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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
베를린 국제공항에 도착해 무사히 입국 심사를 통과한 직후.
“다행히 안 걸렸군요.”
옅은 한숨과 함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WDSO 소속이라는 것을 들켰으면 입국은 고사하고 바로 송환됐을 것이다.
물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세 명의 소속을 한별건설로 잠시 옮겨놓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별건설 소속으로 위장하여 독일협회에 접근한다.
이 작전을 위해 하성일 본부장이 꽤나 노력해주었다.
우리야 공습을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당연하다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우리의 입장일 뿐이다.
민간 기업인 한별건설은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섣불리 가담했다가 이미 체결된 사업마저 백지화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한별건설이 우리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성일 본부장은 한별건설의 사장… 그러니까, 본인의 누이에게 이번 일을 설득하느라 밤낮없이 매달렸다고 한다.
그 노고 덕에 정말이지 우린 어렵게 위장 소속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내 소속은 베를린의 교량 건설 사업 총괄을 위해 파견된 한별건설 해외사업부 독일 파트장.
클로이는 현장 검토를 맡은 독일 현지 담당자.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저 여자만 데려오면 됐지, 대체 난 왜 데려온 거예요?”
현지 법적 자문을 맡은 이아영 본부장이었다.
“출국할 때부터 계속 그 소립니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면 안 됩니까?”
“당신이 출국할 때부터 대답을 안 해주니까 그렇죠!”
이아영 본부장은 뒤따라오고 있는 클로이를 한 번 흘기고는, 내 옆에 바짝 붙은 채 대답했다.
뭐… 첫 만남부터 사이가 영 별로였던 이들이다.
이클립스 총 책임자 자리를 인수인계해준다곤 했어도 금방 사이가 좋아질 리는 없겠지.
나 또한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두 사람을 같이 데려온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우린 지금 위장 입국을 한 셈입니다. 최소한 협회를 설득하기 전까지는 한별건설 소속인 척해야 하는데. 그건 저보단 당신이 더 전문이지 않습니까.”
“그럼 저 여자는요? 역할이 뭔데요?”
“PB 코퍼레이션 출신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설득하는 것보다 전 국제협회 소속 출신이 말하는 게 더 신빙성이 있을 겁니다.”
“하아…….”
내 대답에 이아영 본부장이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 틈에 슬쩍 고개를 돌려 클로이를 흘겼다.
캐리어를 끌며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뭐 문제라기보단…….”
내 물음에 그녀가 답하길.
“유럽이잖아요. 국제협회가 늘 주시하고 있는 곳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 불안하긴 하네요.”
“…….”
“…….”
저런 말을 꽤 담담하게도 하는군.
“거봐요. 저 여자는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니까?”
이아영 본부장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쯤 국제협회가 쥐 잡듯 찾고 있을 텐데, 괜히 같이 있다가 우리까지 걸리면 설득이고 뭐고 완전 도루묵 아니에요?”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닙니까? 공습 준비로 바쁠 텐데 고작 탈주한 팀장 한 명 찾으려고 힘을 뺄까요?”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이아영 본부장이 계속해서 투덜대던 그때.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우리 둘이 속삭이고 있자니, 클로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둘이 사귀어요?”
“…….”
“…….”
뭐라는 거야, 시발.
“그건 또 뭔 개소리…….”
“네.”
“네?”
옆에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고, 나는 곧바로 이아영 본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는 뭐가 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다고. 오해받기 싫으니까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아,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이래야 저 여자가 당신한테 허튼수작 안 부리지.”
하지만 도리어 그녀가 나를 다그쳤다.
나는 얼척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허튼수작은 무슨 허튼수작입니까?”
“영화도 안 봤어요? 저 여자가 당신을 유혹해서 정보를 빼갈 수도 있잖아요.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으면, 애인이 있다고 포기한답니까?”
“…….”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는지 입을 앙다문다.
물론 그것도 오래가진 않았다.
“아무튼! 혹시 모르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게 둬요.”
“……하아.”
저게 대체 무슨 말인가.
괜히 상황만 더 귀찮게 만드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에 꽤나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둘이서 뭘 하든 관심 없으니까, 그만 좀 속닥거리시죠?”
클로이가 대놓고 쏘아댔다.
“……큼큼.”
“…….”
그 말에 나와 이아영 본부장은 괜히 멋쩍어 슬쩍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튼… 우린 지금 베를린 교량 사업을 위해 파견된 직원들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말이죠. 다들 포지션은 숙지하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기 위해 다시금 본론을 꺼냈다.
“현재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신분을 최대한 숨기고 독일협회에 접근, 협회장을 설득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요?”
“당연히 국제협회의 공습을 막는 거죠.”
이아영의 질문에 내가 즉답했다.
“그리고 다들 명심하셔야 할 게… 이번 일에 실패하면 한별건설에도 어마어마한 타격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렇겠죠.”
“듣자 하니 이번 건설 사업, 약 3천억 원대 계약이라더군요. 만약 우리가 위장 소속인 게 들통나면 한별건설의 사업도 송두리째 날아갈 겁니다.”
내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별건설은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이번 일을, 저희에 대한 신의 하나로 도와준 겁니다. 다들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임해주세요.”
“알았어요.”
“…….”
이아영 본부장은 언제나 그렇듯 곧바로 대답했지만, 클로이는 그냥 멀뚱멀뚱 서서 어깨만 으쓱였다.
……됐다.
저 인간한테 신의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본인 할 일에만 충실하면 그만이지.
“그럼 이제 어디 먼저 갈 거예요? 협회로 바로 갈 건 아니죠?”
“그러고 싶어도 못 하죠. 지금 우리는 협회와 접촉할 수 있는 명분이 전혀 없으니. 뭐, 일단은 교량 건설 사업을 체결한 곳으로 먼저 가봐야겠죠.”
내가 말하자 두 사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내 먼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 봅시다.”
국회의사당으로.
***
한국, 서울.
청소 3팀이 한 주 작업을 마치고 보고를 위해 본부를 찾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왜 이번엔 우리 안 데려간 걸까요……?”
문소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하루 종일 꿍해 있던 게 안 데려가서 삐진 거였어?”
“다른 데도 아니고 유럽이잖아요. 제 친구들은 다들 한 번씩은 갔다 왔다는데…….”
한상혁의 빈정거림에 문소연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려, 아쉬울 만도 하지. 그런 거로 놀리고 그러냐.”
“아니 뭐… 딱히 놀린 건 아닌데…….”
박근태 부장이 가세하자, 한상혁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듣자 하니 김준우도 엄청 힘들게 갔다던데?”
나름 위로해주려는 건지, 그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이야기해주었다.
“한별건설 소속으로 위장해서 사업 담당자인 척하고 겨우 들어갔다나 봐. WDSO 소속인 걸 들키면 바로 송환이라나 뭐라나.”
“그, 그래요…?”
“나도 누나한테 들은 거라 잘은 몰라. 근데 뭐…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아무래도 계속 위장하기도 힘들고 하니까 전문가들만 데려간 게 아닌가 싶은데.”
물론 확실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나름 꽤나 근거는 있는 말이었다.
문소연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나저나 한별건설이면… 그 하성일 본부장 누이분이 사장으로 있는 거기 말하는 건가?”
그때, 박근태 부장이 물었다.
“네. 하성일 본부장님이 엄청 설득했다던데요.”
“이야~ 대단하네. 아무리 동생 부탁이라고 해도 본인들 사업이 걸려있는 이상 쉽지 않았을 텐데. 원래 사이가 좋았나 보네.”
“그러니까 말입니다. 세상 남매는 다 우리 같은 줄 알았는데. 크크크.”
사이 좋은 남매라니.
만화에서나 보던 관계에 한상혁은 퍽 신기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하성일, 이 개새끼야!!”
한 여성이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본부 건물로 들이닥쳤다.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와 얼굴.
당장이라도 다 때려 부술 기세로 성큼성큼 들어온 그 여성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친놈이 우리 계약서를 몰래 들고 튀어?! 이게 얼마짜리 계약인지 알기나 해?! 하성일 이 새끼 어디 있어!! 빨리 나와!!”
한별건설 사장이자 하성일의 첫째 누이.
하미연이었다.
“하, 하 사장님…?”
“여, 여긴 어쩐 일로…….”
난데없는 거물의 등장에 본부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말렸지만…….
“다 필요 없으니까 하성일 불러와! 당장 내 앞으로 데려오라고!!”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
“…….”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소 3팀원들은.
“남매는 다 거기서 거긴가 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누구랄 것 없이 고개를 저었다.
***
[김 팀장님, 아무래도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제가 없어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주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
하성일 본부장에게서 온 문자 한 통.
아니, 유서 한 통.
‘대체 뭔 일이 있는 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내용에 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신경이 팔려있을 여유는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건설교통부의 루카스 장관과 대면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말씀드렸다시피 착공까지 2주 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토지도 검토해봐야 하고, 이것저것 허가를 받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 정도면 굉장히 빠른 겁니다. 더 걸려도 되니까 모든 변수를 차단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십시오. 빠른 것보다 안전한 게 베스트니까요.”
전형적인 원리원칙주의자의 대답.
루카스 장관은 듣던 대로 꽤나 고지식한 사람인 듯했다.
그런 이에게 우리의 소속을 들킨다면 설득은커녕 관용 없이 한국으로 쫓겨나겠지만, 지금 저 고지식함은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좀 있습니다.”
이내 내가 서류를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문제라뇨…?”
“지금 예정된 지역이 하펠강인데 저희 쪽에서 조사를 좀 해보니, 던전 출현 빈도가 꽤 높은 곳이더군요.”
“…그렇습니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그 또한 모르고 있었던 사실인 듯했다.
“건설에 못 해도 석 달은 걸릴 텐데… 그사이에 던전이 출현한다면 인부들은 물론 건설 자체가 위험해질 것입니다.”
“흠, 그건 확실히 큰일이군요.”
“그래서 말씀인데…….”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본론을 꺼냈다.
“혹시 독일협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을까요?”
“도, 독일협회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사 지역 반경 1km 내에 작전팀을 배치한다면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글쎄요…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부서 소관이라, 지정 토벌을 부탁하는 건 조금…….”
그는 일단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엇보다 독일협회는 외국 기업이나 조직을 꽤나 배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그렇게 되고 나선 더더욱 문을 닫은 상태라…….”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밀고 나갔다.
인부의 안전을 걸고 베팅을 한 이상, 원리원칙주의자에 고지식한 그가 이걸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내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한번 연락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김 파트장님께서 직접 하셔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못해 내 제안을 수락했다.
드디어 독일협회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나머진 협회장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공습을 대비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무실을 나서려던 그 순간.
“예, 루카스입니다.”
루카스 장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예, 예. 예……?”
그리고 이내,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별건설에서 아직 직원을 파견하지 않았다고요…?”
그 말이 들려오길 한 차례, 루카스 장관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
나는 상황이 X 됐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