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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WDSO 본부.
하성일 본부장의 집무실.
하미연 사장이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길 잠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옆에 있던 하성일 본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성일 본부장은 그야말로 대역죄인이 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하미연 사장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쯧, 이 미련 곰탱아. 이런 일이었으면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지. 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말했어.”
“……?”
하미연 사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하성일 본부장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다 듣지도 않고 계속 안 된다고만 했잖아.”
“…….”
그제야 하미연 사장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확실히 독일 건이 뭐 어떻고, WDSO 상황이 어떻고 들은 것 같긴 한데…….
“……난 또 뭐 쓸데없는 이야기하는 줄 알았지. 워낙 바쁘기도 했고.”
그녀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계약서를 훔쳐 가냐? 법무팀 금고에 있었을 텐데,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그냥 들어가서 누나가 가져오라고 했다고 하니까 주던데?”
“…….”
하미연 사장이 눈을 끔뻑이길 몇 차례, 뒤에 있던 비서를 향해 손짓했다.
“김 비서님, 법무팀 전원 오늘 안으로 시말서 작성하라고 전해줘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 직후.
“그래서…….”
이내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국제협회가 독일을 침공하는 거야?”
“우리 쪽 정보로는 그래.”
“흐음…….”
하미연 사장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뭐 더 도와줄 건 없어?”
“…도와주게?”
“모르면 몰랐지, 내 귀에도 들어온 이상 모른 척할 순 없잖아.”
“그래도… 누나 회사는 한별그룹 주력 사업인데, 할아버지가 알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참 나, 아직도 할아버님 성격 모르냐. 오히려 아직도 안 도와주고 뭐 하냐고 날뛰실걸.”
“……그렇긴 하네.”
하성일 본부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지금 상황으로선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고…….”
그리고 그때.
“하 본부장님!”
김민주 작전 본부장이 사무실로 갑작스럽게 들이닥쳤다.
“국제협회가 독일 국경을 넘어서 진격하고 있대요!”
“네…?”
“……!”
더 이상 상황을 지켜볼 여유도 없는 소식을 전해왔다.
“3시간 전에 국경을 넘은 거로 확인되는데,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이대로라면 이틀 안에 베를린까지 도달할 거예요!”
“기, 김 팀장님은요? 연락이 됩니까?!”
“아뇨. 아무래도 연행되면서 소지품을 압수당하신 것 같아요.”
“…….”
하성일 본부장이 표정을 구기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의 실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독일도 부랴부랴 대비를 시작하겠지만…… 역부족일 거예요. 그렇다고 허가도 없이 우리가 막무가내로 지원을 나갈 수도 없고…….”
“김 팀장님도 연락 두절이니…….”
“일단, 선생님이 어떻게든 해 주길 기다려 봐야 할까요?”
김민주가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하지만 하성일 본부장은 그마저도 해답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김준우라면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현 상황에선 김준우 팀장은 베를린에 고립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애초에 구류된 상태라면 현재 상황에 대해 알지 못할 수도 있고.
풀려나서 상황을 파악하고, 독일협회를 설득해서 지원을 보내는 데까지 이틀은 너무 짧다.
하다못해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만 있다면…….
“국제협회, 지금 어디까지 진격했는지 알 수 있나요?”
그때, 갑자기 하미연 사장이 김민주에게 물었다.
“저희 통제팀 말로는 슈투트가르트까지 도달했다고 해요.”
“슈투트가르트라…….”
그녀가 턱을 쓰다듬길 잠시,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 지부장님. 하미연입니다.”
“네네,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그쪽에 철거용 다이너마이트… 얼마나 있죠?”
어디론가 연락을 넣었다.
***
독일, 베를린.
유치장을 탈출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리의 눈에 들어온 건, 이미 아비규환이 된 도심의 모습이었다.
거리 전체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
수백 대의 차량으로 꽉 막힌 도로.
패닉에 빠진 채 가족을 찾고 있는 시민들.
“공습이… 시작됐군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다.
국제협회가 독일 국경을 넘은 게 틀림없다.
‘빌어먹을, 이렇게 빨리 개시할 줄이야…….’
아직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클로이 씨, 지금 국제협회 전력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한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클로이도 어느새 퍽 진지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큰 전투 없이 최단 거리로 진격한다면…… 이틀이면 도착할 거예요.”
“너무 빠른데…….”
“물론 독일 병력을 죄다 끌어모아서 최대한 막는다면 5일까지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으로선 한 곳으로 병력을 모으는 것 자체가 쉽지 않겠죠.”
“그럼 이틀 안에 독일협회를 설득해서 지원군을 파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절대 불가능하죠.”
“이러나저러나 진격을 막을 순 없다는 거군요.”
“당연하죠. 이능력자로 구성된 군대를 일반 병력이 어떻게 막겠어요.”
큰일이군.
“그럼 일단… 독단으로라도 본부에 지원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아영 본부장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아무런 허가도 안 났는데 우리 마음대로 지원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일단은 독일협회 소속 작전팀이라도 배치해야겠죠.”
“그 말은…….”
“독일협회로 갑시다.”
우린 곧바로 도시를 빠져나가는 인파들을 거슬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꽉 막힌 도로를 뚫으며 어렵게 도착한 협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밖과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아수라장이었다.
“저기요! 지금 협회장님 어디 계십니까?”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쳐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지금 비상인 거 안 보여?! 여기 있지 말고 당장 피난부터 해!”
“WDSO 서울 본부 소속 청소 3팀장, 김준우입니다. 지금 당장 협회장님을 만나 뵈어야 합니다!”
“WDSO…?”
소속을 밝히자, 그제야 직원이 나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무언가 고민하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길 잠시.
“따라와.”
곧바로 우리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도착한 후, 어느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이능력자를 끌고 오는데, 일반 병력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희도 작전팀 전선 배치 허가 내려 주셔야 합니다!”
중년 여성이 전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원칙은 무슨! 지금 전시 상황이라고! 쓸데없이 희생 치르지 말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런 시발!!”
쾅―!
무언가 이야기가 잘되지 않은 듯 전화기를 냅다 집어 던졌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듯 보였다.
그 상황에 우리를 데려온 직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아멜리 협회장님…….”
“뭐야? 네가 여긴 왜 올라왔어! 작전팀 대기시키라고 했잖아!”
“지,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 인간들은 또 뭐야?!”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았다.
“WDSO 서울 본부 소속, 김준우 팀장입니다.”
나는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소속을 밝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WDSO? WDSO가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입국조차 안 될 텐데?”
“뭐… 요령을 좀 부렸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당신들이 여긴 왜 있는 거야? 설마 당신들이 공습을…!”
“진정하십시오. 저희가 벌인 일이 아닙니다.”
한껏 흥분한 상태인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WDSO에 국제협회가 독일을 공습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상황을 알려드리고 싶었지만, 독일협회와 접촉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겁니다.”
“뭐…?”
그 말에 아멜리 협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WDSO가 그걸 무슨 수로 알았다는 건데?”
“그건…….”
그 질문에 내가 뒤로 시선을 돌렸고, 동시에 클로이가 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알려준 정보입니다. 전 국제협회 소속으로서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요.”
“…전 국제협회 소속?”
“네.”
“하!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아멜리 협회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
그렇게 답답한 얼굴로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길 잠시.
“그래서? 이미 공습은 시작됐는데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드디어 그녀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시다시피 일반 병력으로는 국제협회를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모든 작전팀을 가용하셔야…….”
“누가 그걸 몰라? 그런데 위에서 허가가 안 난다고! 이능력자는 전시 상황에서 전투 병력으로 배치할 수 없다는 법률을 어길 수 없다면서!”
이런 상황에서까지 규칙을 고수하는 건가.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고지식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나올 리는 없는데.
정말 규칙을 지키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아멜리 협회장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애초에 우리 쪽 작전팀은 수가 별로 없어! 저쪽은 확인된 병력만 6만 명인데 우리는 다 끌어모아도 2만 명도 안 된다고. 게다가 장비도 부족하고…!”
“걱정 마십시오, 부족한 인원과 장비는 저희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뭐…?”
나는 비로소 본론을 꺼내 들었다.
“WDSO 본부 소속의 작전팀을 파견해드리겠다는 소리입니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세계 최고 전력이라고 자부합니다. 분명히 공습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
아멜리 협회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허가가 안 날 거야.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지금 다른 국가와의 교류를 전면 중단한…….”
“그거야 정부의 입장이고요.”
“……뭐?”
“작전팀 파견 요청은 어디까지나 협회장님의 권한입니다. 정부 눈치 볼 필요 없이, 협회장님께서 허가만 해 주신다면 그만입니다.”
“하, 그랬다간 나중에 전범 재판에 불려갈 텐데?”
“그렇겠죠. 뭐, 그건 어디까지나 협회장님의 선택입니다.”
나는 협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독일을 지키고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아니면 무결하게 나라를 빼앗기겠습니까?”
“…….”
나를 바라보길 잠시.
“……확실하게 막을 수 있는 거야?”
그녀가 물었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