리가 주변을 곁눈질로 살피며 생각했다.
하긴, 김준우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갈 놈들이니 그의 옆에서 어떤 고생을 하든 신경도 안 쓰겠지.
그저 김준우가 절대 고개 숙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헛된 희망이다.
김준우도 결국 인간인 이상, 무조건 협상을 받아들인다.
김준우만 손에 넣으면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할 수 있는 놈은 없다.
사무총장 자리?
그깟 이름뿐인 자리,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런 명함이 아니라, 누가 실질적으로 토벌권을 쥐고 있냐는 거니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김준우를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아무래도…… 협상은 결렬된 것 같군요.”
그가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
“뭐, 뭐…?”
“저희가 방금 원하는 걸 얻어서.”
“……!”
웨슬리 사무총장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설마…….
에덴을 찾은 건가?
‘시발, 왜 하필 지금…!’
웨슬리 사무총장의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아니,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타이밍 좋게 에덴을 찾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냥 패가 없는 놈의 블러핑일 수도 있다.
여기선 일단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하, 하하. 뭐 이 타이밍에 에덴이라도 찾은 겁니까? 우연치곤 기가 막히는군요.”
“뭐, 대답해드릴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그럼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으니 전 이만…….”
김준우가 일말의 아쉬운 기색조차 없이 등을 돌린다.
그 모습에 웨슬리 사무총장은 꽤나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거짓말이라고 계속 중얼거렸지만, 머릿속은 그렇지 못했다.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면?
만에 하나라도, 정말 에덴을 찾은 거라면?
‘빌어먹을…….’
심증만으로 판단하기엔 그 만에 하나에 걸려 있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던전과 이능력, 몬스터와 헌터.
50년간 이어져 온 이 원인 모를 현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스위치.
그 물건이 정말 저 새끼 손에 들어갔다면…….
국제 협회고 뭐고, 모든 게 사라진다.
‘시발, 어떻게 해야…….’
그가 이를 으득 씹었다.
그런 와중에도 김준우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초조함과 불안함에 판단력이 점점 흐려져만 갔다.
“……잠깐.”
결국, 웨슬리 사무총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