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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세는 크게 기울었다.
이아영 본부장과 클로이가 가공해준 반능석 덕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고, 남아 있는 병력 또한 이미 전의를 잃은 채였다.
WDSO 병력은 어느새 전투를 멈추고 검은 기류가 뒤섞인 구체를 천천히 포위했다.
공간이 해제되는 순간, 웨슬리를 공격하기 위해 미리 진을 쳐둔 것이다.
하지만.
“서, 선생님…?”
이윽고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나자 김민주는 원래의 계획을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그그그그그―.
마치 용암이 끓듯, 펄펄 새어 나오는 검은 기류.
그 기류에 잠식된 눈.
허공을 응시하는 초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
확실하다.
폭주 상태다.
“티, 팀장님 상태가…….”
“본부장님, 팀장님이 왜 이럽니까…?”
“뭔가 위험해 보이는데…….”
다른 WDSO 직원들 또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퍽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떨어져.”
김민주가 말했다.
“네, 네?”
“당장 떨어지라고! 가까이 가지 마!”
이미 김준우의 폭주를 한 번 경험해본 그녀로선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위험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재앙.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났다.
“…….”
폭주한 김준우를 정면에서 마주하자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잔존 병력, 전원 후퇴한다.”
그때였다.
김준우와 대치하고 있던 웨슬리 사무총장이 갑작스럽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적들은 등을 돌렸다.
김민주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후퇴한다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도망치는 건가?
아니면 이미 전세가 기울어서?
이토록 철저하게 준비한 공습을 포기하는 건 최악의 선택일 텐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고유 스킬 : 천수관음]
전쟁을 일으켜 놓고 저들끼리만 순순히 도망치게 내버려 둘 순 없다.
그리고 그것은.
“어딜 내빼려고?”
[고유 스킬 : 하이패닉 버서커]
한유빈 또한 같은 생각인 듯했다.
타앗―!
그렇게 두 명의 전사가 그들을 쫓으려던 그때.
“…정말 괜찮겠습니까?”
웨슬리 사무총장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걸’ 내버려 두고 우릴 쫓아도?”
“……!”
“……!”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김준우에게 향했다.
그는 여전히 공허한 시선으로 바닥을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를 내버려 두고 웨슬리를 쫓았다가, 그가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두 여성이 이를 으득 씹으며 딜레마에 빠져 있던 찰나.
“다음에 또 보죠.”
웨슬리 사무총장은 작별인사를 흘리며 등을 돌렸다.
두 여성은 멀어지는 국제협회 병력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한유빈이 분한 듯 중얼거렸다.
물론 김민주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폭주 상태를 되돌릴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스스로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무력으로 의식을 잠재우는 것.
하지만 현재로선 어느 쪽도 확실한 방법이 아니다.
애초에 평소 상태의 김준우조차 상대가 안 된다.
하물며 폭주 상태라면…… 그를 무력으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뭐, 뭐예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저 인간은 또 왜 저래?!”
그때, 이아영 본부장이 다급하게 현장으로 달려오며 상황을 물었다.
“웨슬리랑 전투 중에 폭주한 거 같아요.”
“막아야 하는데, 솔직히 좀 무섭네…….”
김민주와 한유빈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김준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누가 봐도 폭주 상태였지만, 어째선지 아까부터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 모습에서 일말의 희망을 본 듯, 김민주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저번처럼 자의로 이성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기다려볼까요?”
“그땐 던전 안이어서 그나마 괜찮았지만…….”
하지만 한유빈은 의견이 다른 듯했다.
그녀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도박을 하기엔 너무 위험해요.”
이곳은 고립된 던전이 아닌 도로 한복판이다.
현지 작전팀과 군인들을 비롯해서 WDSO의 모든 병력이 모여 있을 뿐만 아니라 베를린까지는 불과 3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자칫 그가 날뛰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김민주가 물었지만 한유빈은 대답을 아꼈다.
그녀 또한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던 그때.
“뭘 고민하고 있어요!”
이아영이 소리쳤다.
“병력 대기! 남은 반능석, 전부 장전하세요!”
그래.
반능석이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호에 맞춰서 일제히 사격하세요!”
“주, 죽으면 어떡합니까?”
“그런 거로 죽을 인간 아니니까 본인들 걱정이나 하세요!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요! 죽고 싶지 않으면.”
“……알겠습니다.”
“네, 네.”
이아영이 고개를 돌려 두 여성을 바라봤다.
“만약 반응이 있으면 민주 씨랑 유빈 씨가 나서서 최대한 움직임을 막아주세요.”
김민주와 한유빈이 동시에 끄덕였다.
그렇게 준비가 된 순간, 전원 김준우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사격 개시!”
두두두두두―!
수천 발의 총알이 일제히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미 하나 이상의 뱅크 아이템 효과를 받고 있습니다.]
[무효화됩니다.]
텅―!
텅텅텅텅텅―!!
검은 기류를 뚫지 못한 채 모조리 튕겨 나갔다.
“효, 효과가 없습니다!”
빌어먹을…!
반능석마저 통하지 않으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무력으로 막는 수밖에 없는 건가.
김민주가 검을 꾸욱 움켜잡았다.
옆에 있던 한유빈 또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그때.
쿵―!
그들 앞에 누군가 뚝 떨어졌다.
당황하기도 잠시.
“다, 당신…?”
“그쪽이 여길 어떻게 알고…?”
정체를 확인한 김민주와 한유빈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연락을 하도 안 받아서 말이지.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다름 아닌.
“설마하니 전쟁을 벌이고 있을 줄이야.”
현 세계 랭킹 1위.
노아 웨스턴우드였다.
“올 거면 좀 일찍 오지.”
“난 뭐 노는 줄 아나? 나름대로 바빴어. 무엇보다 김준우가 부탁한 일도 처리해야 했고.”
한유빈이 볼멘소리를 내자, 노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급히 보고해야 할 게 있어서 연락한 건데…… 설마 이런 상태일 줄이야.”
“보고라뇨?”
김민주의 물음에 노아의 표정이 퍽 진지해졌다.
이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에덴이 발견됐다.”
“……네, 네?”
“뭐, 뭐라고?!”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러시아 우랄산맥 근처에서 기준을 초과하는 이능파가 포착됐어. 일단 확인을 위해서 급하게 내 길드원들 파견했다. 아마 확실할 거야.”
“잠깐. 러시아라니?”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줄곧 잠자코 있던 클로이였다.
하지만 노아는 다른 것보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게 더 놀란 듯 보였다.
“네가 여기 왜 있지?”
“이직했어요. 자세한 건 알 거 없고. 그래서, 러시아에서 발견됐다는 게 사실이에요? 재출현에 오차가 있다고는 해도 지구 반대편에서 출현하는 경우는 못 들어봤는데?”
“낸들 알아? 난 그냥 정보를 입수한 것뿐이다.”
“진짜 에덴이 맞긴 한 거예요? 기준 초과 이능파는 몇몇 레드 던전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
“기준치에 3,000배에 달하는 이능파였어.”
“……!”
클로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약 그게 던전이라면 지구는 끝이라고 봐야지.”
“…….”
“문제는 그런 것보다…….”
노아가 말했다.
“이 정보가 국제협회 귀에도 들어갔다는 거다.”
“……!”
“……!”
이번엔 김민주와 한유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웨슬리 사무총장이 후퇴한 이유가…?”
김민주가 중얼거리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마주치겠지. 물론 꽤 괜찮은 놈들이 있지만, 내 길드만으로는 힘들어. 당장 찾으러 가야 하는데…….”
노아가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걸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순 없겠군.”
“어떻게 하려고요.”
“어떻게 하긴.”
노아가 미소를 지었다.
“제정신 차리게 해줘야지.”
[고유 스킬 : 아포칼립스]
그가 스킬을 쓰는 순간.
“아직 싸울 수 있는 놈들은 힘 좀 보태주던가.”
그곳에 있던 모두가 굳은 얼굴로 자세를 고쳐잡았다.
다시금 가다듬어진 전열.
“…….”
“…….”
모두의 얼굴은 긴장감이 역력했다.
구구구구―.
그 순간, 김준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대는 단 한 명뿐.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중압감이 맴돌았다.
콰직―.
김준우가 바닥에 널브러진 몬스터 사체를 밟았다.
“……?”
“……?”
어째선지 움직임을 멈추곤, 가만히 서서 자신의 발끝을 바라봤다.
***
얼마나 의식을 잃었을까.
[히든 스킬 : 업보]
머릿속에서 울리는 음성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암흑의 공간이었다.
아니, 눈을 뜬 게 아니라 의식 저편 어딘가인 듯한 기분이었다.
[스킬 해제 조건 : 국제 헌터 협회의 사무총장 달성]
[현재 직책 : 공식 국제 토벌 기구 WDSO 대한민국 기획본부 소속, 청소 3팀장]
[현재 스킬 해금률 : 100.0%]
[현재 클래스 : 절대군주]
[현재 비공식 랭크 : SSS]
[현재 비공식 랭킹 : 국내 1위, 세계 1위]
[제한 시간 : 2년 9개월 13일 9시간 34초]
이윽고 음성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중간보고를 하듯 천천히 진행 상황을 전달하길 잠시.
[현 시간 기준, 목표 달성 확률]
[0.0%]
‘……?’
굉장히 당황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대, 대체 왜…?’
이해할 수가 없어 가만히 눈을 끔뻑거렸다.
물론 지금 내가 팀장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일부러 직급을 낮춘 것이 아닌가.
솔직히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사무총장이 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왜 확률이…….
[현재 완전한 폭주 상태로 확인되었습니다.]
[자의로 극복 가능한 수치를 넘어섰으므로, 폭주 상태를 해제할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
그런가.
폭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건가.
‘쯧…….’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혀를 차길 한 차례.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솔직히 이렇게 될 줄 알았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럼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회귀 전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의식을 찾을 수도 없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떠돌아야 하는 건가?
[현재 상태는 시스템상 등록되어 있지 않은 결과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검색합니다.]
[……]
[검색 완료]
[(1) 개의 해결 방법이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시스템을 가동하기 위해 시전자의 히스토리를 확인합니다.]
‘……?’
단 한 문장도 이해할 수 없는 음성이 들려온 그 순간.
지이이잉―.
‘뭐, 뭐야…?’
갑자기 눈앞에서 회귀 이후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회귀 후 당황하던 모습.
첫 출근.
문소연을 업고 지원팀으로 달려가던 때.
베트남 출장.
협회 퇴사.
카르마 코퍼레이션 설립.
국제협회와의 충돌.
WDSO 설립.
그리고 방금 웨슬리 사무총장과의 전투까지.
지난 3년간의 모든 일이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멍하니 감상에 빠져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때.
[히스토리 확인 완료]
[1개의 해결 방법을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이 만족하였습니다.]
다시금 음성이 들려왔다.
여전히 뭐라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뉘앙스를 보아하니 희망이 있는 듯 보였다.
부푼 기대를 품고 결과를 기다리길 잠시.
[습득 패시브 : 결벽증]
‘뭐야 이건…….’
회귀 직후, 마치 내 처지를 조롱하듯 던져준 아무 쓸모 없는 스킬이 눈앞에 떠올랐다.
뭐 어쩌라는 건가 싶던 그때.
[각성 조건 달성]
[‘강자의 책임’ 자격 획득]
[각성 패시브 : 슬기로운 청소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암흑 공간이 사라지며, 환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내 잠시 흐려져 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
어째선지 몬스터의 사체를 밟고 있는 내 발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