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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한복판.
국제 협회 본부 앞에서 한유빈은 여태껏 본 적 없는 진지한 태도로 나를 바라봤다.
“…대체 뭐가 궁금한 겁니까?”
내가 묻자 그녀는 이미 알고 있지 않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래에서 왔다는 거, 목적을 이루면 다시 돌아간다는 거……. 그 목적이라는 게 국제협회를 무너뜨리는 거라는 거. 전부.”
“……그게 왜 궁금합니까?”
“그래야 내가 그쪽을 계속 도와줄 수 있으니까.”
단호한 대답에 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실수다.
사무총장을 도발하려고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 말을 꺼내버렸다.
물론 내 정체가 절대 들켜선 안 될 비밀은 아니다.
애초에 스킬에도 타인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조건은 없었고.
그럼에도 내가 그동안 말을 하지 않은 건, 믿어줄 리 없다고 생각해서 굳이 꺼내지 않은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것, 히든 스킬에 대한 것.
지금 상황에선 그 어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도 그녀는 믿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상황에 이걸 말하는 게 도움이 되겠냐는 거겠지.
‘다른 문제가 차고 넘치는데 괜히 혼란만 줘서 좋을 게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큰 조직의 수장이 된 이상, 목적을 이루면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책임감 없이 도망친다며 더는 나를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지만…….’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가고 싶은데, 기세를 보니 어째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였다.
타이밍 좋게 내 핸드폰이 울렸다.
김민주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일단 대답을 미루고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지금 거의 다 파견 완료했어요. 도착하자마자 토벌 지원 들어갔는데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
「여긴 한시름 덜었으니, 선생님은 인원 보충만 신경 쓰시면 될 것 같아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김민주가 그걸 볼 리는 없었지만.
「아 참, 사무총장이랑은 어떻게 잘 얘기됐어요? 설마 거기까지 가서 싸운 건 아니죠?」
“그러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더라.”
「……네?」
“걱정 마. 얘기는 잘 됐으니까.”
과정이 어째 좀 찝찝하긴 하지만.
「국제협회가 정말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요?」
“……응.”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만약 뭔가 준비하고 있는 게 없었다면 내가 도발했을 때 분명히 맞받아쳤을 거야. 그렇지 않았다는 건 본인들도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거겠지.”
내가 그곳에서 사무총장을 도발한 이유는, 진짜 싸울 생각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동시에 확인을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사무총장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임에도 스스로 한 발짝 물러났지.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 새끼들 조만간 칼을 빼 들 거야.”
「……역시 그런가요.」
그들은 아직 드러나선 안 될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겠지. 이 이야기는 다른 본부장들이랑 이두식 이사님한테만 전달해놔.”
「…알았어요.」
그녀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생님은 바로 귀국하실 거예요?」
“모르겠어. 일단 조금 더 지켜보려고.”
「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나는 짧게 대답하곤 이내 전화를 끊었다.
“토벌 지원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군요.”
“…….”
한유빈에게 통화 내용을 전달했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에휴, 저 고집불통…….’
여전히 대답을 듣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겠다는 얼굴.
나는 머리를 긁적이던 끝에 결국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거짓말입니다.”
“…….”
“타임머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미래에서 옵니까? 뭐, 사무총장이 혼자 이것저것 상상을 한 모양인데… 그걸 진짜 믿으면 안 되죠.”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한유빈은 뭔가 석연치 않은 건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길 잠시.
“…알았어요. 그쪽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이내 피식, 실소를 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요. 아직 할 일 많이 남았잖아요.”
그리곤 나를 지나쳐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앞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
카르마 코퍼레이션, 본사.
이두식 이사의 집무실.
“그래서, 현재까지 파견은 문제없이 진행됐고, 토벌도 바로 착수한 거로 보고받았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국가도 없고요.”
“다행이군.”
하성일 본부장이 현황을 보고하자 이두식 이사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탈락자도 하루 100명꼴로 안정권에 들어섰습니다.”
“현재까지 빠져나간 인원은 얼마나 되나?”
“대략 20만 명 정도가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인원 보충 계획은?”
“현재 전 세계에 모집 공고를 냈습니다. 하루 만에 지원자가 10만 명을 돌파했고요. 물론 심사도 해야 하고, 등록에, 교육까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하성일 본부장이 서류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늦어도 반년 안에는 모두 메워질 거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음.”
이두식 이사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달 동안 파견 및 토벌 수당, 기타 발생하는 비용까지 대략 1,000억가량으로 추정됩니다. 다행히 할아버님… 아니, 한별 그룹의 하덕수 회장님께 받은 투자로 큰 손해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뭐,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입니다.”
“김준우 그놈이 본사로 쳐들어간 게 효과가 있었나 보군.”
“그러게 말입니다.”
두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두식 이사는 여전히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급한 불은 껐다고 해도 아직 찝찝한 것이 남아 있었다.
다름 아닌, 이번 사태가 정말 국제협회가 관여해서 고의로 탈락자를 발생시킨 거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였다.
물론 김준우가 전달한 내용 덕에 확실해지긴 했지만, 그 또한 이미 대충은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국제협회가 보여준 행동들.
그리고 그들의 목적과 현재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입지.
이 모두를 종합했을 때, 그들이 수많은 탈락자를 발생시킨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비공식 인력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목적은 당연히…….
‘최후의 수단…….’
이두식 이사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분명히 수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협회는 세계 최고의 토벌 기구였다.
그들은 이 사태의 최전선에서 각국의 협회들을 이끌며, 시민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동시에 각국 협회와 힘을 합쳐 이 끔찍한 사태를 해결해 나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위기와 고귀한 희생들이 있었다.
그 당시 영웅이라고 말해도 손색없는 그들의 희생 속에서 우리의 염원은 단 하나였다.
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사태가 하루빨리 종식되는 것.
그 중심에 국제협회가 있었다.
여태껏 그들의 실력과 저의를 의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 세계 시민들을 구원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사태는 무려 50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아직까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끝낼 수 있어도 끝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세계의 영웅이라 불리던 국제협회는 권력과 힘을 위한 기구로 전락해버렸다.
이두식 이사 또한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분명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설립된 기구인데…….’
기어이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을 상대로 칼을 갈고 있다니.
역시 설립 취지고 나발이고,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이렇게 되는 건가.
이두식 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 본부장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퍽 답답한 마음에 하성일 본부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네?”
“앞으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냐고?”
“…….”
하성일 본부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답을 정해놓은 후였다.
그저 말을 꺼내기 껄끄러웠을 뿐.
“애초에 카르마 코퍼레이션은 국제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뭐, 이젠 견제 수준이 아니라 집어삼킬 생각을 해야겠지만.”
“그렇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이내 그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저희도 맞서야죠.”
“…역시 그래야겠지?”
“물론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무조건 옳은 일일 겁니다. 다만, 그럴 수 없다는 건 이사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비수를 꽂는 그 말에 이두식 이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도 어쩔 수가 없죠.”
“토벌 조직들끼리 전쟁을 벌이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전쟁 후엔 석기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겠죠.”
“그런데도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사님, 저희는 약자입니다.”
하성일 본부장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국제협회는 이미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그 모습을 봤는데도 싸우지 않으면 우린 평생을 국제협회의 발밑에서 약자로 살아갈 겁니다.”
“…….”
“그럴 바엔 죽기 살기로 물어뜯기라도 해봐야죠.”
이두식 이사는 그 대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능력자도 아니면서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뱉길 한 차례.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현실적으로 보면 힘들겠지만요.”
“음?”
“국제협회에 무력으로 대항할 만큼 저희는 몸집이 크지 않습니다. 전 세계 협회를 우리 편으로 만든다면 모를까, 지금 인원으로는 사실상 결과는 보나마나겠죠.”
“흐음…….”
이두식 이사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맞는 말이다.
전쟁 대비고 나발이고, 애초에 우린 군사 병력으로 쓸 인원이 없다.
그렇다고 국제협회처럼 수십만 명에 달하는 비공식 인원을 모을 수도 없고…….
그렇게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그때.
“좋아.”
이내 이두식 이사는 마음을 굳힌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나다.”
카르마 코퍼레이션의 지원 본부장, 그의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이세요? 저한테 직접 연락을 다 하고.」
“저번에 반능석 가공한 거, 결과는 어땠냐?”
「……그건 갑자기 왜요?」
“아, 잔말 말고! 어땠어?”
「뭐, 성공적이었어요. 뱅크 아이템 가공은 처음이었지만,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이두식 이사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이내 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혹시… 이능석도 가공할 수 있겠냐?”
「네…?」
“이능석 말이야. 사물에 이능력을 부여한다는 뱅크 아이템.”
「그거야 저도 알죠! 그걸 어디다 쓰려고 물어보는 건데요?」
“국제협회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린 그놈들한테 맞설 여건이 전혀 안 되잖냐. 그래도 일단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
이아영 본부장의 대답이 잠시 끊겼다.
그녀 또한 이두식 이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어렴풋이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그렇게 말을 아낀 채 고민하길 잠시.
「뭐, 못할 거야 없긴 하죠.」
원했던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우리끼리 독단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에요. 윗선에 허가를 받아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이두식 이사는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뚝,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하성일 본부장을 돌아보며 손짓했다.
“자네도 따라와. 갈 데가 있으니까.”
“네, 네? 어딜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하성일 본부장이 당황하자, 이두식 이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청와대.”
그는 곧바로 외투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