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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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WDSO 서울 본부 산하, 아이템 제작 연구소.
통칭 이클립스.
김준우를 비롯한 모든 인원이 본부로 복귀한 지도 하루가 지났다.
그사이 모두가 격렬했던 전투를 잊고 짧은 휴식을 가졌지만, 이아영 본부장과 클로이는 그러지 못했다.
회수한 뱅크 아이템 관리를 위해 이클립스에서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이게 다 모여 있는 걸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체임버별로 뱅크 아이템 보관을 완료한 직후.
이아영 본부장이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간석, 차원석, 반능석, 이능석.
이능차원을 각 분야별로 컨트롤 할 수 있는 4개의 뱅크 아이템이 기어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이아영 본부장이 뱅크 아이템이 담긴 유리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클로이가 피식 실소를 뱉었다.
“애도 아니고, 돌멩이 몇 개에 뭘 그렇게 좋아하는지…….”
“그 돌멩이 전문가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
툭 뱉은 말에 곧바로 되돌아오는 화살.
클로이는 말문이 막힌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알고는 있죠? 거래, 양도 불가인 뱅크 아이템이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게 개판이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감격스러운 건가?”
“감격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 반대라고 해야 하나……. 이래저래 이상한 기분이네요.”
이아영 본부장은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퍽 답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클로이의 말대로, 뱅크 아이템이 이곳에 있다는 건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컸다.
그만큼 질서와 규칙이 무너졌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서 이 상황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이아영 본부장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한참을 말없이 있던 그때였다.
“본부 일은 유감이에요.”
클로이에게 어렵사리 그 말을 전했다.
“준우 씨도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상황이 워낙…….”
“그쪽이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요.”
클로이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거기 있다 보면 동료를 잃는 일이야 부지기수였어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한 번씩은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거고요.”
“…….”
“그러니까 아마 데이브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나였어도 그 상황에선 김준우랑 똑같이 했을 거고.”
“…그런가요.”
“만약 돌아간다고 했으면 내가 말릴 생각이었으니까.”
이아영 본부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후배, 그리고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음에도 담담한 반응.
이아영 본부장은 그녀에게 측은함을 넘어 동정심까지 느껴졌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 그녀가 인간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슬픈 감정마저 사라질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거겠지.
그렇게 눈치를 보며 클로이를 힐끔거리고 있던 그때.
“그나저나… 김준우는 어디 있대? 복귀하고 나서부터 쭉 안 보이던데.”
클로이가 시선을 의식한 건지, 대뜸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아, 청소팀 사무실에 있어요.”
“…? 거기서 뭐 하는데요.”
“몰라요.”
클로이는 그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그냥 있어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소 작업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걱정돼서 찾아가도 아무 말도 없고…….”
“파리 일 때문에 그런가…?”
“준우 씨도 이래저래 복잡한 거겠죠, 뭐.”
“흐음… 그런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클로이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아영 본부장은 그런 사람으로 안 보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늘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과 선택을 하는 사람.
어느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가끔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사람.
클로이는 늘 적으로 김준우를 만났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아영 본부장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녀가 지난 3년간 그를 지켜본 결과, 그는 누구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죽을까 겁을 내는 게 아닌, 주변 사람이 죽을까 겁을 내는 사람.
그래서 늘 자신이 가장 선두에 서려고 하는 사람.
두려움이 너무나 커서, 오히려 스스로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린 사람.
‘그런 사람이 파리에서 그런 일을 겪고도 괜찮을 리가 없지.’
이아영 본부장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여기 계셨군요.”
이클립스 뱅크 아이템 관리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그가 들어왔다.
“…준우 씨?”
“뭐야, 마침 그쪽 얘기하고 있었는데.”
김준우.
꼬박 하루를 사무실에 박혀 있던 그가 직접 발걸음 한 것이다.
“여긴 웬일이에요? 일 다 끝나셨으면 집에 가서 좀 쉬시지.”
“뭐, 다른 게 아니라…….”
김준우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내.
“혹시… 우리도 차원석으로 던전 생성 가능합니까?”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이아영 본부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요?”
“개인적으로 확인할 것도 있고… 미리 훈련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네…?”
이아영 본부장의 눈썹이 가늘어졌다.
당최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던 까닭이었다.
“아무튼, 가능합니까?”
“가능이야… 하죠.”
“그럼 하나 열어 주십쇼. 레드 등급으로.”
여전히 무덤덤한 말투.
이아영 본부장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혹시나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혼자 들어갈 생각은 아니죠?”
“…….”
역시나.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혼자는 절대 안 돼요!”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예요?! 임의로 생성한 던전은 이능파가 불안정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운이 나쁘면 규격 외 몬스터가 등장할 수도 있어요!”
“…….”
“훈련이라면 여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던전 생성은 절대…!”
이아영 본부장이 연신 목소리를 높이며 김준우를 설득하던 그 순간.
“…….”
문득 김준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머지않아.
“……알았어요. 해볼게요.”
그녀는 갑자기 설득을 포기하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와 동시에 김준우는 말을 보태지 않고, 감사를 전한 후 곧바로 이클립스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김준우가 사라지자.
“미쳤어요? 그걸 왜 허가해줘요? 여긴 이능파 조정 장비도 없어서 자칫하다간 던전 채로 붕괴해버릴 수도 있는데?”
클로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곧바로 이아영 본부장을 질책했다.
“아무리 저 사람 말이라면 끔뻑 죽어도 그렇지, 이런 것까지 허가해주면 어떡해요? 이건 그냥 죽으라는…….”
“…….”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대꾸를 했을 그녀가 어째선지 계속 입을 닫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클로이가 슬쩍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고…….
이아영 본부장은 마치 괴물이라도 본 듯, 얼굴이 바짝 굳어 있었다.
“…뭐야. 왜 그래요?”
“…….”
“저기요. 정신 차려요. 대체 왜 그러냐니까?”
“……처음 봐요.”
그제야 이아영 본부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준우 씨가 저렇게 화난 거.”
***
WDSO 서울 본부.
작전 본부실.
“…….”
“…….”
김민주와 한유빈은 마주 앉은 채 아무 말 없이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 듯, 꽤나 어두운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만 이어지던 그때.
“……조용하네요.”
김민주가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말을 안 하니까 조용하죠.”
“아니 우리 말고요.”
김민주가 시선을 천장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소음이 끊이질 않았는데… 여긴 너무 조용하다고요.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마냥.”
“…….”
한유빈 또한 김민주를 따라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폭풍전야…… 뭐, 그런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길 한 차례, 이내 김민주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글쎄요. 뱅크 아이템도 입수했고, 에덴이 국제협회에 들어가는 것도 막았으니 어떻게 보면 잘 된 거긴 한데…….”
“에덴이 제삼자에게 들어가는 건 잘된 일이 아니잖아요.”
한유빈이 말하자, 김민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의미가 있는 물건이니까.”
“국제협회가 가만히 있지 않겠죠?”
“그거야 뭐…….”
김민주가 말끝을 흐렸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내 김민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 러시아를 먼저 어떻게 할 거예요. 공격을 하든지, 거래를 하든지. 뱅크 아이템까지 빼앗긴 마당에 에덴은 마지막 남은 보루니까요.”
“그럼 우리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이사회에서 러시아랑 대화해보려고 여러모로 노력 중이에요. 이두식 이사님이랑 사무총장님도 그렇고요. 근데 뭐…….”
김민주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잃을 게 없으니 더더욱 극단적으로 나올지도 몰라요.”
“그럼 차라리 저희가 먼저 공격하는 게 낫지 않아요? 독일 전투로 전력도 많이 소모됐을 텐데, 그놈들이 준비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면…….”
“지금은 힘들어요.”
김민주가 한유빈의 말을 끊으며 즉답했다.
“국제협회보단 아니지만, 우리 병력도 피해를 많이 입었어요. 지금 바로 전투를 나설 여력도 안 되고요.”
“그럼 우리라도…….”
“가능하겠어요?”
김민주가 묻자, 한유빈이 평소답지 않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고작 몇 명으로 국제협회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잔챙이들은 몰라도 웨슬리 사무총장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김준우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도 준비할 게 있다고 부재중이잖아요.”
“……하아. ”
본부에 복귀한 이후로 뭘 하는 건지, 도통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준비를 하는 거래요?”
“저도 잘은…… 훈련이라고밖에는 말씀 안 해주셨어요.”
“훈련?”
그 말에 한유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인간이 훈련이 필요한가…?”
“그러게요.”
김민주도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튼, 선생님이 준비될 때까진 우리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쯧… 가만히 있으면 괜히 더 불안하기만 한데.”
“누가 아니래요.”
그 말과 함께 또다시 사무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두 본부장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그 적막 속에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
“본부장님.”
갑작스레 편창현 통제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 생겼나요?”
“저, 지금 강원도 쪽에서 던전 출현이 감지됐는데…….”
그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감지된 이능파가 레드 등급을 한참 초과했습니다.”
“네, 네…?”
“뭐?!”
그 보고에 김민주와 한유빈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민주가 곧바로 벌떡 일어나며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봉쇄 명령 내리고, 작전팀 대기시키세요!”
“저 그게…….”
하지만 편 팀장은 여전히 가만히 선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끝에, 그가 말을 이었다.
“바로 확인해보니…… 김 팀장님이 벌써 진입하셨답니다.”
“……!”
“……!”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짝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