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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한별전자 본사.
자신의 손자와 담판을 짓고 있던 하덕수 회장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변했다고? 그거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확 달라진 하덕수 회장의 목소리.
하성일 본부장은 순간 움찔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다시금 곧은 자세로 하덕수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늘 기업의 자격과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린 기업인인 동시에 시민이며,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신 건 할아버님입니다.”
“…….”
“그랬던 할아버님이 이제 와서 이득이 없으니, 움직이지 않겠다뇨.”
그가 하덕수 회장을 반듯이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모른 척하고 몸집을 키운 회사라면, 전 필요 없습니다.”
“…….”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시겠다면…… 할아버님의 뒤를 잇겠다는 말은 철회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성일 본부장은 그를 향해 허리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하덕수 회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성일.
그의 막내 손자이자, 가장 예뻐했던 아이.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로 엄격하게 교육했던 다른 손자들과는 다르게 그에 대한 지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만큼은 재벌이 아닌, 사람 하성일이길 바랐다.
다행히 하성일 또한 자리와 돈에 대한 욕심이 크게 없었다.
하성일은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아이였다.
하덕수 회장 본인 또한 맏이였던 하성태나 그의 누이인 하미연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심성은 곱지만, 너무 감성적이어서 단호하지 못했던 누이. 똑똑하고 이성적이었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았던 형.
둘 다 하덕수 회장의 성에 차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하성일이 성인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그를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하성일은 형제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사실 그가 소질이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눈.
그는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형과 누이…… 아니, 한별그룹을 세운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 눈만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을 자신의 동료로 만들 수만 있다면 한별그룹을 맡기기엔 충분한 재목이었다.
다만 문제는 하성일 본인이 욕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조직을 이끄는 이가 아닌, 그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하던 놈이다.
어쩌다 경영권 인계 이야기가 나오면 그놈은 늘 슬그머니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가장 적임자였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상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그의 누이인 하미연에게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그랬던 놈의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
다름 아닌 김준우, 그 한 명 때문에.
그와 몇 번 일을 하더니 어떤 스위치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평범하게 회사 생활을 하는 게 목표였던 저놈이 이젠 당당히 내 자리를 잇겠다고 선언했으니까.
WDSO… 아니, 카르마 코퍼레이션에 들어간 것도 이를 위해서였다.
조직의 총수가, 그저 아랫사람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 조직원들과 함께 갈 수 있다는 것을 김준우를 통해 배운 것이다.
그건 조부인 본인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기어이…….
‘만족스럽군.’
합격선을 넘었다.
“그럼, 없던 일로 하고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성일 본부장은 그렇게 인사를 전한 후, 등을 돌렸다.
이내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던 그때.
“설립해주마.”
하덕수 회장이 그의 등에 대고 그 말을 뱉었다.
“…네?”
“구호재단, 설립해주겠다고.”
“저, 정말입니까?”
놀란 눈으로 묻자, 하덕수 회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도 많이 늙었다. 남들 같으면 벌써 은퇴하고 골프나 치면서 놀러 다닐 나이인데, 아직도 회사에 틀어박혀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
“안 그래도 슬슬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준비도 안 된 놈을 앉힐 수는 없잖느냐.”
뜬금없는 이야기에 하성일 본부장이 벙쪄 있길 잠시.
이윽고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서, 설마 할아버님…….”
“그래, 합격이다.”
하덕수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아직 정식 인계까지 많은 절차가 남아 있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하성일 본부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앞으로 한별그룹을 잘 부탁하마.”
조용히 악수를 청했다.
하성일 본부장은 그의 늙은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일단은… 이 사태부터 해결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악수 대신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며 그 말을 전했다.
“…하하하! 그래, 그러도록 해라.”
생각지도 못했던 반응에 또다시 한 방 먹은 듯 하덕수 회장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하성일 본부장은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하덕수 회장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
“뉴욕 지부와 연락이 끊겼어요.”
뉴욕으로 향하고 있는 WDSO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인력을 실은 14척의 선박.
그중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안에서 이아영 본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방어에 실패한 것 같아요. 애초에 인력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니…….”
“하아…….”
“지금 통제팀이 뉴욕 상공을 위성으로 확인해봤는데, 완전히 쑥대밭이라고 하네요.”
그 보고에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는 상정한 일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꽤나 착잡한 심정이었다.
“미 국방성에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답니까?”
“곧바로 전투태세에 돌입한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상대가 안 되겠죠…….”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손으로 불을 던지고, 입에서 독을 뱉으며, 음속으로 날아다니는 것들이다.
전투기나 탱크 정도는 움직이는 표적에 불과하다.
절망적이겠지만, 일반 병력으로는 그 어떤 대응도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라도 빨리 가야 하는데…….’
아직 도착까지 8시간이나 남았다.
아슬아슬한 시간.
만약 한 시간이라도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안 좋은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티, 팀장님!」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상황을 관찰 중이던 통제팀에서 날아든 무전.
「혀, 현재 대서양에서 항해 중이던 선박 12척이 공습을 받아 침몰했다고 합니다!」
“……예?”
그 소식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순간 멍해지기 시작했다.
「확인해보니 뉴욕 지부 병력이 승선해 있던 선박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부 병력이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국제협회 귀에 들어간 것 같은데…….」
“이런, 빌어먹을…….”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현재 파견을 나간 병력은 뉴욕 지부의 거의 모든 전력이다.
그들이 바다 위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건…….
‘아예 시작도 전에 끝내겠다는 건가…….’
최악의 상황.
뉴욕은 방어는커녕 손도 못 쓰고 있고, 급하게 복귀하던 지부 병력은 공습까지 받았다.
만약 이대로 국제협회 전력이 모두 집결한다면, 그땐 승산이 없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뉴욕 도착까지 아직 8시간 정도 남았습니다. 늦지 않게 도착은 둘째 치고, 그사이에 저희가 공습을 받을 수도…….」
“…….”
그의 말대로다.
뉴욕 지부의 정보마저 새어 나갔다.
지금 망망대해에 떠 있는 우리 또한 공습을 받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우리의 상태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다.
포지션도, 스킬 활용도 제한적인 배 위에서 급습을 받는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모든 본부장이 모인 그 자리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
“…….”
그와 동시에 김민주와 한유빈의 표정이 싹 굳었다.
그녀들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공격을 받으면 살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을.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회의실.
그런 와중에.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김민주가 애써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긍정적인 말을 던졌다.
물론…….
“글쎄. 늦고 빠름의 문제지, 공습은 무조건 할 거라고 보는데.”
내가 단번에 초를 쳤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긍정의 힘, 희망찬 생각 따윈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냉철하고 철저하게 현실만을 봐야 한다.
이를 갈고 미국을 공격한 놈들이다. 게다가 파견 중이었다는 소식까지 입수했다.
그런데 설마 우리가 지원을 나가는 중이라는 걸 모를까?
‘그럴 리가 없지.’
확신할 수 있다.
우린 무조건 공격당한다.
“그럼 어떻게 해요?”
“여기서 공격받으면 우리 다 죽는 거 알죠?”
김민주와 한유빈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법이라…….
“일단은… 최대한 경계를 해야겠죠.”
내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각 팀장에게 전투 준비태세 갖추라고 하세요. 방어막 구축도 진행해야 할 것 같으니, 가디언 클래스 전원 소집해주시고요.”
“네.”
“알았어요.”
김민주와 한유빈이 즉각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들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정말 공습을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각오를 해둬야 할지도 모르겠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후방 2km 뒤에서 미확인 선박이 접근 중입니다!」
선장실에서 다급한 무전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본부장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실소와 함께 그렇게 중얼거리길 한 차례.
“뭣들 하십니까? 움직이십시오!”
그 한마디에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이윽고 배 전체에 울리는 사이렌과 각 팀장에게 전달된 전투 준비태세.
승선해 있던 모든 인력이 우리를 따라 갑판으로 올라왔다.
이내 수평선을 바라보자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한 척의 거대한 배.
하지만…….
“고, 공격할까요?”
“잠깐 대기하세요.”
확실히 국제협회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지나가는 무역선일 수도 있다.
일단은 확인해봐야 한다.
‘…….’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선박을 바라봤다.
이윽고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선박.
갑판 위에 있는 모두가 숨죽여 그 배를 관찰했다.
이내 선체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내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
“확인했습니다.”
국제협회가 탈취한 이스탄불 협회의 선박.
수천 명의 헌터들이 승선해 있는 그 거대한 배의 선장이 통신기에 대고 말을 전했다.
“WDSO 소속 선박 14척입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받은 사람은 국제 헌터 협회의 사무총장.
웨슬리 다비드였다.
「확실한가요?」
“예, 확실합니다. 갑판 위로 병력이 보이지 않는 거로 봐선 아직 저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선장이 14척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바로 공격할까요?”
「시간 끌어서 좋을 거 없죠.」
웨슬리 사무총장이 명령을 내렸다.
「공격하세요.」
“공격 개시.”
선장의 지시가 전달되는 순간.
쾅―!
콰광, 쾅―!!
14척의 선박에 무차별적인 스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망망대해 위에서 시작된 기습 공격.
WDSO 선박은 제대로 된 반격도 없이 그대로 공격을 허용했고, 이내 머지않아.
쿠구구구―!
총 14척의 선박이 힘없이 침몰하기 시작했다.
바다 위라는 한정된 장소.
제아무리 날고 기는 헌터들이라고 해도 이곳에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공격을 허용한 이상, 저들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처리했습니다.”
이내 선장이 상황 종료를 보고했다.
하지만 웨슬리 사무총장은 그마저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했다.
「혹시 모르니 바로 철수하지 말고, 가까이 가서 확인하세요.」
“…알겠습니다.”
선장은 그렇게 대답하며 천천히 침몰지점으로 배를 몰았다.
수면을 가득 채운 온갖 파편과 검은색 기름띠.
그리고 그 사이에…….
“뭐야…….”
“이, 이거 뭔가 이상한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드러났다.
제일 먼저 현장을 확인한 선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산산조각 난 배를 살폈다.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선장 또한 곧바로 갑판으로 향했고, 이내 직접 수면을 확인했다.
그 또한 이상한 점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 뭐야…?’
14척의 선박.
승선해 있는 추정 병력은 수십만 명.
그런데…….
“빌어먹을…….”
어째선지 수면 위로 단 한 구의 시신도 떠오르지 않았다.